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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19화 (20/219)

-19화

글라스가 돌아올 때까지 일행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달리느라 고생했을 말에게 물을 먹였고 그들도 간단하게 목을 축였다.

프라우디에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한참 동안 손수건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프라우디에.”

“왕자님…”

“괜찮을 거야.”

카이엔은 위로하기에 소질이 없었다.

그는 항상 남들에게 위로받는 입장이었기에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 짧은 한마디뿐이었지만 프라우디에는 힘 없이 미소를 지었다.

‘몬스터들의 웅성거림이 덜한 방향으로 가면 되려나? 두려운 존재가 나타났다면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할 테니까. 아니, 내가 들은 소리는 지하종 몬스터의 중얼거림일지도 몰라. 그런 놈들은 지하에서 움직였다간 오히려 자기 위치를 들킬 수 있을 테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도…’

카이엔의 머릿속도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쯤 되니 정찰을 나간다고 했던 글라스가 걱정되었다.

아무리 그가 뱀파이어라고 해도, 바이스가 시종 대리로 가르친답시고 훈련을 시키고 있는 모양이지만 검은 숲은 위험하다.

몬스터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피하려고 한 존재가 자네인이 아니라면? 그럼 큰일이지 않나?

이미 가버린 사람을 불러봤자 바로 돌아올 리가 없으니 기다리는 방법 밖에 없었다.

다행히 잠시 후 정찰을 나갔던 글라스가 돌아왔고 그는 반가운 소식을 가져왔다.

“발견했습니다. 저쪽입니다.”

“다행이네. 얼른 가자.”

모두 마차에 탑승하자 바이스는 다시 마차를 몰았다.

글라스의 비행 속도가 마차와 거의 비슷했던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자네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고있는 데다가 몸을 웅크리고 있어서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마차를 세운 바이스가 문을 열어주자 카이엔과 프라우디에, 에빌, 사트로누스가 급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잔느!”

자네인을 제일 먼저 부른 건 프라우디에였다.

그 목소리에 자네인은 움찔거렸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프라우디에가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자네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까이 오지 마! 위험해…”

“잔느…”

“무슨 일이 있나 본데요.”

침착한 바이스의 말에 프라우디에는 걸음을 멈추었다. 슬픈 눈으로 자네인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쪽을 봐주지 않았다.

늘 자신을 지켜주었던 자네인이, 지금만큼은 그보다도 훨씬 작고 연약해보였다.

웅크린 몸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탄식과 후회가 섞인 스스로에 대한 원망의 단어들뿐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가까이 가지 말아야 했어.”

“말을 걸지 말걸…”

“마음을, 열지 말걸…”

그녀는 후회하며 양팔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 모습에 카이엔이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자네인이 해치려고 한 건 프라우디에였으니 다른 사람은 가까이 가도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 했건만 눈 깜빡이는 그 짧은 순간에 나타난 남자는 암적색 코트를 휘날리며 등장했다.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카이엔 일행을 향했다. 그 얼굴을 보고 에빌이 깜짝 놀라 외쳤다.

“어…어, 에빌라이 공작?!”

“뭐?”

“에빌라이 공작! 아티카 듀란 에빌라이!”

“너랑 이름이 비슷하네.”

“야!”

지금 농담 따먹기나 할 순간이 아니었지만 카이엔의 말에 에빌은 자신도 모르게 황당해하며 외치고 말았다.

카이엔도 에빌라이 공작의 얼굴 정도는 알 텐데, 왜 모르겠단 표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워낙 어릴 때 만나서인 걸까? 에빌이 카이엔에게 부가설명을 해주고 있는 모습에 갑자기 그 장소에 등장한 남자, 에빌라이 공작은 관심도 주지 않고 자네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들으라는 듯 뚜벅거리며 내는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자네인은 떨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쓸모없구나.”

그녀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시키는 것도 제대로 못 하다니. 혼자서 괴로워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면 편했을 것을, 굳이 저항하다가 이 꼴이 난 거냐.”

“아…”

자네인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차가운 눈으로 자네인을 내려다 본 에빌라이 공작의 눈이 이번엔 카이엔을 향했다.

그는 자네인을 보던 싸늘한 표정에서 입꼬리만 살짝 올려 피식 웃었다.

“편하게 지내고 계신 걸 보니 한결 마음의 무게를 덜겠군요, 왕자님.”

“허? 넌 누구길래 날 알고있냐?”

“야, 카이엔! 내가 아까 한 말은 귓등으로 들었-”

“하긴 얼굴 볼 일이 얼마 없었으니 모를만도 하겠네요. 아티카 듀란 에빌라이. 가르간트의 공작 중 한 명입니다. 물론 지금은 공작으로서 와 있는 게 아니지만…”

카이엔 일행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그가 팔을 들자 끈 달린 인형마냥 자네인의 몸이 휘청거리면서 일으켜 세워졌다.

자네인은 계속 몸을 떨었다. 힘겹게 입을 열어 그녀가 목소리를 짜냈다.

“티아…마…티스…님. 저는…”

“시끄럽다. 날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 그러니 어서 네 손으로 저것의 정체를 밝혀내라!”

“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자네인은 괴로워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팔이, 다리가 점점 부풀어오르며 이내 인간의 형상을 잃었다.

뱀과 도마뱀을 연상시키는 매끈한 광택이 도는 비늘이 전신에 자리잡았다. 빛나던 금발이 자리하고 있던 곳엔 거대한 뿔과 용의 머리가 드러났다.

본래 인간의 모습이던 기사는, 비명소리와 함께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비명소리는 뜻을 알 수 없는, 목을 긁는 듯한 괴성으로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전설 속의 존재와 같은 모습에 카이엔이 깜짝 놀라 외쳤다.

“드래곤?!”

“으악!”

“아뇨 드래곤이라기엔 감각이 좀…”

글라스가 얼버무렸다. 글라스와 바이스는 카이엔을 지키기 위해 그의 앞으로 나온 상태였다.

다들 드래곤의 등장에 놀란 듯 했지만 글라스는 달랐다.

그의 눈에는 드래곤으로 변한 자네인보다 그 옆에 서있는 남자… 에빌은 그를 공작이라고 불렀지만 자네인은 띄엄띄엄한 목소리로 ‘티아마티스’라고 부른 그쪽이 훨씬 더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그 느낌을 전달할 시간이 없었다.

“크워어어어-!”

귀를 멀게 할 정도의 울부짖음에 모두의 움직임이 순간 마비되었다.

그 순간 드래곤은, 자네인은 프라우디에를 향해 달려들었다. 할퀴려 드는 발톱을 막은 건 바이스였다.

언제 뽑아든 건지 모를 검으로 드래곤의 발톱을 막고 쳐내면서 그가 외쳤다.

“글라스 씨는 왕자님을 지키십시오! 하하, 드래곤이라니 이 무슨… 왕자님, 자네인 님이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알아들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몰라! 비명 소리밖에 안 들려!”

“그건 저와 같군요.”

바이스가 검을 휘둘렀지만 자네인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낼 수 없었다.

쯧하고 혀를 차면서도 바이스는 프라우디에를 노리는 자네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프라우디에 님은, 알고계셨습니까?”

“몰랐…어요. 잔느…”

“이름이라도 불러보시죠. 제정신을 차리면 이성이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폭주 비슷한 상태인 것 같고요. 원해서 저렇게 된 것도 아닐 테고.”

바이스의 시선이 잠깐 티아마티스에게 닿았지만 잠시뿐이었다.

에빌라이 공작… 티아마티스는 팔짱을 끼고 선 채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자네인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뒷짐지고 구경만 할 셈인 모양이었다.

꼭 한 방 먹이고 말겠다고 생각하며 바이스는 자네인에게 달려들었다.

자네인이 꼬리를 휘둘렀다. 높이 점프해서 꼬리를 피한 바이스는 냅다 꼬리에 검을 찔러넣었다.

깊게 박히진 않았지만 이쑤시개에 손가락이 찔린 정도의 충격은 간 것 같았다.

“잔느!”

프라우디에가 애타는 목소리로 자네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사트로누스는 카이엔을 지키려고 크게 울부짖었고 에빌은 검을 들고있었지만 드래곤을 상대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글라스는 위험한 상황이 되면 카이엔만이라도 빼내기 위해 도망칠 길을 확인했다.

카이엔은 자네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비명밖에 들리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도대체 저놈은 뭐야?’

에빌은 그를 가르간트의 공작이라고 말했고 저놈 역시 그를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그게 다였다.

갑자기 왜 자네인이 드래곤으로 변했고 저놈의 말을 따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남자, 티아마티스가 자네인을 프라우디에의 옆에 붙여놓고 프라우디에에 대해 조사하던 사람이라는 결론에 닿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프라우디에.

저 애가 뭘 어쨌길래?

바이스는 혼자서 드래곤으로 변한 자네인과 맞서고 있었지만 유효타를 먹이지 못 하고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 혼자 드래곤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역시 바이스가 이상한 거였다.

쿠드득!

자네인의 앞발이 대지를 헤집었다. 땅이 마구잡이로 갈라지면서 지하종의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고 운 나쁜 몬스터는 자네인에게 그대로 짓밟혔다.

몬스터의 비명소리가 카이엔에게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 소리에 인상을 쓰며 그는 근처에 있던 에빌에게 말했다.

“…지금 가장 위험한 건 프라우디에랑 자네인이랑 맞서싸우고 있는 바이스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왜?”

“저 사람이랑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카이엔?“

”왕자님!”

“프라우디에가 뭘 어쨌다고 저러는 건데! 그리고, 하려면 자기가 직접하든가 왜 자네인한테 저러는 거고!”

이해할 수가 없다며 카이엔이 외쳤다.

그 외침을 들었을 텐데도 티아마티스는 카이엔을 향해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폭주하며 날뛰고 있음에도 바이스 한 명도 처리하지 못 하는 자네인을 보며 혀를 찰 뿐이었다.

쥐새끼같은 움직임이긴 한데, 그래도 자네인은 그가 직접 피를 주고 세례한 녀석이니 쉽게 맞서 싸울만한 상대가 아닐 텐데.

쫓겨난 왕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알아볼 필요가 생겨버렸다.

“아…”

프라우디에는 덜덜 떨면서 자네인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아주 높이 들고 올려다 봐야만 자네인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거대한 드래곤으로 변해버렸다.

어째서 그녀가 저렇게 변한 건지, 왜 괴로워했던 건지 짐작가는 부분이 있었다.

가슴 위에 얹은 두 손을 꼭 움켜쥐고 프라우디에게 외쳤다.

“잔느! 저… 저를 해치우세요! 저도 알아요, 전 인간이 아닐 거예요. 직접 듣지는 못 했지만 대강은 알 수 있어요. 제… 제 정체 때문인 거죠? 제가 뭔지 알아야 잔느는 돌아올 수 있는 거죠? 그러면 괜찮아요. 그렇게 해도 돼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프라우디에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전 어차피 인간이 아니니까… 만들어진 괴물이니까! 가슴을 갈라서 헤집어도 붙이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순식간의 일이었다.

바이스는 자네인의 시선을 돌려 프라우디에에게서 떨어지게 만들었지만 프라우디에는 그녀의 이름을 외침으로서 관심을 끌어냈다.

바이스가 미처 앞을 막을 틈도 없이 자네인이 프라우디에게 달려들었다. 강한 공격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발톱으로 할퀴는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옷이 찢겨나가고 피부와 살이 한꺼번에 뜯겨나갔다.

흐르는 피는, 튀는 피는 분명히 붉은 색이었지만 심장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붉은색의 펄떡거리는 근육조직이 아니었다.

검보라색의 구슬. 보석과도 같은 형태를 띤 그것은 불길한 빛을 흘리며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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