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다음 날 아침, 바이스가 깨우는 손길에 카이엔은 눈을 떴다.
몇 시인지 몰라 물어보니 평소와 같은 시간에 깨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찍 안 나가도 되는 거야?”
“식사만 마치고 바로 나갑시다. 아침 식사 때 남작님께 외출을 이야기하시는 것도 좋고요.”
“그래야겠네.”
카이엔은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카이엔을 깨우고 나서 바이스는 프라우디에를 깨웠다. 비몽사몽한 두 사람을 깨우고 세수시키고 옷까지 입게 한 다음 식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안내했다.
프라우디에는 제 2식당에서 평소 식사를 했기에 그쪽으로 가겠다고 했다.
카이엔이 식당에 도착하니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남작이 먼저 자리에 앉아있었다.
카이엔이 오기 전까진 식사에 손도 대지 않고 있던 그는 카이엔이 들어오자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왕자님.”
“으음. 어젯밤에 소란스러웠을 텐데, 미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조금, 설명하긴 좀 어려운 일이긴 한데 오늘 사트로누스와 라스를 데리고 자네인이 어디로 간 건지 추적해보고 싶어. 아, 나한테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그렇군요.”
남작은 깊은 사정까지 묻지 않았다. 본인도 귀가 있었으니 어젯밤 릴리시아가 낸 비명을 들었을 테고 영주성 집사나 하인들이 전해준 이야기가 있었을 텐데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카이엔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카이엔에게 그제야 남작이 말을 걸었다.
“왕자님?”
“응?”
“편식하지 마세요.”
“하… 무슨 말을 하나 했는데.”
“왕자님이 하시는 일인데, 그게 나쁜 일일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어서겠죠. 잘 해결하고 나셔서 말해주셔도 됩니다.”
믿는다는 얼굴. 늘 카이엔에게 지어주던 표정이었다.
카이엔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접시 위에 아침식사를 남김없이 입 안에 밀어넣었다. 싫어하는 야채는 대충 씹어삼키고 물로 입을 헹궜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카이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작에게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할게.”
“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식당에서 나오는 카이엔의 뒤를 바이스가 따라갔다.
이미 준비는 다 되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스가 카이엔을 챙기는 동안 사트로누스와 라스를 챙긴 건 글라스였다.
라스와는 말이 통해도 사트로누스와는 통하지 않는 글라스는 손짓발짓에 땅바닥에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사트로누스에게 목줄을 채우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진이 빠진 그 모습에 카이엔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바이스. 사트로누스 목줄은 내가 채워도 되는데 굳이 글라스한테 시킨 거야?”
“한 번쯤은 해봐야죠.”
“아무리 그래도…”
“왕자님은 목줄 잡으십시오. 프라우디에 님은 페이리 씨에게 데려와주라고 부탁했습니다.”
“저 왔어요!”
바이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페이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외출복 차림의 프라우디에가 우물쭈물하며 페이리의 옆에 서있었다. 일행이 다 모인 것을 확인한 바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그럼 나가죠. 프라우디에 님, 가져오셨나요?”
“네. 여기…”
프라우디에는 자네인이 썼던 손수건을 내밀었고 사트로누스와 라스가 코를 내밀어 손수건의 냄새를 맡았다.
긴가민가한 표정인 둘이었지만 곧 앞발을 내밀어 한 방향을 가리켰고 카이엔은 한 손에 두 짐승의 목줄을 잡은 채로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추적이 시작되었다.
손수건에 남은 냄새가 흐릿한 건지 자네인이 너무 빠른 속도로 이동해서인지, 사트로누스와 라스는 바닥에 코를 대며 냄새를 맡는데 상당한 시간을 썼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글라스가 물었다.
“혹시 지붕 위를 달려 다닌 거 아닐까요? 그럼 땅바닥에 냄새가 남을 리가 없죠.”
“그럴 법도 하네요.”
“잔느… 위험했을 텐데…”
프라우디에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혹시라도 두 명이 튀어나갈까 봐 목줄을 잡고있던 카이엔으로선 프라우디에에게 손을 뻗을 수 없기에 괜찮을 거라며 입만 움직였다.
한참 동안 킁킁대다가 앞발을 휘적이면서 의견을 주고받던 중 사트로누스가 발톱으로 땅을 긁었다.
“그르릉-”
- 저 너머인 것 같다.
“엥?”
“캬릉.”
- 이쪽으로.
사트로누스의 안내를 따라 일행은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검은 숲과 영지 사이를 나눠놓은 거대한 벽 앞에 도착했다.
사트로누스는 이곳에서 냄새가 끊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높은 방벽을 넘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너머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거, 자네인 씨에 대한 정보를 좀 수정해야겠군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저건 못 넘는데.”
“응. 그런 것 같아.”
바이스는 농담으로 한 말인 것 같았지만 카이엔은 진담으로 받아들였다.
날개가 달려있지 않은 이상 저 벽을 넘어서 검은 숲으로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자네인은, 도대체 왜 검은 숲으로 간 걸까.
이 벽 안으로 넘어가려면 아무리 그가 왕자라고 해도 남작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했고 일행은 방향을 돌려 영주성으로 향했다.
아직, 정오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기에 빠르게 움직인다면 바로 검은 숲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괜찮을지 모르겠네.”
“일단 출입 허가부터 받으러 가죠.”
검은 숲 안은 마을보다 훨씬 위험했다.
어떤 몬스터가 얼마나 활보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주기적으로 탐색이며 토벌을 나간다고 해도 그곳은 인간이 지배하고 차지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자네인이 검은 숲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확신한 카이엔은 바로 남작에게 가서 검은 숲의 방벽 안으로 넘어가고 싶다고 요청했다.
“위험합니다, 왕자님.”
“괜찮아. 금방 다녀올게.”
“허나…”
“안 죽어. 안 다쳐서 돌아올 테니까.”
고집스런 카이엔의 태도에 남작은 곤란해하면서 쉽게 대답을 해주지 못 했다.
그러나 결국 카이엔에게 이기지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관련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며 남작이 말했다.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엔 오셔야 합니다. 꼭이요.”
노력할게.”
“기사들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괜찮아. 어차피 나랑 바이스, 글라스, 프라우디에, 사트로누스랑 라스… 아, 이번엔 에빌도 데려가야겠다. 혼자만 빼놓고 다니면 분명 삐질 테니깐. 아무튼 날 지키려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문제없어. 얼마 전에 사냥꾼들도 대거 들어와서 사냥하고 갔잖아?”
“그래도 위험합니다.”
“빨리 해결하고 올게. 오늘 못 찾으면 다음에 기사들 대동해서 들어갈거고. 약속할게.”
“꼭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남작과 단단히 약속을 한 다음에야 카이엔은 집무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허락을 받았다며 허가증을 내미는 그를 보며 바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빌 씨도 데리고 가죠.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마. 상처받는다.”
“네.”
에빌은 다른 기사들과 훈련 중이다가 카이엔이 부른다는 말에 헐레벌떡 달려왔다.
호위 기사로 왔음에도 호위 일은 안 하고 늘상 훈련만 하는 친구를 보며 카이엔은 인상을 썼다.
“넌 언제까지 훈련만 할 거야?”
“그야 바이스 씨가 너한테 호위 필요없으니 실력이나 더 쌓고오라고 했단 말야…”
“너 그랬어?”
“그랬습니다.”
“왜 나한텐 말 안 했어? 난 에빌이 농땡이 피우는 줄만 알았는데!”
“너무해! 그러는 카이엔 너야말로 왜 나한테 직접 물어보지 않은 거야?”
“그… 그건… 네가 되지도않는 변명을 지껄일까 봐…”
“나 너한테 그정도 밖에 안 되는 머저리였던 거야??”
상처받았다며 에빌은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깊게 상처받은 눈에 카이엔은 냉큼 사과해야만 했다.
“에빌 씨가 이해해주십시오. 왕자님이 하도 어렸을 적에 뒤통수를 많이 맞아서 그런 겁니다.”
“카이엔…”
“넌 쓸데없는 말 좀 하지 마!”
“얼른 갑시다. 시간이 없네요. 마차를 준비해뒀습니다.”
카이엔은 짜증을 냈지만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전환했다.
허가증을 받았으니 검은 숲 안으로 넘어가는 일은 수월했다.
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카이엔이 무장한 기사인 에빌과 시종인 바이스에 사트로누스, 라스까지 데려가지만 그 외 전투에 쓸만한 기사나 병사를 일체 데려가지 않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하지만 세자르 남작의 허가증도 있었고 카이엔의 고집과 바이스의 설득에 문을 열어줄 수 밖에 없었다.
마차는 바이스가 마부석에 앉고 글라스가 라스와 함께 그 옆에 함께 타기로 했다.
라스가 사트로누스보다 작으니 같이 마부석에 앉은 채로 냄새로 추적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움직이는 중간중간 멈춰서 자네인의 냄새를 확인하기로 했다.
큰 마차를 가져왔기에 사트로누스도 태울 수 있었다. 사트로누스는 바닥 중앙에 누운 채로 그르렁거렸다.
“저는 마차를 모는데 집중하겠습니다. 라스 씨는 자네인 님의 추적을, 글라스 씨에겐 다가오는 몬스터들에 대한 경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뱀파이어는 인간보다 오감이 뛰어나니 멀리서 접근하는 몬스터도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며 바이스가 일러두었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마차 앉은 채로 글라스는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그가 알고 있는 검은 숲은 이렇게 조용하지 않았다.
아무리 최근에 사냥꾼이며 용병들이 한바탕 휩쓸고 갔다고 해도 인간에게 당할 만큼 약한 몬스터가 있는 반면 인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이로 삼는 몬스터도 있었다.
“너무… 조용한데요?”
결국 글라스가 입을 열었다.
작은 몬스터들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바이스 역시 동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몬스터들이 이 근방에서 도망친 것만 같았다.
몬스터들을 도망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무언가 있다는 뜻이었다.
“왕자님, 좀 어떻습니까?”
“근처에 몬스터가 없나 본데.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아니, 들리는 건가?”
보통 그가 검은 숲에 정찰대나 토벌대를 따라 들어오면 귀를 기울였을 때 몬스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웅웅거리는 미약한 소음만이 끊어질 듯 말 듯 들려왔다. 아니, 실은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덜컹거리는 소리에 그가 착각한 걸지도 몰랐다.
워낙 작은 소리라 신경쓰지 않기로 했지만 바이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보이지 않는 몬스터와 인간보다 감이 좋은 뱀파이어조차도 이상하게 여기는 이 땅의 분위기.
바이스는 잠시 마차를 멈췄다. 마차가 멈추자 라스가 마부석에서 폴짝 뛰어내려 바닥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중간중간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탐색의 시간을 가졌다.
방향을 수정해가면서 일행은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움직이는 동안, 단 한 마리의 몬스터와도 마주치지 못 했다.
그렇게 여섯 번째로 멈춰섰을 때 글라스가 말했다.
“제가 주변을 좀 둘러보고 올게요. 냄새도 점점 짙어진다고 했으니까요.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마차의 창문을 두드리고 카이엔에게 양해를 구한 글라스는 박쥐의 모습으로 변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카이엔은 가만히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한참 동안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끝에, 그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잠자코 앉아있던 카이엔이 마차의 문을 열고 나오자 사트로누스도 함께 밖으로 나왔다.
“위험합니다. 들어가 있으세요.”
“잠깐만. 무슨 소리가 들려서.”
“소리요? 몬스터입니까?”
“으으음~ 멀리서 들리는 소리같기도 한데, 다들 조용히. 잠깐이면 되니까.”
검은 숲에 들어왔을 때부터 카이엔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기분탓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선 아마 몬스터들의 웅성거림이었던 모양이다.
그 소리는 겁에 질린 몬스터들의 수군거림이었다.
검은 숲의 몬스터들이 이곳을 피해 다른 곳으로 몸을 숨기게 할 정도의 존재가 있다는 것.
이렇게 위험한데 자네인은 대체 어디서 뭘하고 있는 걸까.
카이엔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좀 더, 귀를 기울였다.
- 무서워…
- 저런게 왜 여기 있는 거야?
- 빨리 좀 갔으면 좋겠네…
여러가지 목소리가 뒤엉켜서 들렸다.
같잖은 무장을 갖춘 인간들이 이 땅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몬스터들을 그들을 습격하지 않았다.
인간을 습격해서 얻을 이익보다 이곳에 나타난 막강한 존재와 마주치는 것이 훨씬 더 두렵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