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어휴, 그래, 그래, 알았어. 많이 아팠겠구나. 괜찮아, 괜찮다. 착하지.”
남작이 한번 읽어보라고 건네준 영지 내 금전관련 서류를 보며 반쯤 졸고 있던 카이엔은 릴리시아의 비명에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넘어지고 난 뒤 부랴부랴 정원으로 달려나왔다.
라스는 일단 방 안에 두고 혼자 나왔다.
다른 이들에게도 들릴 정도의 비명을 지른 건 처음이라 헐레벌떡 달려온 그가 본 건 잘린 촉수를 흔들면서 괴성을 지르고 있는 릴리시아와 차마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 하고 멀찍이 서서 불안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하인들이었다.
지금까지 릴리시아가 사고를 친 적이 없었기에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카이엔이 달려나오자 구세주라도 본 것처럼 안도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들을 좀 더 뒤로 물러나게 하고 카이엔은 릴리시아에게 다가갔고 열심히 그녀를 달래주었다.
깨끗하게 잘린 촉수의 단면에선 미끈한 체액이 흘러나왔다.
여기에 붕대를 감아줘도 되는 건지, 약을 발라줘도 되는 건지 알 수 없는 카이엔은 시간에 맡기기로 하고 릴리시아의 몸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릴리시아. 괜찮으니까 그만 울어. 많이 아파?”
- 으허어어엉!
“그만 울고. 뚝. 간식이라도 가져다줄까? 잘 먹으면 금방 나을 거야.”
야생의 몬스터들은 부상을 입으면 충분한 휴식과 영양 공급으로 상처를 치유할 터. 릴리시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카이엔은 손짓으로 하인들에게 고기를 좀 가져오라고 시켰다.
수신호를 알아들은 하인들 네다섯 명이 냉큼 달려갔다.
바이스와 글라스가 나타난 건 그로부터 십여 분 정도 지난 뒤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너야말로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저도 사정이 있었던지라.”
어깨를 으쓱하곤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카이엔과 릴리시아에게 다가갔다.
릴리시아가 칭얼대면서 카이엔에게 잘린 촉수들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바이스 역시 잘린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상당히 깔끔하게 잘려나간 걸로 봐선 상대의 실력은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었다.
“제가 직접 잘라보지 않아서 잘 모르긴해도 릴리시아 씨의 촉수는 꽤 질길테죠. 이걸 이렇게 만들었을 정도면 꽤 강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알면서 말하는 거 아냐?”
“왕자님도 들으셨나요?”
“릴리시아가 한 말에 따르면 자네인 같던데.”
최근에 작은 아이와 함께 왔던 키 큰 사람.
릴리시아는 그 정도 밖에 말하지 않았지만 딱 떠오르는 사람은 자네인 뿐이었다.
카이엔의 침착한 대답에 바이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건 현장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페이리 씨가 뒤집어져 있기에 글라스 씨와 함께 일으켜주고 온 참이죠.”
“그래서였냐. 글라스, 네 옷에 거미줄 붙어있다.”
“으헉!”
카이엔의 말에 글라스가 놀라서 자신의 옷을 확인했다.
페이리는 아라크네라서 그녀가 쓰는 거미줄은 일반적인 작은 거미들이 만드는 거미줄보다 질긴데다가 그 길이가 길고 두꺼웠다. 글라스가 쩔쩔매면서 옷에서 떼어낸 거미줄을 바닥의 잔디에 붙이는 것을 보며 카이엔이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일인건데?”
“페이리 씨의 말로는 자네인 님이 갑자기 검을 들고 프라우디에 님에게 다가갔다는군요. 꼭 찌를 것만 같아서 바로 덤벼들었답니다.”
“자네인은 도망쳤고?”
“네. 갑자기 괴력을 발휘해서 페이리 씨를 밀어 넘어뜨리고 도주했습니다. 페이리 씨가 릴리시아 씨를 불렀기에 릴리시아 씨가 제압하려다가 당한거고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제대로 다 말한 거 맞지?”
“오늘 일어난 일이라면야.”
“…뭘 더 알고 있는 거야?”
“여기서 할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방에 가서 하자는 말이었다.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재미없는 보고서를 읽지 않아도 되는 건 환영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정말 싫었다.
마침 하인들이 부엌에서 생고기를 가져왔다. 카이엔은 바구니에 담긴 고깃덩어리 하나를 집어들어 릴리시아에게 건넸다.
“이거 먹어. 많이 먹어야 촉수도 금방 낫지.”
- 응…
“릴리시아. 고생했어. 너도 놀랐을 텐데 페이리가 부르니까 바로 도와주려고 했잖아. 그렇지?”
- 나, 도움 못 됐어.
“괜찮아. 넌 이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잖아. 그건 그렇고 페이리랑 언제 친해진 거야? 대단하네.”
- 그 거미, 자주 와서 말 걸었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진, 음, 모르지만 목소리는 이제 익숙해.
“그래. 둘이 친하게 지내. 페이리가 잘해줄 거야.”
릴리시아의 몸통을 쓰다듬으며 카이엔은 고깃덩어리를 내밀었다.
릴리시아는 멀쩡한 촉수로 고깃덩어리를 잡아서 저 위에 있는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두 번 정도 더 릴리시아에게 고기를 건네주고 카이엔은 땅바닥에 내려놓은 바구니를 가리켰다.
다 먹으라는 뜻이었다. 릴리시아는 알았다는 듯 촉수를 흔들었다. 이제 아프지 않은 모양이다.
릴리시아를 무사히 진정시킨 카이엔은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그가 릴리시아에게 밥을 줄 때부터 이미 갈 사람들은 다 갔기에 돌려보내는 건 쉬웠다.
바이스는 카이엔을 프라우디에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프라우디에의 곁에는 안전을 위해 페이리가 함께 있었는데 만나자마자 바이스는 자리를 옮기자고 선언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게 프라우디에의 연구실이라 그곳에 가기로 했다.
연구실은, 처음에 프라우디에의 초대로 들어가 구경했을 때보다 잡동사니가 많아졌고 좀 더 어질러져 있었다.
주거 공간으로 나눠놓은 곳의 소파에 이번 일에 관련된 모두가 둘러앉았다. 프라우디에는 물이라도 가져오려고 했지만 카이엔이 제지했다.
“일단 이야기부터 하자. 프라우디에 너도 많이 혼란스러운 것 같지만.”
“네…”
“자네인이 널 공격했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야?”
“아마, 도요…”
“직접본게 페이리 씨 뿐이니까요.”
“거짓말한 거 아니에요.”
“알아.”
페이리의 말에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리가 그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프라우디에 역시 믿는다며 페이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처음부터, 잔느는 그것 때문에 제 옆에 있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호위 기사라고 하면, 보통은 부모님이 정해서 붙여주잖아요. 백작님께서 잔느를 제 곁에 두게 하실 땐 인연이 닿아서 과분한 분께 도움을 받게 되어 온거니 잘 지내라고 하셨고요.”
“에빌처럼 자기가 좋아서 붙은 경우도 있지. 그런데 에빌 그 녀석은 어디서 뭘 하길래 안 온 거야?”
“아까 마주쳤습니다만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돌려보냈습니다.”
“너 진짜…”
“하지만 도움이 안 될 텐데요. 지금 상황에선 말입니다.”
너무도 당당한 바이스의 태도에 카이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에빌이 아니라 자네인이었기에 카이엔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자네인이 널 공격하려고 한 건지, 그 이유는 알겠어?”
“모르겠어요. 저희는, 정말 잘 지냈거든요.”
“자네인 님의 개인적인 행동은 아닐 겁니다. 이전에 제가 이런 걸 발견했거든요.”
바이스는 재킷의 주머니에서 이전에 획득한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카이엔과 프라우디에는 그것의 내용을 읽고 깜짝 놀랐다.
프라우디에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보고서형식의 편지였기에 프라우디에는 고개를 떨궜고 카이엔은 황당해하며 바이스에게 물었다.
“너 이런 걸 가지고 있었으면서 나한테 말 안 했던 거야?”
“쓸데없는 걱정을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너…”
“왕자님이 아셨으면 뭘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아무것도 못 하셨을 거면서.”
“끄응.”
“아무튼 자네인 님은 누군가에게 그런 보고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짐작가는 사람이 있나요?”
“아뇨…”
프라우디에는 고개를 저었다.
울적한 얼굴. 동그란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 그들에게 페이리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데 자네인 씨, 아마 원해서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제가 달려들어서 붙잡았을 때, 상당히 괴로워 보였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단 말인가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독스 백작…은 아니겠군요.”
“왜 그렇게 생각해?”
“겨우 독스 백작 따위를 두려워해서 자네인 님이 명령에 따랐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일단 밤이 늦었으니 자고 일어나서 내일 아침에 추적을 개시하죠.”
“추적요?”
“네. 일단 붙잡아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어야겠습니다.”
“일이 커지는데…”
“가만히 뒀다가 더 커지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일리가 있어서 카이엔도 바이스의 그 말에 동의했다.
자네인이 쓰던 방에서 이불이라도 꺼내와 사트로누스와 라스에게 냄새를 맡게 해 추적하면 탐색은 보다 수월해질지도 몰랐다.
프라우디에를 혼자 둘 수가 없었기에 카이엔은 오늘 하루는 프라우디에를 그의 방에서 재우기로 했다.
페이리는 뒤로 넘어지면 혼자서 몸을 못 일으키고 그렇다고 바이스 옆에 붙여주는 건, 프라우디에에게 뜬 눈으로 밤을 새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였다.
가져온 여분의 이불과 베개로 카이엔의 방 소파에 프라우디에가 잘 곳을 마련해주고 바이스가 말했다.
“불편하시겠지만,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아녜요. 감사해요.”
“내일 아침에 깨우러 오겠습니다, 왕자님.”
“응. 너도 딴짓하느라 밤 새지말고 일찍 자.”
“전 허튼 짓은 안합니다만.”
“…일찍 자 그냥.”
꼭 한마디씩 더 붙인다니깐.
카이엔이 인상을 찌푸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이스는 미소를 짓고 잘 자라는 인사 뒤에 문을 닫고 나갔다.
아직 촛불을 끄지 않았기에 카이엔은 가만히 탁자 옆을 어슬렁거렸다. 프라우디에는 소파에 앉아있긴 했지만 아직 잘 준비는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일찍 잘까? 내일은 아침부터 움직여야할 테니까.”
“네. 죄송해요, 왕자님.”
“뭐가.”
“저 때문에…”
“네 잘못 아냐. 자네인의 잘못도 아닐 테고. 얼른 찾아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자.”
“네.”
작은 목소리로 프라우디에가 대답했고 카이엔은 촛불을 훅 불어서 껐다.
어두웠지만 대충 어디에 어떤 가구가 있는지는 알고있었기에 다치지 않고 침대에 가서 누울 수 있었다.
그가 눕자 그제야 라스가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무슨 일이었나요?
“아, 맞다. 너한테 말 안해줬지 참. 으음… 프라우디에한테는 말해도 돼?”
방이 워낙 조용해서 작게 말해도 다 들릴 게 뻔했다.
그래서 라스는 이렇게 말했다.
“네. 말하셔도 됩니다.”
“…에?”
소파 쪽에서 프라우디에가 낸 소리가 들렸다.
카이엔은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 사실 라스는 평범한 늑대가 아니라 늑대 인간이야. 지금은 늑대인 척 하고 있는거고.”
“그,그랬던 거예요?”
“진작 말해주지 못 해서 미안해. 나중에 때가 되면 밝히려고 했어.”
“아,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저한테 말해주셔도 되는 거예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어. 남작이랑 바이스랑 글라스… 아. 에빌은 모른다. 귀찮으니까 나중에 말해줘야지.”
그 말에 프라우디에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좀 풀렸다면 좋을 텐데. 카이엔은 침대에 누웠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내일은 일찍부터 움직일지 모르니까 얼른 자자. 라스 너도 데려갈 거야.”
“저도요?”
“응. 냄새로 추적할 게 있어서. 할 수 있어?”
“네. 후각은 좋습니다.”
“그럼 됐어.”
라스가 못해도 사트로누스에게 맡기면 그만이었다. 사트로누스가 얌전히 따라올진 모르겠지만 그가 위험한 곳에 간다고 하면 투덜대면서도 따라올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