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나무가 많은 곳에서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사실이다.
허나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비둘기 한 마리가 갑자기 크게 몸을 뒤틀더니 그 자리에서 뚝 하고 떨어졌다.
몸을 파르르 떠는 비둘기의 몸통 정중앙에 가느다란 비수가 박혀있었다.
그저 비둘기가 날아가는 것 뿐이었다.
비둘기든 까마귀든 참새든 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새였으므로 글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지만 바이스는 달랐다.
그는 품 속에서 비수를 꺼내더니 단숨에 비둘기를 명중시켜 추락시켰다.
그 실력에 글라스는 감탄했고 바이스는 수상한 점이 있었다면서 곧바로 비둘기를 향해 걸어갔다.
비둘기 다리에 묶여있는 작은 통을 열자 돌돌 말린 종이가 나왔다.
누군가 외부로 빼돌리는 편지. 그 안에는 최근 세자르 영지에 있었던 일이 낱낱히 적혀있었다.
카이엔의 동태와 라이오트 백작가 장남인 에빌이 호위 기사로 들어온 것, 독스 백작가 장남인 프라우디에가 이곳에서 연구실을 만들었고 식객으로 지내고 있다는 것, 정체불명의 외부인(글라스)이 시종 대리로서 들어온 것, 카이엔이 최근에 늑대를 기르게 되었다는 것.
그 안에 적힌 것은 오로지 카이엔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바이스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표정을 싹 바꾸어 그가 잡은 비둘기를 들어보이고는 글라스에게 웃으며 말했다.
“뜻밖의 수확이네요. 저녁상에 올릴까요?”
“아, 아뇨 그건 좀…”
“그럼 묻읍시다.”
삽질의 시간이었다.
땅을 팔 도구를 따로 챙겨오지 않아서 글라스는 손으로 파야 하나, 돌이라도 주워와야 하나 고민했는데 바이스는 아무거나 상관없다면서 품에서 날이 두꺼운 나이프를 꺼내더니 그걸로 땅을 팠다.
비둘기가 들어갈 정도로만 낸 구멍에 비둘기를 넣고 대충 파묻었다.
나이프야 날이 상해도 다시 구하면 그만이라면서, 그는 주변의 풀을 뜯어서 나이프에 묻은 흙을 닦아냈다.
“비둘기의 다리에 묶여있던 편지 내용,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물어보면, 대답해주시나요?”
“그럼요. 글라스 씨는 만약의 상황에 제가 왕자님의 곁에 없을 때를 대비해 미리 키워놓는 시종 대리인걸요.”
바이스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글라스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던지라 그 말이 나오자마자 글라스는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봤음에도 바이스는 아무렇지 않게 손에 묻은 흙을 털며 말했다.
“왕자님을 감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지 특정하는 건… 네. 크게 어렵진 않을 테죠. 페이리 씨도 은신 능력이 있고 글라스 씨도 박쥐로 변하면 몸의 크기가 줄어드니 감시에는 안성맞춤이니까요. 하지만, 왕자님이 바라지 않으십니다.”
“쓸데없는 피를 흘릴까 봐요?”
“아뇨. 그냥, 조용히 지내자면서요. 이 이야기를 전해드려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실 겁니다. 첩자가 있다는 걸 알아낼 정도의 능력이 있다는 게 수도의 국왕에게 전해진다면 분명 더한 것들이 찾아올 거라고 여기시니까요.”
불쌍한 왕자님.
바이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죠. 앞으로 수상한 날짐승이 있으면 주저없이 잡아야겠습니다. 엄한 새를 잡지 않게끔 주의해야겠지만요.”
“네.”
바이스의 예상대로였다.
카이엔은 바이스에게 자초지종을 전해듣고 편지까지 확인했지만 한숨만 푹 쉬었다.
보다 확실한 답을 얻기 위해 바이스가 물었다.
“첩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처리할까요?”
“…그냥 둬.”
“또 그렇게 말씀하시는 군요.”
“조용히 지내자.”
“알겠습니다.”
카이엔은, 조금 지쳐보였다.
도대체 얼마나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건지. 언제까지 그들은 그를 감시하고 경계하려는 건지.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으니 몰래 감시만 하고있는 모습이 꼴보기 싫었지만 맞서 싸울 수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숨이 붙어있기를 원했을 뿐이었는데.
이곳에서도 그는 자유롭지 못 했다.
카이엔은 첩자가 보낸 편지에 에빌이나 프라우디에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 두 사람에겐 첩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말해봤자 에빌은 불안해할 테고 프라우디에 역시 자기 몸 걱정보단 다른 이들을 염려할 테니까. 잘 지내고 있는 사람을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프라우디에는 굉장히 잘 지내고 있었다.
재료를 모아서 실험도 하고 있었는데, 남들이 흔히 생각하는 '연금술사의 실험실'답지 않았다.
무언가 폭발하는 일도 없고 유독가스가 발생되는 일도 없었다.
그저 식물의 생장을 보다 빠르게 하는 약을 만들어서 꽃을 금세 피우거나 작은 병 하나만으로도 큰 불을 끄게 만드는 물약, 개구리에게 뿌리니 개구리가 이 미터도 넘게 폴짝 뛰어오르게 만드는 이상한 물약 같은 걸 만들 뿐이었다.
바깥으로 나온 김에 본가에선 만들 수 없었던 여러가지 잡다한 물약 만들기에 도전하는 모양이었다.
자네인은 그런 프라우디에의 곁을 지켰지만 이따금씩 영주성의 기사들과 어울리곤 했다.
미인인데다 검술 실력까지 좋은 자네인은 기사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가 많았다.
대련하다가 져서 앙심을 품을 법도 한데 몇 번이고 심하게 깨지고 다치니 자네인이 그들보다 우위라는 걸 인정한 것이다.
쓸데없는 싸움이라도 일어났으면 바이스가 끼어들어서 크게 혼냈을 텐데. 카이엔은 남몰래 안도했다.
어렸을 때 바이스가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무서웠다.
비둘기 다리에 묶여있던 편지를 발견한 이후 바이스가 창 밖을 확인하는 횟수가 늘었다.
하늘을 나는 새들 모두를 감시할 거냐는 카이엔의 물음에 바이스는 어떻게 아셨냐며 빙긋 웃었다.
“어차피 난 매일 똑같은데, 보고할만한 일이 있나?”
“여전히 평범하다는 것도 누군가는 의심을 할 테니까요.”
“그 정도면 병 아니야?”
“높은 자리에서 손에 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런 식입니다.”
“하아…”
긴 한숨.
카이엔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몹시 지쳤다. 그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안절부절 못 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정말. 그들에게. 아무 관심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음에도.
그가 수십 번 단언해도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네가 잘 처리해줘.”
“네.”
바이스는 카이엔의 동의를 얻어냈다. 카이엔은 편지까지 바이스에게 돌려줬고 바이스는 그것을 가지고 세자르 남작을 찾아갔다.
남작 역시 카이엔처럼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군. 왕자님이 기껏 기운을 차리신다, 싶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
“왕자님은 저에게 알아서 잘 처리하라고 하셨습니다. 남작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네가 하는 게 제일 빠르겠지. 나도 부탁하네.”
“빠르고 안전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봐온 면이 있었기에 세자르 남작 역시 바이스에게 이번 일을 모두 맡겼다.
그날 밤, 바이스는 정원에서 글라스와 만났다. 글라스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채 땅 위의 길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왔다.
뱀파이어의 능력 중 하나인 비행이었다.
후드를 벗고 글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발견된 건 없어요. 으음, 새벽까지 기다리면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이쯤하고 들어갑시다. 꼭 야심한 시간에만 새를 보내는 건 아닐 테니까요.”
걸리면 좋고 안 걸리면 어쩔 수 없는거다, 라고 덧붙이며 바이스는 글라스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카이엔은 첩자를 알아내길 원치 않았기에 바이스는 최소한의 감시와 견제만을 하기로 했다. 편지를 빼돌리는 것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 아닌가?
새를 통해 전달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으면 첩자는 우편을 통해 정보를 전하려고 할 테고 우편은 새보다 느리다.
조바심이 생기면 눈에 띄는 행동을 할 테고 그런 녀석은 잡으면 된다. 누가 봐도 수상한 녀석을 붙잡지 않는 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니.
안타깝게도 그 뒤로 두 사람이 수상한 새를 발견하는 일은 없었다.
‘새’가 아닌 다른 생물을 발견했다.
날개가 달린 괴생명체가 영주성에서 나가는 것을 목격한 글라스가 잽싸게 날아가 그것을 잡아챘다.
그의 손에서 퍼득거리는 저항이 꽤 세서 글라스는 두 손으로 그것을 꽉 쥔 채 바이스에게 가져갔다.
“흠? 그건 뭐죠?”
“여기서 나가려는 것 같아서 잡아왔어요.”
“몬스터인가… 처음 보는 생물이네요. 왕자님에게 보여드리면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니…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리고 바이스는 나이프를 꺼내 정체불명의 몬스터의 몸에 붙어있던 작은 나무 통을 떼어냈다.
그 안에는 단단히 말려진 종이가 들어있었다. 그 내용을 확인한 바이스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적혀있는 내용은, 카이엔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카이엔의 이야기가 아니라 프라우디에의 이야기만이 적혀있었다.
몇 월 며칠, 어디서 무얼 했으며 어떤 실험을 하였고 누구를 만났는지.
그 날의 몸 상태는 어떠했으며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지.
마치 실험대상 근처에서 작성한 연구 보고서와 같은 내용이었다. 이런 걸 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자네인 님인가요.”
그 사람 밖에 없었다.
허나 자네인은 프라우디에의 호위로서 세자르까지 함께 왔다. 게다가 두 사람의 사이는 상당히 가까워보였는데.
자네인의 기록에는 그녀가 프라우디에의 곁에 있으면서 확인한 내용들이 모조리 적혀있었다. 게다가 마지막 줄에는 이런 문장마저 쓰여있었다.
「특이사항, 이상소견 없음.」
이건 마치 프라우디에에게 무언가 있기에, 그것을 경계하며 감시하는 것 같지 않은가.
바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 프라우디에는 유약하고 힘없는 소년에 불과했는데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기에 옆의 호위 기사가 이런식으로 몰래 프라우디에를 감시, 관찰한 기록을 외부로 전한다는 말인가.
독스 백작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프라우디에를 이곳으로 보냈을 거란 가설에 약간의 힘이 보태졌다.
“왕자님께는 알리지 않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글라스 씨도 왕자님껜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네. 위험한 일은 아니겠죠?”
“아닐 겁니다. 제 기우였으면 좋겠지만요.”
감시대상이 카이엔이 아닌 프라우디에라는 것만으로 바이스는 이번 일의 위험도를 대폭 낮추었다.
카이엔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보고가 낱낱히 적혀있었다면 바로 움직였을 테지만 바이스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자네인은 보고가 도중에 빼돌려진 것을 모르겠지만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도중에 편지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릴 거다. 그녀의 다음 보고를 노리기로 하고 바이스는 편지에 적힌 기록의 첫 날짜와 마지막 날짜를 확인했다.
앞으로 열흘 뒤, 다음 보고가 있을 것이다.
‘알아봐야 할 것은 더 있지만.’
이 정체불명의 몬스터.
몬스터를 편지 배달용으로 쓴다는 건 들어보지 못 한 일이다. 카이엔을 제외하고 몬스터와 말이 통하는 자가 있을 리도 없고 몬스터를 사육한다는 생각은 일반인들이 하기 어려웠다.
구하기도 힘든 녀석들을 사육하고 교육시켜서 쓸만하게 만든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연금술사들은 물약만 만드는 게 아니라 새로운 금속을 만들어내고 생물의 신체부위를 접합하는 식으로 변종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받는 사람에 대한 정보라곤 한 톨도 없는 편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바이스는 이것에 대해 조사하는게 몹시 귀찮아졌다.
카이엔에 대한 것도 아니니 그냥 내버려 둘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카이엔이 프라우디에와 자네인에겐 그래도 꽤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가만 두는 건 찜찜했다.
특히 자네인은 지금까지 굉장히 조용히 잘 지내온 사람이었다.
프라우디에의 옆에서 호위하고 보조하고, 가끔은 영주성의 기사들과 대련을 하던 기사.
프라우디에와도 상당히 친해보였는데 그런 사람이 이런 보고서를 몰래 바깥으로 보낼 이유가 있다는 건, 그들이 알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엉켜있어서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특이사항과 이상소견이 없다는건, 마치 언제라도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있다는 것처럼 해석되었다.
그 작은 초보 연금술사 소년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이건 내 편견일지도.’
마법사 개인이 굉장한 화력을 낼 수 있는 것처럼 연금술사 역시 준비만 잘 되어있다면 다수를 상대하는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그때 글라스가 앗, 하는 소리를 내며 손에 붙잡고 있던 몬스터를 내밀었다.
“바이스 씨, 이 녀석 죽은 것 같아요…”
“아아. 그런 것 같네요.”
“저 그렇게 세게 잡진 않았는데…”
어쩔 줄 몰라하며 글라스가 우왕좌왕했다.
그런 그를 안심시켜주려는 듯 바이스는 글라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상관없습니다. 적당한 곳에 묻어두고 가죠.”
“네에…”
“괜찮습니다. 누군가에게 붙잡히면 죽게 되게끔 마법이 걸려있던 걸지도 모르고요. 천천히 알아보면 그만입니다. 새도 우편도 아닌 이런 괴물을 연락용으로 쓸 정도면 다음에 이런 놈이 또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 열흘 뒤, 글라스 씨는 하늘을 중점적으로 감시해주십시오.”
“네.”
글라스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몬스터를 땅에 묻은 다음 두 사람은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자네인에게 묻는 것은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잡고 나서해도 늦지 않았다.
***
“…흠.”
창 밖을 내다보던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보고’가 빼돌려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말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다가 그는 뒤돌아섰다.
어차피 별 내용 없을 테니 누군가가 손에 넣는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으리라 판단했다.
오히려 연락수단으로 쓰고있는 것을 누군가가 잡았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그곳에는, 쫓겨난 왕자가 살고있다고 했는데.
그저 무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지 못 하는 건지 아무튼 숨만 쉬고 사는 왕자가.
아무 일 없다는 것은 좋지만 이 고요한 평화가 쭉 이어진다면 자네인을 계속 그곳에 둘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보고의 내용에 점점 자신의 생각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 소년의 곁에 있는 게 익숙해져서인 건지, 마음을 연 것인지.
‘물러진 거야.’
감시하라고 옆에 붙여서 보냈건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냐.
조만간 찾아가 봐야겠다며 그는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것만으로 커튼이 차르륵 닫혔다.
창밖을 통해 들어오던 달빛만이 유일한 빛이었던 방이 어둠에 잠겼고 그 안에서 유독 빛나는 것은, 파충류를 닮은 보랏빛의 눈동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