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11화 (12/219)

-11화

뱀파이어 글라스의 인간계 생활이 시작되었다.

본인의 입으로 말한 것처럼 햇볕 아래에서도 문제 없다는 듯 돌아다녔다.

놀라는 사람들에겐 그게 다 인간들이 뱀파이어에게 가진 편견이라고 일축했다.

그래도 일단 어둠에 속한 종족이기에 낮보다는 밤에 더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박쥐였을 때라면 모를까 인간의 모습을 릴리시아에게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어서 데리고 가니 릴리시아는 다른 사람들을 확인하던 것처럼 촉수로 글라스의 머리와 어깨를 몇 번 툭툭 쳐보더니 촉수를 거두었다.

”릴리시아, 새 식구야.”

- 응. 확인했어.

“주로 바이스랑 같이 다닐 거야. 혼자 다니는 일도 많겠지만.”

- 응.

정말 잘 알아들은 게 맞는걸까.

지금까지 릴리시아가 얼굴을 확인한 사람을 공격한 적은 없었지만 괜히 걱정이 되어서 카이엔은 몇 번이고 계속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싸우지 말고.”

- 안 싸워.

“으음… 그래.”

다섯 번은 더 당부한 뒤에야 카이엔은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자주 얼굴을 보는 영주성의 사람들에게는 글라스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렸는데 흡혈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어도 다들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넘어갔다.

이미 몬스터와 말이 통하는 왕자 옆에 있다보니 적응이 된 것이었다.

“말 안 통하는 집채만 한 만티코어가 어슬렁거려도 뭐, 이제 놀랍지도 않아요.”

“맞아요. 소금이는 좀… 밖에 돌아다니면 위험하지만요. 너무 작아서 밟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왕자님, 제발 소금이가 혼자 밖에 나오지 않게 혼 좀 내주세요.”

“페이리 씨도 처음엔 놀랐는데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고요. 그나저나 그때 데려온 박쥐가 이 사람이라고요? 와.”

그 담담한 반응에는 글라스도 살짝 놀란 모양이었다.

이종족인 그가 인간들 사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들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지, 그가 카이엔에게 말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들 대단하네요.”

“그런가.”

“왕자님도 굉장히 대단하신 분이시고요.”

“내가 왜?”

“그야, 지금까지 살면서 몬스터와 말이 통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거든요. 왕자님이 그들의 언어를 구사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해석이 되어서 양측에 전달된다는 뜻이잖아요. 그런 경우는 처음 봐요.”

“하긴 뱀파이어면 오래 살았겠네.”

“성에서 나온 적은 드물지만요.”

바이스가 글라스에게 시종으로서 해야할 일을 가르친다고 말했기에 카이엔의 뒤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다.

얼마 동안은 바이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가 뭘 하는지 보고 배우고 천천히 하나씩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고. 그 말에 카이엔은, 웬일로 바이스가 정상적인 말을 한 건가 싶었다.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글라스는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도 멀쩡했다. 안색이 조금 나빠보이는 것 말고는 별문제 없었다.

저 정도면 고위 뱀파이어가 인간들의 틈에 섞여서 살아가는데도 지장은 없을 정도로.

반면 식사량은 꽤 적었다. 게다가 피도 먹지 않던데, 저 정도의 식사량으로 버틸 수 있을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것에 대해 물어보자 글라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해주었다.

“인간과는 몸 구조 자체가 다르거든요. 아니… 구조라기보단 기능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래서 괜찮아요.”

“네가 괜찮다면 상관없지만,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네.”

카이엔의 활동 범위는 굉장히 좁은 편이었다.

멀리 나가봤자 마을 산책인지라 바이스는 그 점을 가장 먼저 글라스에게 알려주었다.

“왕자님이 눈에 안 보여도 어차피 가실만한 곳은 한정되어 있으니 괜찮습니다.”

“아, 네…”

‘그래도 이왕이면 옆에서 안 떨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

글라스가 카이엔을 찾아왔을 땐 카이엔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시종 대리의 이야기를 꺼냈던 바이스였지만, 따로 글라스를 만나서 면접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간단한 신상정보를 물어보고 뱀파이어인 글라스의 신체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대련 또한 제안했다.

다들 잠든 시간을 이용해서, 낮보다도 밤에 강한 뱀파이어가 자신이 가장 강한 힘을 쓸 수 있을 때 얼마나 유용한지 확인했다. 평가 결과, 평범한 인간인 에빌보단 나았다며 그가 말했다.

“제가 긴 시간 자리를 비우지는 않을 테니 부탁드리고 싶은 건 시간 끌기입니다.”

“네.”

“요즘은 암살자의 수도 꽤 적어졌지만 방심할 수는 없으니까요.”

“되게 복잡한 사정인 것 같아요.”

“네. 복잡하죠.”

바이스는 검집에 넣지 않은 검을 가볍게 허공에 휘둘렀다.

싸늘한 공기를 가른 날카로운 검날이 달빛에 은은한 빛을 흘렸다. 깊은 푸른색 눈동자가 좀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대련을 했기에 글라스는 바이스와 몇 걸음 떨어진 채로 그 모습을 응시했다.

카이엔을 신기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그였지만 가까이에서 보게 되니 시종인 바이스도 만만치 않게 독특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 적응은 금방 할 것 같으니 걱정은 덜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위험한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저와 당신의 일이지만요.”

웃으면서 바이스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엉망으로 패인 땅과 꺾인 나무, 망가진 덤불 등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건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한바탕 전투가 있었다, 라고 하기엔 피가 뿌려진 것도 없고. 당분간 왕자님이 이쪽은 얼씬도 못 하게 하고 낮에 삽질 좀 해야겠습니다.”

“어… 저희가 정리하나요?”

“아뇨. 다른 사람을 시켜야죠. 공사한다는 핑계 좀 대면 될겁니다.”

“그러면 왕자님도 다 아시지 않을까요?”

“모르시게 하면 되죠. 대수롭지 않게 넘기실 겁니다.”

자기 집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관심없이 넘긴다는 건가?

조금은 의아해진 글라스였지만 바이스가 이 저택에서 보낸 시간이 그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스를 따라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도 바이스도 소란과 사고를 염려해서 전력을 내보이진 않았지만 꽤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뒤뜰이 과연 카이엔의 눈에 띄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

바이스는 글라스에게 나흘간은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 카이엔의 옆을 지키고 보필하는지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닷새부턴 카이엔의 동의하에 약간의 부연 설명을 하면서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을 해줬다.

그리고,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카이엔은 바이스의 부탁을 허락한 것을 후회했다.

“자, 아침에 왕자님을 깨웠으니 일단 세숫물부터 건네면 됩니다. 이쪽의 다리가 가늘고 높이가 알맞은 탁자를 끌어와 침대 가까이에 두면 됩니다. 수건도 같이 두면 되고요. 그 다음은 옷입니다. 오늘 하루 왕자님이 걸칠 옷도 저희가 결정하면 되는 일이죠. 왕자님은 직접 선택하는 걸 귀찮아하시거든요.”

“어…네.”

“왕자님, 오늘은 이 색깔로 하겠습니다.”

“네 맘대로 해라.”

“저렇게 말씀하신다고 해서 이상한 조합으로 가져가면 화내시니 주의하세요.”

이러저러한 말이 많은 바이스에게 카이엔은 눈을 흘겼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시종 대리를 두려고 하나 했더니만. 글라스에게 손짓해서 옷장으로 오게 하더니 이제 두 사람은 함께 그의 옷장을 보고 있었다.

덩그러니 방치된 카이엔은 세수를 하느라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를 수건으로 문질렀다.

옷을 고르는 건지 만들어오는 건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고 있으니 그제야 바이스가 입을 옷을 가져왔다.

그러나, 설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잠옷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는 건데, 귀족은 자기 손으로는 단추 하나 안 잠급니다. 글라스 씨도 대충은 알고 계시겠죠?”

“네.”

“그런고로, 갈아입혀드리면 됩니다. 왕자님은 보통 셔츠를 벗으시면 왼쪽 팔부터 빼고 입으실 땐 오른쪽 팔부터 집어넣으시죠.”

“…네가 그쪽부터 들이미니까 그렇게 입는 거잖아.”

“저는 왕자님의 습관인줄 알았습니다만.”

말할 기운도 없어서 카이엔은 입을 다물었다.

누가 시종이고 누가 주인인지. 힐끗 옆을 보니 글라스도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박쥐 모습으로 이 저택에서 지냈을 때 바이스의 막무가내인 면도 일부 봤을 텐데 가까이에서 직접 보게되니 아무래도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다.

그런데 가만히 셔츠의 단추를 풀던 바이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카이엔을 빤히 쳐다보더니 물었다.

“왕자님, 살 찌셨습니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어제랑 오늘이 다르다고?”

“일주일 전과 비교했을 때 조금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이유없이 왕족의 신체에 접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렸을 땐 번쩍번쩍 잘도 들어올리더만.”

“그때랑 지금은 다르죠. 그땐 아무것도 모르는 애였지만 지금은 많이 크셨으니 제가 더 예를 갖춰야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나태해지신 것 같다고 느끼긴 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소금이에 필적할 정도로 동그래지실 겁니다.”

“너무 과한 거 아냐??”

“식단을 다시 짜고 일정을 조율하죠. 운동의 비중을 늘리겠습니다.”

카이엔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태도였다.

이런 일도 너무 익숙해서 카이엔은 한숨만 쉬었다.

뜬금없이 왜 살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바이스가 쪘다고 말했으니 아마 찐 거겠지.

마저 옷을 갈아입고 나서는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가야했다. 이미 준비된 아침 식사를 치우고 다시 만들 시간은 없기에 아침식사까진 정해진 일정대로 이루어졌다.

평소의 카이엔은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서 운동량이 턱없이 모자랐다.

바로 도서관이나 서재로 향했던 어제와는 달리 바이스는 카이엔을 마구간으로 안내했다. 승마를 하자는 뜻이었다.

어차피 영주성 내의 연습 경기장을 몇 바퀴 도는 것일 뿐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평범한 말이네요.”

“기대한거라도 있나요?”

“왕자님 곁에 별난 몬스터들이 많았으니까요.”

“더 늘어나면 안 돼. 특히 큰놈들은.“

식비가 늘 거라며 카이엔은 미간을 짚었다.

사트로누스와 릴리시아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마구간지기는 카이엔이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것을 보고 이미 말을 준비해서 꺼내놓았다. 고삐를 건네받고 카이엔은 말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몬스터 말은 알아들어도 동물의 말은 못 알아듣겠어. 하긴, 그 소리들이 다 들렸다면 엄청 시끄러웠을 거야.”

“왕자님은 어렸을 적엔 사트로누스를 타고 다니기도 하셨습니다. 주문 제작한 안장이며 등자도 있었고요.”

“와, 만티코어를요? 대단하셔요.”

“사트로누스가 얌전해서 그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자 카이엔은 창피한지 얼굴이 빨개졌다.

그땐 그가 말 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으니 사트로누스가 자기 등에 태워주겠다고 해서 몇 번 타고다닌걸, 남작이 위험하다면서 안장 같은 걸 챙겨준 탓에 장비를 갖추게 된 것 뿐이었다.

지금은 키가 많이 커서 사트로누스를 타고 다니는 건 조금 미안했다. 무거울 테니까.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카이엔은 그의 전용 말과는 사이가 꽤 좋아보였다.

푸르릉 소리를 내는 말과 교감하듯이 손인사를 나누고 그들은 이동했다. 고삐는 바이스에게 넘겨졌다.

도착해서는 카이엔만 말을 탄 채 아무도 없는 연습 경기장을 빙빙 돌게 되었다.

입구 근처에 서서 그 모습을 구경하면서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실은, 타실만한 몬스터를 구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도 남작님도요.”

“아…”

“그런데 구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유니콘 같은건 역시 전설에만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니콘을 선물해주고 싶었던 거구나.

하긴, 타고있으면 신성해보이긴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카이엔은 왕자고.

남작도 바이스도 카이엔을 아끼고 있으니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글라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바이스가 한 마디 덧붙였다.

“혹시 글라스 씨가 살던 곳에 괜찮은 몬스터 없던가요? 한 마리 잡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왕자님은 몬스터랑 말이 통하시잖아요. 그렇게 잡아왔다간 욕만 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지능은 떨어질 테니 훈련만 잘 시킨다면야, 괜찮을 것 같습니다.”

“더 욕하지 않을까요…”

“그럼 없애면 그만이죠.”

‘이 사람 무서워.’

저만치에서부터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어느새 한 바퀴를 다 돈 카이엔이 돌아오는 소리였다. 그런데 카이엔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두 사람의 옆을 지나갔다.

아마, 몇 바퀴를 더 돌고 오려는 모양이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승마보단 검술이 낫겠지만 이전에 다치신 적이 있으니 다시 시킬 엄두가 나질 않더군요. 그래서 여차하면 빨리 도망이라도 치시게끔, 차라리 승마가 나을 것 같아서 집중적으로 배우기로 했습니다.”

“많이 다치셨었나요?”

“목숨이 위험할 정돈 아니었지만 그래도, 날붙이와 좋은 추억이 있으신 분은 아니니까요.”

바이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평온한 삶을 살기위해 흘린 피가 상당히 많았다. 물론 적들의 피였다.

어린 왕자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살아있을 수 있기만을 바라게 되었을 정도로 잔인한 일들이 있었다.

“앞으로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해서 하는 일들이니까요. 아, 저기 또 오시는군요.”

“잘 타시네요.”

“거의 십 년 동안 했으면 잘 하셔야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