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역시나.
카이엔은 이마를 짚었다.
릴리시아의 환대는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쉬웠다.
익숙한 사람들이야 촉수로 몸을 단단히 잡아서 올렸다 내렸다 하는 걸 스릴 있다면서 재밌어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공포로 다가올 수 있었다.
카이엔은 충분히 릴리시아에 대해 설명을 했다.
야생의 검은 숲에서 어쩌다가 연이 닿게 되어서 이쪽으로 옮겨심어놓은 변종 알라우네인 릴리시아는 사람을 좋아하고 침입자를 막는 역할이라 새 식구가 들어오면 얼굴을 익히기 위해 촉수로 들어올렸다 내렸다가, 툭툭 쳐보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프라우디에도 자네인도 충분히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인사 후 두 사람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우욱…”
참고로, 릴리시아의 격한 환대에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낀 건 자네인 쪽이었다.
하늘 구경을 해본 적이 없었는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프라우디에는 학구열이 불타오른 건지 눈을 빛내면서 카이엔에게 열심히 릴리시아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왕자님! 그렇다면 릴리시아는, 여기 사람들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어.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는데. 그게 아니면 냄새로 구분할 테고. 난 얘한테 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어서. 말이 통하는 걸로 봐선 어딘가에 목소리를 내는 구조가 있는 모양이긴 한데 얘가 내는 소리는 너희한텐 안 들리잖아. 사트로누스는 으르렁대기라도 하는데.”
“그렇군요. 너무 높아서 잘 보이지 않는데 저쪽이 입인가요? 아까 들어올려졌을 때도 못 봤어요.”
“거기 입 맞고 너무 궁금해하지 마. 징그러우니까.”
“에? 왕자님은 보신 적 있으세요?”
“한번씩 봐. 먹이 던져주기도 하니까.”
“먹이로는 어떤 걸 먹나요?”
“소, 양, 돼지, 말, 염소같은 네발 짐승이나 가금류도 먹고 한번씩은 알도 먹여. 알의 경우엔 크기 자체가 작은 편이라 많이 주진 않지만. 고기 쪽이 영양분이 더 높고 릴리시아가 선호해.”
“인육은요?”
“검은 숲에서 지낼 땐 인간이나 몬스터를 잡아먹었지만 여기 와서 먹인 적은 없어. 먹이면 큰일이지.”
지난번에 바이스가 해치운 암살자를 릴리시아 쪽으로 던지는 바람에 그 시체를 릴리시아가 야식으로 냠냠 먹어버린 것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프라우디에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저 몸체를 유지하려면 식사도 많이 할 것 같다면서 웃었다.
강직해보이던 자네인보다 멀쩡한 프라우디에를 신기하게 여기며 카이엔이 물었다.
“넌 괜찮아?”
“네. 별로 안 무서웠어요.”
말미잘같은 몬스터에게 촉수가 나와서 팔을 붙잡고 들었다 놨다하면 아무리 설명을 들었다고 해도 무서웠을 텐데.
릴리시아의 행동은 어른들이 아이의 양쪽 겨드랑이 아래를 손으로 단단히 지탱하고 높이 올렸다가 내리는 것과 비슷했다. 어디서 보고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사람을 살피며 인식하고 내려놓는 거였다.
그 버릇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영주성을 들락거릴 땐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몬스터에게 둥기둥기 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영주성에 오는 것을 거절했으므로 불필요하게 접근하는 사람을 걸러낼 수 있다는 이점 또한 있었다.
페이리는 나중에 소개해주면 되고 소금이는… 방 밖에 나올 일이 거의 없으니 내버려두기로 하고 카이엔은 간단히 페이리에 대해서만 일러두었다.
반인반주의 아라크네라는 말에 프라우디에는 신기해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감정을 표현하진 않았다.
연구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다행이라며 카이엔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영주성에 머물게 된 두 사람이 가장 기본적인 신고식을 마치게 되었다.
프라우디에의 방 겸 연구실에는 기본적인 가구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프라우디에가 따로 가져온 가구며 연금술 도구들도 있었지만 연구실을 채우기엔 턱없이 모자른 듯 했다.
직접 구매하기도 하고 백작에게 부탁해서 구하기 어려운 몇 가지 물품은 천천히 들여오기로 했다면서 프라우디에는 세자르 남작에게 마차의 이동과 자신의 외출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남작은 조용했던 영주성이 좀 더 즐거워진 것 같다면서 미안해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카이엔과도 잘 지내주라고 덧붙였다.
물론 그 이야기가 전해지자 카이엔은 투덜거렸다.
“친하게 지내주라니, 괜한 말을.”
“죄, 죄송해요. 저같은 게 왕자님이랑 친해질 리가 없는데…”
“그게 아니라…!”
프라우디에가 울상이 되자 카이엔은 급하게 자신의 말을 수정해야 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자기도 이제 다 컸는데 남작이 아직도 자기를 여기 왔을 적인 여덟 살짜리 애 취급한다면서 갖가지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은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한 걸음 떨어져서 그 모습을 보던 에빌은 어색하게 웃었고 바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동생 달래는 형 같네.”
“왕자님은 연하를 대해보신 적이 없으시니까요.”
“하긴, 바이스 씨도 나이 많죠?”
“하하하.”
“윽, 죄송해요.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괜찮습니다. 에빌 씨가 경솔한 말을 내뱉어도 그게 고의가 아니란 것 정돈 알고있으니까요.”
프라우디에를 쳐다보는 바이스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에빌은 검증을 마쳤다. 그렇다면, 이 작은 꼬맹이는 어떨까?
연금술사라는 괴상하기 그지없는 직업을 가진 저 소년의 뒤를 캐 볼만한 이유가 생겼다. 더불어, 독스 백작이 어째서 아들을 이곳에 보냈는지에 대해서도.
그가 알기론 독스 백작은 오랫동안 자식이 생기지 않아서 힘들어 했다.
어렵게 생긴 게 저 아들이었으며 몇 년 후에 딸이 태어났다고 해도 첫 아이는 그만큼 극진히 아낄 텐데, 왜 이런 곳으로 보낸 거지?
단순히 카이엔과의 친분을 쌓기 위해서? 그건 아닐 터였다. 지금까지 독스 백작은 카이엔의 생일에도 축하 인사 편지 한 통, 선물 하나 보낸 적이 없었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고 카이엔은 뒤를 돌아보았다. 바이스는 카이엔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보였다.
저놈이 웃을 땐 항상 무슨 일을 꾸미고 있던데.
질색을 하며 카이엔은 프라우디에에게 바쁠테니 연구실로 돌아가 보라면서 얼른 내보냈다.
“너 또 뭘 하려고?”
“네? 제가 뭘 한다고 그러십니까?”
“얼굴이 기분 나빴어.”
“전 항상 이 얼굴입니다만. 평소에도 절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군요.”
“그건 아닌데…”
졸지에 할 말을 잃고만 카이엔의 패배였다.
주인을 무안하게 만들고도 싱글벙글인 시종을 보고 에빌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지난 10여년 동안 카이엔의 곁을 바이스가 지켰다던데, 그래서인지 둘 사이에 허물이 없었고 바이스가 카이엔을 막 대하는 면도 있었다.
입으론 왕자님이라고 부르면서 하는 행동을 보면 윗사람 취급은 해주되 날카로운 지적질과 핀잔, 비난등을 서슴지 않는 것이었다.
‘혹시… 이 사람 때문에 카이엔의 성격이…?’
그렇게 절대로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의문이 에빌의 마음 속에 싹텄다.
옆에서 에빌이 딴생각을 하는 것은 알고있음에도 그를 쥐잡 듯 잡지않고 바이스는 웃으면서 카이엔에게 말했다.
“왕자님께 해가 될 일은 아닙니다.”
“어… 그래. 그렇겠지.”
“진심입니다.”
“너 알아서 해.”
카이엔의 영혼 없는 동의도 받아냈기에, 더 이상 바이스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프라우디에는 챙겨온 짐을 정리하느라 바쁘니 숨어들 구석은 많다며 페이리에게 부탁했고 이번에도 페이리는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날 밤, 다락방을 빠져나온 거미여인은 몰래 타겟의 창문 아래까지 다가왔다.
겉보기엔 이상한 구석이 없었다. 짐 때문에 어수선한 방에서 침대에 파묻혀서 자고있어야 할 사람이 있어야…
‘에? 없네?’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았는데, 어디에 있는 거지?
의아해하며 페이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새벽에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싶었는데 방 안을 주시하고 있으니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어두운 방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프라우디에가 움직이고 있었다.
짐이 상당히 많아서 발이 어딘가에 걸려 넘어져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프라우디에는 한 번도 비틀거리지 않고 방 안을 돌아다녔다.
몽유병이라고 하기엔 이상해서 페이리는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프라우디에가 등잔에 불을 붙였고, 그 작은 아이는 등잔을 든 손을 창문으로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밖에 누군가가 계신거죠?”
“어…”
“누구신가요? 절 만나러 오신거예요?”
아, 들켰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페이리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두어 번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창문을 두드렸다.
“안녕? 같이 살게 된 사람이 왔다고 들어서.”
“아, 문 잠겨있어요.”
프라우디에는 창문으로 다가가 잠금을 풀었다.
창문을 열자 찬 밤공기와 함께 페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페이리라고 해요. 낮에 보면 더 무서울까봐 밤에 왔는데, 무섭진 않죠? 거미 몸통 안 보이죠?”
“네. 그치만 힘들지 않으세요? 힘드실 것 같은데…”
“괜찮아요. 여기 1층이잖아요.”
“아 맞다.”
실험을 하다가 폭발이 나기라도 한다면 난감해지고, 또 창고도 필요했기에 프라우디에는 1층의 방을 쓰고 지하 창고 또한 빌리기로 했다.
본가에 있었을 때와 헷갈렸다면서 프라우디에는 순진하게 웃었다. 그 순진한 얼굴에 페이리도 따라서 웃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짐도 많은 것 같은데.”
“음, 괜찮아요. 천천히 정리하고 있어요. 일부러 절 보러 오신 거예요?”
“이야기를 들어서요. 전 연금술사에 대해 전혀 모르거든요.”
“별 거 없어요. 약을 만들고 실험하는 사람인걸요.”
“약사와 비슷하나요?”
“약사는 먹는 약을 만들지만 연금술사는 별의별 것을 다 만드는 사람이에요.”
“아하.”
두 사람의 대화는 매끄럽게 이어졌다.
프라우디에는 페이리를 진심으로 반겼고 페이리는 양심에 좀 찔리긴 했지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프라우디에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밤이 너무 깊어지기 전에 문 잘 닫고 자라는 말을 끝으로 그녀는 창문에서 멀어졌다.
프라우디에와의 대화에서 알 수 있었던 점은, 그가 상당히 밤눈이 밝다는 것과 본가를 전혀 그리워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생활을 반긴다는 것이었다.
바이스는 호위기사인 자네인에 대해서는 따로 부탁하지 않았기에 페이리는 얌전히 다락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즉시, 바이스에게 관찰하려는 게 들켰으니 더이상 다가가지 못 하겠다고 말할 것이다.
한 번 들켰으니 두 번은 더 쉬울 테고, 무엇보다 호위 기사의 감이 바이스처럼 날카롭다면 그쪽에게 들켜 한밤의 난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르니까.
한밤중의 대화가 퍽 즐거웠던 모양인지 아침이 되어 카이엔을 만나게 되자 프라우디에는 밝은 표정으로 페이리를 만났다면서 말해주었다.
아라크네인 그녀가 굉장히 능숙하게 인간의 언어를 구사했으며, 사려깊고 상냥한 성품을 가졌다는 칭찬에 카이엔의 표정도 좋아졌다.
“제가 놀랄까봐 밤에 오셨다고 하셨어요. 그치만 저, 낮에 봐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다음에 만날 일이 있을거야. 페이리는 다락방에서 지내고 있거든.”
“다락방요?”
“응. 거기가 좋다나… 영감이 샘솟을 것 같다면서.”
“와, 예술가인 거예요?”
“나도 잘 몰라. 책은 많이 모으고 읽던데.”
“에헤헤. 다음에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넌 그렇게 늦게까지 안 자고 있던 거야?”
“갑자기 중요한 일이 떠올라서요. 그래도 금방 잤어요.”
“그래. 푹 자야 크지.”
그렇게 카이엔이 대수롭지 않게 한 마디 흘렸고, 그 말에 프라우디에의 표정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저… 키 안 커요…”
“응?”
“3년 전부터 하나도 안 컸어요….”
눈에 띄게 침울해진 표정과 축 늘어진 어깨.
순식간에 풀이 죽은 프라우디에를 보고 카이엔은 자신과 나이는 비슷하다고 들었지만 어린애 같은 친구를 달래느라 한참 동안 진땀을 빼야했다.
그렇게 프라우디에와는 대화도 나누고 산책도 하고 이따금씩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느 정도 교류하게 되었지만 기사인 자네인과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 했다.
자네인은 프라우디에에게 멀리 떨어지는 일 없이 항상 곁에 있긴 했지만 입을 여는 횟수가 터무니없이 적은 탓이었다.
무뚝뚝한 인상이라 목소리 듣기조차 어려웠는데 바이스는 침묵이 미덕이라며 에빌에게 눈치를 주었다. 자네인을 보고 배우라면서.
“노, 노력하겠습니다.”
“실력도 저쪽이 월등히 좋아보이는군요.”
“제가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왕자님 호위보단 훈련에 집중하셔야 겠습니다. 훈련 시간을 따로 빼드리도록 하죠.”
덕분에 에빌은 개인적인 수련 시간에 남작가의 기사단과 함께 하는 훈련이 추가되었다.
바이스가 그 이야기를 전하자 카이엔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해야 하면 하라고 해야지 어쩌겠어.”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이직하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해도 된다고 해주고.”
“네.”
“내가 한 말 그대로 전해야지, 이상한 사족 붙이지 마라.”
“물론이죠.”
“…에빌이 자기 쫓아내는 거 아니냐고 다리 붙잡고 매달릴 것 같은데. 내가 나중에 직접 말할게.”
“저를 못 믿으시는군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카이엔은 고개를 홱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