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에빌은 천성적으로 성격이 좋았다. 모르는 사람과도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냈고, 항상 밝은 표정은 여러 사람들에게 호감형으로 다가왔다.
적응 기간으로 준 일주일 동안 에빌은 착실하게 영주성의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고 내부 지리를 익혔으며 다른 하인들이 마을에 갈 때 같이 따라가며 길도 익혔다.
마을 사람들은 새로 온 기사님이란 말에 흥미를 가지면서 그에게 이것저것 알려줬다면서, 에빌이 즐겁게 이야기했다.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네.”
문제는 에빌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곳이 카이엔의 서재였고 카이엔은 지금 책을 읽고 있었다.
세자르 남작이 카이엔에게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며 건넨 몬스터 도감, 이 땅에서 자라는 작물의 종류와 수확에 관한 보고서, 지난번 토벌에 대한 보고서 등, 빼곡한 글씨가 새겨진 서류들이 든든하게 책상 위에 버티고 있었다.
고작 잡담이나 들으려고 에빌을 불러온 건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를 군말없이 다 들어준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낼만 해?”
“응. 다들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그런데?”
“넌 왜 성격이 그렇게 변했을까? 옛날엔 좀 더 잘 웃고 활발했던 꼬꼬마였는데- 우앗!”
-빡!
면전에 대고 자라더니만 인성 꼬여버렸다는 말을 하고 있는 소꿉친구다.
카이엔은 들고있던 책을 이용해 에빌의 머리통을 때렸다.
세게 친 건 아니었지만 에빌은 머리를 붙잡고 엉엉 우는 시늉을 했다.
“흐어어엉, 내 친구가! 자라면서 삐뚤어졌어! 예전엔 안 이랬는데!”
“너도 예전엔 좀 더 차분했던 것 같은데. 사람 놀리려 들지도 않았고.”
“그건 네 기억 속의 내가 미화되어서인 게 아닐까?”
“네가 미화될만한 것이 있던가?”
“너무해.”
‘내 친구가 바뀌었어’ 라면서 에빌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왕자와 호위 기사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행동들이었지만 두 사람 다 신경쓰지 않았고 옆에서 지켜보던 바이스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카이엔의 옛날 친구라면 카이엔이 험하게 대하는 것도 이해가 갔고 에빌도 말로만 충격받았다는 둥, 순수했던 어린시절을 떠올리라는 둥 우는 소리를 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들 앞에 보이기엔 약간 부끄러운 모양이긴 했지만 만티코어에게 목줄 채우고 거리 산책하는 카이엔에겐 이미 괴짜 이미지가 박혔으므로 호위 기사와 농담이나 주고받아도 다들 그러려니, 할 것이었다.
누가 욕한다면 몰래 없애버리면 그만이었고.
그런 생각을 하며 그가 웃으니 카이엔이 뚱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에빌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적응 됐으면 일 해. 할 일은 거의 없고 나 따라다니는 것 정도만 있겠지만.”
“응.”
“일정은 바이스가 알려줄 테니까 잘 숙지하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재미없는 일들 투성이일거야.”
“호위란 게 다 그렇지.”
“그리고 난 산책 나갈 때 아니면 영주성 밖으로도 잘 안 나가니까 위험한 일도 없을거야.”
“그건 다행이네. 네가 다칠 일이 없다는 건 말야.”
과거에 친구였기 때문일까. 카이엔은 에빌이 그에게 편하게 말하는 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다들 그에게 경어를 썼으니 한 명 정돈 예외로 둬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경어를 쓰라고 하면 또 무슨 놀림이 돌아올지도 모르고.
그리고 본격적으로 에빌이 호위 기사로서 카이엔의 옆을 지키게 되었다.
카이엔의 행동반경은 늘 제한적이었으며 항상 일정했기에 그를 호위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카이엔 역시 따라오는 사람이 한 명 늘어서 처음엔 어색했지만 곧 적응했다.
호위 기사가 호위 대상을 지키기 위해 따라다닌다기보단 친한 친구가 같이 다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에빌이 여기 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카이엔은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려야 할 일이 생겼다.
“손님이 오실 예정입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세자르 남작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연금술사인 독스 백작이 자신의 장남을 공부시키고자 세자르로 보내고 싶다고 요청했다면서, 남작은 천천히 설명을 해주었다.
검은 숲과의 경계를 지키고있는 지역은 꽤 많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용병들이 많이 몰리고 연구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세자르이기에 부탁하고 싶다는 편지가 왔다면서.
그 말에 카이엔은 턱을 괴고세라르 남작에게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아?”
“네. 독스 백작이 연금술을 공부하고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장남을 보낸다면서.”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어서 일겁니다. 아들의 경우엔, 음, 저도 들은 적이 없군요. 애지중지해서 몰래 키운 건지 그게 아니라면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여기까지 보낼 정도면 애정이 하나도 없는 거 아냐?”
시골인데.
그 말을 하며 카이엔은 허공에 휘적이던 포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세자르 남작에게 요청한 걸로 봐선 그쪽의 손님이 될 테니 그는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독스 백작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위험한 사람이다 싶으면 바이스가 처리하겠지.
연금술사란 말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영지에 도착했을 때 에빌에게 했던 것처럼 사트로누스와 릴리시아에게 적이 아니라고 인식만 시켜놓으면 무난히 해결 될 문제였다.
그 녀석도 생각이 있다면 감히 그가 기르는 몬스터에게 손을 대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카이엔이 그 이상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세자르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허가한다고 답장을 보내겠습니다.”
“어. 알아서 해.”
“백작이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아들은 왕자님과 나이가 비슷한 모양이더군요.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 난 친구 필요없는데.”
“에빌 군과는 잘 지내시지 않습니까.”
“그 녀석은 소꿉친구라서 그렇지.”
친구는 무슨.
투덜대는 카이엔이었지만 세자르 남작은 온화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카이엔의 동의하에, 독스 백작의 아들이 세자르 영지에 공부를 하러 오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바이스는 자신이 알고있는 정보를 줄줄 늘어놓았다.
“독스 백작의 인성은 제 맘에 들진 않습니다. 아들이 어떨 진 모르겠군요.”
“네 생각은 어때? 쫓아내는 거려나?”
“딸의 경우엔 몇 번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알고있는데 아들은 공개한 적이 없습니다. 병약하다, 라고 했다던데 확실히 연금술사라면 몸에 좋지 않은 약품들을 많이 접했을 테니 아이의 건강이 나쁠 수도 있겠죠.”
“으음. 그렇구나.”
그럼 공부는 핑계고 시골로 요양오는 건가?
그렇게 따지면 여기보다 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 널렸는데 왜 하필 여기인거람.
고민해봤자 달라지는 일은 없으므로 카이엔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집 떠나 먼 곳까지 공부하러 오는 백작가 아들이 정신 똑바로 박힌 인간임을 바라면서.
만약 그와 다투기라도 하게 된다면 얼마 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져버릴지도 모르니까.
새로운 손님은, 카이엔의 머릿속에서 남작과의 대화가 거의 잊혀질 때 쯤에야 세자르 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커다란 마차가 영주성 안으로 들어왔지만 호위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 병사들이며 기사들마저도 안전하게 여기 도착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짐을 내려주고 다시 돌아가버렸다.
카이엔은 남작과 함께 손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응접실로 향했는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있던 소년이 벌떡 일어나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독스 백작가의 장자, 프라우디에 독스라고 합니다.”
“…허?”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푹 숙여 인사하는 사람의 키는 너무나도 작았다.
나이가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카이엔이 황당해하며 남작을 바라보니 남작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남작은 연륜이 있었으므로 얼른 그 표정을 감추고 인사에 대답을 해주었다.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앉아서 이야기하죠.”
“네.”
그제야 고개를 든 소년의 뺨은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나서 카이엔은 다시 한 번 당황했다. 아들이라며? 그와 나이가 비슷하다면서 저 키며 얼굴은 뭐란 말인가.
잠시 굳어버린 그였지만 남작이 소파로 향하는 것을 보고 따라가서 그 옆에 앉았다.
방 안에는 나이에 비해 너무나도 어려보이는 소년 한 명과 그 뒤에서 소년을 지키려는 듯 서있는 기사 한 명 뿐이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남작이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세자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백작님께 편지로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공부를 하신다고 했죠.”
“네. 이곳의 시장이 제일 커서 연구 재료를 확보하기 쉬울 것이라고 하셨어요. 제 개인적인 공부도 있지만 백작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빠르게 확보해서 보내는 게 제 역할이예요.”
아버지를 백작이라고 부르는 거구나.
카이엔은 독스 백작이 꽤 엄격한 성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어리고 약해보이는 자식을 이렇게 위험한 곳까지 보내놓고 아버지라고도 못 부르게 하는 사람이니 냉정하고 정없는 성격임이 분명하다며 마음 속으로 고개를 수십 번 끄덕였다.
자신을 프라우디에 독스, 라고 소개한 소년은 긴장한 건지 남작과 카이엔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이곳에선 보기 드물 정도로 상당히 미소년인 프라우디에는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웃곤 카이엔에게 말을 걸었다.
“저… 왕자님.”
“왕자 아니다.”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프라우디에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고 카이엔 역시 당황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곤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거다. 솔직히 내가 왕자라고 불리기엔 지금 상황이 좀 많이, 별로니까.”
“네… 죄송해요.”
“사과할만한 건 아니고, 뭐 물어보고 싶은 거라도 있어?”
“네. 그… 왕자님께는, 민감한 사항일 테지만… 몬스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들어서요.”
“맞아.”
“호, 혹시 제가 연구실을 꾸려서 나중에 해부같은 걸 하게 되면… 아, 물론 마취는 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비명같은 게 들려버리면 어쩌나 조금 걱정이 되어서요…”
얼굴이 빨개져선 무서운 소리를 잘도 하고 있었다.
얘도 좀 이상한가?
카이엔은 그런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표정관리를 했다.
“괜찮지 않을까 하는데… 솔직히 나도 내가 데리고 있는 애들 말고는 교류하지도 않고 내가 무슨 전세상 몬스터를 다 아끼고 사랑하는 것도 아니니까. 연금술사는 해부도 하나?”
“필요하다면요. 일단 저는 많이 해봤거든요.”
“그것도 공부?”
“네. 여러가지 배웠어요.”
연금술사가 정확히 뭘 하는진 모르겠지만 이것 저것 약품을 섞어서 뭔가를 만들고 해부하고 성과를 내려는 일을 하는 자란 건 알았다.
독스 백작이 무엇을 원하고 아들을 여기까지 보낸 건진 모르겠지만 그가 돌보는 애들만 안 건드리면 상관없었다.
프라우디에는 잔뜩 긴장한 채 말을 더듬으면서도 이야기를 이끌어냈고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인상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 걱정은 이야기를 마치고 응접실에서 나왔을 때, 하인이 세자르 남작에게 조용히 전달한 사항을 듣고나서 더 커졌다.
“…시종은? 안 데려왔어?”
“아, 네. 저 혼자서도 잘 할 수 있고 연구실은 복잡할 거라서 다른 사람들을 들일 수가 없거든요.”
“그럼 호위랑 둘만 있는 건가?”
“네.”
호위인 여기사 역시 프라우디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프라우디에가 너무 작은 건지 그의 호위 기사가 큰 건지, 두 사람의 키 차이가 제법 심했다.
마치 누나 손을 잡은 남동생을 보는 것만 같았다.
독스 백작에게 답장을 보낸 뒤 세자르 남작이 프라우디에게 연구실로 내줄만 한 방을 미리 봐뒀던지라 짐들은 모두 그 방으로 옮겨졌다.
연구실 내부는 차차 프라우디에가 손보면서 필요한 물건을 채워넣기로 했다.
그의 호위로 따라온 사람이 이름은 자네인 마스퀘이어 라고 했는데 기사인 것은 맞지만 출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입에 담을만 한 일은 아니라고 여긴 모양이라 카이엔도 캐묻지 않았다.
“아, 맞다. 여기서 지내려면 얼굴 익혀둬야 하는 녀석들이 있어.”
“네?”
“따라와. 위험하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에빌은 짐작가는 것이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프라우디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카이엔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키도 작고 다리도 카이엔에 비하면 짧은지라 카이엔이 성큼성큼 걸으니 프라우디에는 반쯤 뛰다시피 그 뒤를 따라가야만 했다. 잠시 후 그걸 눈치챈 카이엔이 걷는 속도를 줄여서 프라우디에와 나란히 걸었다.
헤실헤실 웃으면서 아무 의심도 없이 자신을 따라오는 프라우디에를 보고 카이엔은 이 작은 녀석을 혼자 바깥으로 내보내면 안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어린아이한테 누가 사탕 사준다고 하면 절대 따라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시켜야하는 것처럼.
맨 처음으로 사트로누스에게 프라우디에와 호위인 자네인을 보여주니 낮잠을 자고있던 검보라색 변종 만티코어는 하품을 하면서 그르렁거렸다.
- 또 늘었군.
“어쩌다보니까.”
“그륵.”
- 난 웬만해선 사람 안 문다.
“어, 알아. 그래도 얼굴 정돈 봐둬.”
“으르릉-”
- 그래.
“자, 다음.”
“와, 털 색이 다른 만티코어랑은 다르네요? 크기도 좀 더 큰 것 같아요.”
“물진 않는데 가까이 가면 물지도 모르니까 멀리서 구경만 해.”
“네.”
다음은 릴리시아인데.
사트로누스는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새 얼굴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릴리시아는 달랐다.
호기심이 넘쳐서 새로운 사람을 보면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취미라서 프라우디에는 둘째치고 호위로 따라온 자네인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걱정이었다.
아무리 위험하지 않다고 해도 충분히 놀라서 검을 휘두를만한 일이니까. 에빌이야 바보처럼 소리만 지르다가 끝났지만 자네인은 에빌보다는 강할 테니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