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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3화 (4/219)

-3화

앞의 두 몬스터와의 만남으로 긴장된 상태였던 에빌은 페이리라는 너무나도 정상적인데다가 말까지 통하는 몬스터와 만난 후에 조금은 안정할 수 있었다.

물론 마지막 한 마리가 얼마나 대단한 녀석일지 몰라 걱정스런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표정은 카이엔의 방 안으로 들어와 그곳에서 한가롭게 털을 고르고 있던 소금이를 보고나선 여지없이 풀어졌다.

소금이는, 주먹쥔 손보다도 작고 새하얗고 검회색빛의 털이 섞인 귀여운 햄스터 몬스터였으니까.

“쟤도 몬스터?”

“응. 이름은 소금이.”

“귀, 귀엽네… 앞 녀석들이 너무 굉장해서 뭐라고 말 못 하겠다.”

“다들 그렇게 말해.”

사트로누스와 릴리시아는 무서워해도 소금이는 귀여워하고 페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한다.

페이리도 처음에 여기 왔을 땐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못 해서 곤욕스러웠던 적도 있지만 시간이 다 해결해주었다.

모르는 얼굴을 발견하자 소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찍.”

- 뭐야? 누구야?

“내 어렸을 적 친구.”

“찌이익.”

- 인사하러왔구만! 난 소금이다!

“소금이가 반갑대.”

“와, 진짜? 나도 반가워 소금아!”

“소금아, 얘도 반갑다고 한다.”

“찟, 찌익.”

- 오냐. 앞으로 잘 지내자.

소금이가 뭐라고 했는지는 굳이 통역해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그의 곁에 있는 몬스터들을 모두 소개해주고 나서 카이엔은 에빌과 좀 더 자세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자리를 옮겨서, 소파에 마주보고 앉은 자리 중앙의 테이블에는 간단한 다과가 마련되었다.

바이스는 카이엔의 뒤에 곧은 자세로 서있었고 카이엔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어렸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는 얼굴을 보며 말을 꺼냈다.

“일단, 네가 여기 있고 싶다고 하니까 있게 하긴 할건데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너무해. 날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거야?”

“살다보면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게 되기 마련이니까.”

“네가 그런 말 하기냐…”

“호위로 널 쓰긴 할건데 네 실력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있지? 당분간은 너랑 바이스를 같이 데리고 다닐거야. 옆에서 잘 배워.”

“응.”

바이스는 카이엔의 시종이었다.

그런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배우라고 말했음에도 에빌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신분같은걸 별로 신경쓰지 않는 성격이란걸 알고있었지만 그 점은 여전하구나. 달라진 점이라곤 키가 더 커졌다는 것 정도 밖에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조금 걱정되는 건 바이스였다.

‘괴롭히지는 않겠지?’

힐끗 뒤를 돌아보니 눈이 마주친 녀석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더 불안해져서 카이엔이 말했다.

“싸우지 말고 잘 지내.”

“당연하죠.”

“정말이지?”

“물론입니다.”

그 대답에 어쩐지 더 불안해졌다.

***

카이엔의 생일에 도착할 것이라는건 에빌도 예상하지 못 했던 결과였다.

본인 말로는 좀 더 일찍 와서 같이 이야기도 더 하고 외출도 하고 싶었다는 모양인데, 오는 길에 시간이 걸려버렸다는 것이다.

집을 떠날 때부터 이미 어머니인 라이오트 백작의 사인이 담긴 허가서를 받아왔고 집주인인 세자르 남작의 허가까지 받은 그는 정식으로 카이엔의 호위 기사로서 영주성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애초에 카이엔의 곁을 지키는 건 어렸을 적부터 오직 바이스 한 명뿐이었으므로 남작은 옆에 서있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것에 굉장히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날 저녁, 카이엔의 생일 파티 겸 에빌을 축하하는 파티가 함께 열렸다.

에빌은 카이엔에게만 시선이 집중되길 원했지만 카이엔이 어딜 도망가냐며 끌어당겼다.

“내 소개보단 네 생일이 더 중요할 게 뻔하잖아.”

“할 때 한 번에 하는 게 낫지.”

파티는 카이엔의 요구대로 조촐하고 평범하게 열렸다.

다만 케이크만은 힘이 팍 들어갔는데 이 구성원으로는 며칠이 지나도 다 못 먹을 것 같은 삼단 케이크를 보고 카이엔은 할 말을 잃었다.

식당을 꾸며놓은 장식도 어쩐지 익숙한 게, 요며칠 산책하다가 봤던 하인들이 들고갔던 것들이었다.

“케이크가 왜 이렇게 커?”

결국 카이엔은 한 마디 했고 남작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왕자님께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파티 규모를 작게 하셔서 케이크를 키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휴우.”

만찬 후에는 카이엔의 요구대로 파티쉐가 직접 나와서 케이크를 잘랐다.

조금만, 이라는 그의 말이 무색하게 파티쉐는 층마다 맛이 다른 케이크를 한 조각씩 잘라 카이엔의 접시에 올렸다. 다행히 다 합쳐도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었기에 카이엔은 군말없이 케이크를 받았다.

이제 열아홉 살이구나.

카이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자들은 이 날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암살시도도 해가 지날수록 줄어들긴 했지만 혹시 모르지. 언제 또 목을 노리고 달려들지.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에빌이 안쓰러워졌다.

기사학교 졸업하자마자 첫 직장으로 삼은 게 이미 몰락한 왕족인 옛 친구의 곁을 지키는 것이었으니까. 실력은 둘째쳐도 녀석의 집안이나 성격을 생각하면 더 좋은 곳은 얼마든지 있었을텐데.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그의 뒤를 바이스와 에빌이 나란히 뒤따랐다.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카이엔이 시중 들 필요없이 돌아가라고 했기에 바이스는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히자 바이스는 바로 에빌을 돌아보며 말했다.

“에빌 씨도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호위는… 흠, 아침 식사 이후 9시 정도에 오시는 걸로 할까요?”

“네? 그렇게 늦게요?”

“왕자님은 식사 후엔 거의 산책을 하시곤 하니 그때까지 정원 입구에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니, 엇갈릴 수도 있으니 차라리 시간을 조금 당길까요? 피로가 쌓이셨을 테니 편의를 봐드리고 싶지만 생각해보니 언제부터 출근을 해도 좋을지 왕자님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 했습니다. 먼길 떠나온 친구분을 바로 다음 날부터 부려먹을 정도로 저희 왕자님 인성이 나쁜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하긴 그 말도 맞네요.”

“게다가 에빌 씨는 영주성의 지리도 잘 모르실 테고요. 차라리 일찍 아침식사를 하신 후에 방에서 대기해주십시오. 제가 내일 아침 왕자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말에 에빌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첫 인상은 조금 냉정하고 딱딱해보였는데 말하는걸 봐서는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묘하게, 낯이 익어서 조심스럽게 에빌이 물었다.

“그… 혹시 바이스 씨, 예전에 수도에서 지내셨나요? 어디서 뵌 것 같기도 해서요.”

“다른 분이랑 착각하신 것 같네요. 전 지방 귀족이거든요.”

“아아, 그럼 제 착각이 맞나봐요.”

“흠, 에빌 씨는 아무렇지도 않으신가요? 고작 왕자의 시종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까지 카이엔 옆에서 잘 돌봐주신 분인거잖아요. 저보다 백배 천배 나으신 분이죠. 아, 방 앞에서 계속 떠드는 것도 실례니까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길 잃어버리지 마시고요.”

“아하하… 네.”

오늘 막 도착한데다가 영주성 지리에도 어두운 사람이니, 그런 걱정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한 번 더 허리숙여 인사하고 복도를 걸어가는 에빌을 한참동안 지켜보다가 바이스도 걸음을 떼었다.

카이엔의 어렸을 적 친구라.

그정도면 조금은 믿어도 될 것 같았지만…

“페이리 씨.”

“네.”

그의 부름에 어둠 속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스르르, 어둠 속에서 거미의 몸통을 가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 손을 다소곳이 앞으로 모은 페이리가 바이스를 보며 물었다.

“감시는, 며칠 정도 하면 될까요?”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아니, 더 짧을 수도 있겠군요. 혹시라도 허튼 짓 하는게 있는지, 외부와의 비밀 연락을 취하는지. 그 정도만 봐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런 것도 오랜만이네요. 걱정하는 바이스 씨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이죠.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뻐요.”

열심히 하겠다며 페이리는 밝게 웃어보였다.

바이스의 옆을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금세 밤의 어둠에 가려졌다.

사삭이는 소리조차 내지않고 여섯 개의 다리가 빠르게 그림자에 녹아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바이스는 에빌에게 말했던 것을 카이엔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일단 일을 시키기로 했지만 에빌이 영주성에 적응할 기간을 주고 지리도 익힐 겸 호위로서 데리고 다니는건 며칠 뒤로 미루자는 말이었다. 일리가 있었기에 카이엔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그 생각을 못했네. 많이 피곤했을텐데.”

“왕자님을 만난게 많이 기뻤던 모양입니다.”

“그런가…”

카이엔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존재를 반기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트로누스야 그를 자식처럼 아끼고 있었고 다른 몬스터들도 그를 끔찍이 아꼈지만 인간들은 어떨지 잘 모르니까.

이곳 사람들은 더 이상 목줄을 달고 거리를 산책하는 사트로누스를 무서워하지 않고 이젠 오히려 명물 취급했고.

생일이 평상시와 별다르지 않았기에 그 다음 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이스가 생일선물을 보내온 자들의 목록과 선물을 모조리 돌려보냈다는 말을 전했지만 카이엔은 고개만 끄덕였다.

세자르 남작 역시 그를 통해서 선물을 보내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죄다 거절했다고 알려줬다.

솔직히, 카이엔은 그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걸까 싶었다. 그가 왕이 될거라고 생각한걸까? 정말로, 그가 성인이 되면 현 국왕인 그의 작은 아버지가 기꺼이 그에게 왕관을 넘겨줄 것이라고 생각하는걸까?

네 살배기 꼬맹이조차 믿지 못 할 그런 말을 믿는 자는 없을 터였다.

“난 왕 안 될건데.”

“네, 알고있습니다.”

“다른 놈들은 그걸 모르는걸까?”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싶어하는 걸지도 모르죠.”

“흠.”

“왕자님이 왕위를 원하신다면 저는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필요없어. 거기가면 얘네 못 키우잖아.”

사트로누스도 그렇고 릴리시아 또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옮겨올 때는 작았던 녀석한테 밥 잘 주고 물 잘 주고 기르다보니 어느새 대형 말미잘같이 변해버렸으니 원…

혀를 차며 카이엔은 걸음을 옮겼다.

매번 하는 산책이었다.

에빌에게는 일주일의 적응기간을 주기로 했기에 하인에게 전달하도록 해놨다. 호위 기사로서 무슨 일을 해야할지, 일정을 어떻게 짜줄지는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에빌은, 이 땅에 대해 충분히 알아야 했다.

미개발지역이자 거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검은 숲과 인간의 거주지를 갈라놓은 방벽을 지키고 있는 곳 중 하나인 세자르 영지에 대한 것과, 토벌 시기가 되면 곳곳에서 밀려오는 용병이며 장사꾼들로 성황을 이루는 마을,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몬스터 사냥과 전리품으로 횡행하는 시장 등등.

수도보다 훨씬 거칠고 위험한 땅에 대하여.

실제로 검은 숲에서 살던 페이리가 인간에게 호기심을 느껴 그 높은 방벽을 올라와 영주성에 오게 되었을 때 방벽의 안전 문제에 대해 거론된 적이 있었다.

아라크네라는 그녀의 특수한 종족 특성으로 인해 벽을 오를 수 있었다는 가능성이 아니었다면 분위기는 좀 더 흉흉해졌을 것이다.

그녀가 유순한 성격과 능숙하게 구사한 인간의 언어로 인해 그나마 덜 차별받고 인간들 속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건, 언젠가 말해줘야 하겠지만.

에빌도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왔겠지만 카이엔은 어린시절의, 가장 즐거웠던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가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했다.

그는 이미 많이 바뀌어버렸지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녀석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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