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몰랐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나를 혼자 두려고 하기에, 절대 떨어질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떠나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
“…뭐야?”
카이엔은 눈을 뜨자마자 반사적으로 짜증스런 말을 내뱉었다.
일어나자마자 보게 되는 게 담당 시종인 바이스의 얼굴인 건 평소와 같았다.
다만, 자다 깬 사람의 얼굴에 꽃다발을 들이미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카이엔은 이건 또 무슨 괴상한 꿈인가 싶었지만 꽃 향기가 나는 걸 보니 꿈은 아닌 건가, 싶어서 몸을 일으켰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바이스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꽃다발을 이불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탄신일이 30일 밖에 남지 않으셨군요.”
“생일이라고 해.”
게다가 한 달이나 남았잖아.
왜 꽃다발을 가져온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카이엔은 슬쩍 고개를 돌려 꽃의 수를 세었다.
…서른 송이의 장미였다.
한 달 남았다고 서른 송이인가? 그럼 하루 지나면 저기서 하나씩 없어지는 건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스는 태연히 세수나 하라면서 물이 든 대야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왕자님은 생일도 잊어버리실 테니까요.”
“…나이 하나 더 먹는 걸 상기시켜줘서 고맙다.”
“왕자님 정도면 아직 청춘이시죠. 한 살 더 먹어봐야 열아홉 아니십니까. 제 나이가 몇 인지는 알고 계시죠?”
“어… 스물여섯?”
“일곱입니다.”
“그랬나?”
“여섯 맞아요. 기억하고 계시다니, 놀랍네요.”
카이엔이 세수를 마치자 바이스는 곧바로 수건을 건넸다.
세숫물이 담긴 대야를 치운 후 이불을 완전히 걷어내고, 미리 골라놓은 옷을 입는 것을 도왔다. 그 다음은 머리손질이었다.
손질이라고 해봤자, 빗질하고 묶는 것 뿐이었지만 바이스는 혹시라도 빗질을 할 때 엉킨 머리가 걸릴까 봐 걱정하며 살살 머리를 빗어내렸다.
긴 검은색 머리카락이 등의 절반을 넘을 정도로 길어졌다. 긴 머리카락의 끝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많이 길었네.”
“그러게요. 그 이후로 자르지 않았으니까요.”
“자를까?”
“머리카락 대신 목이 잘리지 않으신다면야.”
“그럼 네가 해주든가.”
“전 여러모로 완벽하지만 미용사로서의 능력은 없습니다.”
단칼에 잘라내는 녀석의 표정을 보니 웃고있었다.
시시껄렁한 농담따먹기 수준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내일 모레 서른인 녀석이 가져온 서른 송이 장미를 힐끗 쳐다보고 카이엔이 말했다.
“대충 빗고 나가자. 늦겠다.”
“안 늦습니다.”
흩날리지 않게 리본 끈으로 묶은 머리카락에 그 이상 관심을 주지 않고 카이엔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의 뒤를 바이스가 따랐고 그들은 긴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갔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 이미 와있는 사람이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은 초로의 남성은 카이엔의 얼굴을 보고 온화하게 웃었다.
“오셨습니까, 왕자님.”
“왕자라고 부르지 마.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셈인지…”
“왕자님을 왕자님이라고 부르는 게 문제가 될 리 없지 않습니까. 하하, 표정이 별로시군요. 바이스 군이 정말 꽃이라도 갖다주셨나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잔뜩 사들고 가는 걸 봤습니다. 아마 내일은 스물아홉 송이를 주지 않을까 싶은데.”
“…정말이야?”
“들켰군요. 더 이상 놀랍지 않을 테니 그 계획은 파기하고 다른 계획을 세워야겠습니다.”
“왕자님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런 것일테죠.”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게 나이든 자의 현명함일까. 카이엔은 당황이 묻어나오는 눈으로 테이블에 앉아있는 중년을 바라보았다.
아이네스 세자르 남작은 카이엔의 시선에 말 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있던 카이엔은 바이스가 앉지 않아도 되냐고 물은 후에야 의자에 앉았다.
아침 식사를 하는 내내 두 사람 다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세자르 남작은 일찍 식사를 마쳐 천천히 차를 마셨고 카이엔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느리게 손을 움직였다. 카이엔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자 그제야 남작이 입을 열었다.
“올해 생일 파티는 어떻게 할까요?”
“조용히. 대충. 적당히.”
“알겠습니다.”
짧은 대답에도 남작은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 바이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물들은, 알아서 거르겠습니다.”
“그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그냥 돌려보내. 일 키우지 말고.”
“노력하겠습니다.”
노력만 하지 말고.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꾹 참고 카이엔은 복도를 걸었다.
카이엔 이디에우스.
가르간트 왕국의 전 왕세자. 지금은 별다른 작위도 없고 능력도 없는 왕족에 불과하다.
…라고 본인은 생각했다.
부모인 전 국왕부부가 사고를 당해 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여덞 살이었다.
그 어린 아이가 왕좌에 오를 수 없었기에 귀족들은 전 국왕의 동생에게 시선을 돌렸다.
카이엔의 작은 아버지인 그는 결혼은 했지만 자식이 없었기에, 카이엔이 성장한다면 기꺼이 왕관을 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와서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홀로 남게 된 어린 왕자.
단 하나뿐인 왕의 자식인지라 처음부터 왕세자로 불렸던 그는 이도 저도 아닌 처지가 되어버렸다.
결국 수도에 있는 왕성을 떠나 변두리에 있는 영지로 오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그 영지의 주인은 따로 있었고 세자르 남작은 그의 보호자 역할을 해주는 것에 불과했다.
아침 공기가 유난히 차게 느껴졌다.
저택에서 나와 정원으로 향하는 두 사람은 이윽고 풀밭 한가운데에 누워있는 검보라색 털의 짐승을 보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사자의 형태를 띈 변종 만티코어는 다가오는 발소리에 눈을 떴다. 그러고는, 자기는 자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이엔에게 다가갔다.
“그르르르-”
낮게 짖는 소리에 카이엔은 만티코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 그래. 좋은 아침.”
익숙하다는 듯 카이엔은 인사를 건넸다.
만티코어는 으르렁거리면서 그와 대화를 하듯 소리를 냈고 바이스는 한 걸음 떨어져서 그 둘을 지켜보았다.
남들에겐 카이엔은 그들이 개를 기르듯 만티코어를 기르고 그들이 개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듯이 만티코어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둘은 정말로 '대화'라는 것을 하고있었다.
“크릉.”
- 날이 춥다. 옷은?
“따뜻해. 걱정마.”
“으르르- 커흥.”
- 요즘 주변이 부쩍 시끄러운데, 무슨 일 없고?
“어… 한달 뒤가 내 생일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정확하진 않지만. 걱정 마, 별일 없을거야.”
“크허엉!”
- 못 보던 놈들이 오면 바로 처리하겠다.
“바이스한테 맡겨. 아님 릴리시아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한쪽 무릎을 굽히고 만티코어와 시선을 맞추면서 카이엔은 다정한 목소리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사트로누스, 라고 이름 붙인 검보라색 털의 변종 만티코어.
과거 연구와 실험을 위해 생포되어 왕성의 안까지 들어왔지만 탈출을 감행, 십수명의 사상자를 낸 괴물은 지금 자리를 잃고 쫓겨난 왕자의 곁에 있었다.
거대한 만티코어가 카이엔을 보호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것, 카이엔이 그 품에서 곤히 잠들어있던 것. 아침이 되어서 카이엔이 깨어나 기사들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을 적대하며 그를 지키고자 이를 드러냈던 것을 그곳에 있던 자들은 모두 목격했다.
사트로누스는 카이엔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으며 카이엔 역시 사트로누스만을 곁에 두려고 했다. 그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하며 움직이는 사트로누스를 보고 그들은 왕자가 몬스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트로누스와 한참동안 대화를 나눈 뒤에야 카이엔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주며 바이스는 카이엔의 옷에 붙은 사트로누스의 검보라색 털을 보고 살짝 인상을 썼다.
하나하나 떼어내려다가 결국 포기한 그는 조용히 옆에 서있는 카이엔에게 속삭였다.
“…털갈이 시기인 모양인데, 이참에 예쁘게 밀어버리는건 어떻습니까?”
“안 돼.”
“고양이보다 털이 많이 빠지니 원.”
“어쩔 수 없잖아.”
사트로누스도 털이 빠지고 싶어서 빠지는 것도 아닐테고.
오늘도 바이스 대신 사트로누스의 편을 들어주고 카이엔은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거대한 몸통을 가진 녹색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반질반질한걸 보니 누가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간 것 같았다.
톡톡.
손가락으로 몸통을 두드리며 카이엔이 말했다.
“릴리시아. 나 왔어.”
그가 목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반응이 돌아왔다.
3미터 정도 되는 높이의 몸통 맨 위에서 두 가닥 촉수가 뻗어나와 카이엔의 팔을 휘감고 인간들이 악수를 하듯이 흔들었다.
악수를 마친 다음 촉수는 얌전히 몸통으로 돌아갔고 카이엔은 그가 '릴리시아'라고 부른 몬스터의 몸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춥진 않고?”
- 응!
“식사는 어때?”
- 충분해. 모자르면, 신호,할게.
“그래. 넉넉하게 준비해놓을 테니까 언제든지 말해.”
- 그리고, 나, 모르는 사람, 봤었어.
“언제?”
- 어젯밤. 어어 그런데, 저쪽이, 처리. 나한테 집어던졌어.
“응?”
- 잘 먹었어.
“어….”
침입자가 있었던 모양인데 바이스가 잡아서 릴리시아에게 던진 모양이다.
릴리시아는 또 그걸 야식으로 받아먹은 모양이고.
카이엔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바이스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그의 시선을 외면하려 했다.
바이스는 릴리시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못 알아듣지만 대충 카이엔이 하는 말과 표정으로 인해 유추해낸 것이었다.
“바이스.”
“네.”
“릴리시아한테는 사람 주면 안 돼.”
“죄송합니다.”
- 인간 고기.
“안 돼.”
- 배, 많이 안 고프면, 안 먹어. 밤에, 그냥, 입 안에 들어오길래애…
릴리시아도 필사적으로 변명하고 있었다.
한숨을 푹 쉬며 카이엔은 릴리시아의 몸통에서 손을 떼었다.
고개를 들어 몸통 위를 쳐다보니 말미잘 촉수같은 것들이 흔들흔들거리고 있다.
“다음에 또 무슨 일 있으면 그땐 그냥 잡아둬.”
- 응…
풀이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릴리시아와도 인사를 나누고 카이엔은 정원을 한 바퀴 빙 돌고 나서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잠에서 깼을 때만 해도 조용했던 방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찌잇-!!”
- 오! 이제 왔나!
“어, 그래. 소금이 너도 안 자고 있었구나.”
“찍.”
- 눈이 떠져서 말이다. 밥 먹고 있었지.
카이엔에게 말을 건 것은 탁자 위에 있던 조그마한 햄스터였다.
물론, 겉보기엔 귀엽고 사랑스러운 햄스터였지만 몬스터였기에 그와 말이 통하는 것이었다.
알아서 어제 먹다 남긴 견과류로 아침을 먹고있는 소금이를 보며 카이엔이 말했다.
“더 챙겨놓을까?”
“찟찟.”
- 좀 더 있으면 좋지!
“바이스, 몇 가지 더 가져다줘.”
“네. 늘 먹던 걸로 주면 되겠죠.”
소금이의 경우엔 한쪽에 여러가지 씨앗을 두면 본인이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은 만큼 가져다 먹을 수 있으니, 씨앗통과 물통을 채워주기만 하면 되었다.
소금이가 요즘 푹 빠져있는 게 아몬드였고 제일 편식하는 게 귀리라는 걸 눈치챈 바이스가 카이엔에게 소곤거렸다.
“편식하지 말라고 해야겠습니다.”
“으응… 소금아, 편식하지 마. 귀리도 먹어야지.”
“찌이익!”
- 맛 없어!
“그래도 조금씩 먹어. 골고루 먹어야지.”
손끝으로 소금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카이엔은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얼마 없었다.
산책을 하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것 없었다. 남작이 그런 그를 걱정해서 여러가지 취미를 만들어주려고 노력했지만 카이엔은 모두 거절했다.
한때 검을 배우긴 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팔이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던 탓에 검술 교관이 해고됐고, 그 뒤로는 아무도 그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릴 수는 없었기에 결국 택한 것이 책과 공부였고 그의 공부는 예전부터 바이스가 봐주었다.
시종 겸 가정교사 겸 호위기사 노릇까지 같이 하고 있는 유능한 인재였던 것이다.
“찍! 찍!”
- 뭐해? 나랑 놀아줘.
“응? 심심해?”
“찌잇-”
- 어.
“놀아준다고 해도…”
산책이나 낚시놀이, 미로찾기 정도였다.
바깥 구경을 하고 싶어 하는 소금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자 소금이는 익숙하게 그의 손바닥 위에 올라갔다. 그러더니 쪼르르 움직여서 카이엔의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가자는 듯 손을 휘젓는 소금이를 보며 카이엔은 피식 웃었다.
“산책해야겠네.”
“어쩔 수 없군요.”
바이스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금이와 함께 산책을 나가는 것은 종종 있었던 일이었기에 가다가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작은 동물들을 귀여워하는 하인, 하녀들의 경우엔 카이엔의 어깨 위에 얌전히 앉아있는 소금이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작게 귀엽다는 말을 연발했다.
산책은 주로 저택의 정원을 걷거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었는데 밖에 나갈 준비는 하지 않았으므로 정원과 꽃밭만 좀 보다가 가기로 했다. 물론, 카이엔 혼자 정했다.
아침부터 저택의 사용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사이에서 혼자만 여유로운 것에 카이엔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렇구나.
벌써, 시간이 이만큼 흘렀구나.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는데. 살해당할 것만 같았는데.
그 후로도 벌써 10년을 더 살아온 것이다. 게다가 곁에는 사트로누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 왕자님!”
밝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호칭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왕자님'이었지만 카이엔은 짜증을 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갈색 머리를 곱게 하나로 땋아내린 여성이 활짝 웃었다.
그에게 다가오는 여성의 발소리는 너무나도 조용해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소금이랑 같이 산책하세요?”
“응. 놀아주라고 하길래.”
“여전히 귀엽네요, 소금이는.”
그렇게 말하며 갈색 머리카락의 여성, 페이리는 소금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소금이 역시 작은 손을 내밀어 페이리의 손가락과 악수를 하듯 잡았다.
그때 무언가를 발견한 카이엔이 말했다.
“다리에 뭐가 붙었는데?”
“네? 아~”
카이엔의 말에 페이리는 자신의 다리를 쳐다보고 붙어있던 거미줄을 떼어냈다. 민망한 듯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뭘 좀 연습하다가 그만…”
여섯 개의 다리 중에 고작 하나에만 붙어있던 걸로 봐선 실수로 어디서 묻힌 모양이다.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거미의 형태를 하고있는 아라크네인 페이리는 카이엔의 곁에 있는 '몬스터' 중에 유일하게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신체 구조 덕분도 있지만 스스로 인간에 대해 궁금해하며 언어를 배웠기에 취미도 독서와 일기 쓰는 것이었다.
그녀가 처음 저택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반인반주의 모습에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은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페이리와 인사를 나누고 수다를 떨었다.
얼굴이 붉어져서 페이리는 화제를 돌리기 위함인지 대뜸 바이스를 지목하며 말했다.
“바,바이스 씨! 그, 저번에 부탁드렸던 책! 잘못 온 것 같은데요!!”
“아, 그렇습니까? 자세히 알아봐야겠군요.”
“부탁드릴게요. 그럼 전 이만…”
급하게 여섯개의 다리를 움직이며 빠르게 자리를 뜨는 페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이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책이었길래?”
“전 요즘 페이리 씨가 해부학과 인체구조에 관심을 가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응?”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책을 잘못 사다준 것 같아요.”
“네가 잘못한 거면 알아서 잘 해결해줘.”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