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유독 다사다난하고 시끄러웠던 상반기가 지나고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늘 그렇듯 이슈는 또 다른 이슈들로 덮어지고 지난날의 것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갔다.
3개월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빨랐고, 그사이 정치, 경제, 사회, 연예 등 모든 분야에선 수많은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건 하준과 ENP 엔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대표님. 아직 위에서 세팅 중이라 인터뷰 시작 시간에 딱 맞춰서 오셔도 되는데요!”
차에서 내린 하준을 발견하곤 ‘푸른 연예의 밤’ 연출 PD 한상준이 피우던 담배 꽁초를 끄곤 곧장 인사를 건네왔다.
가볍게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하준이 옅게 웃어 보였다.
“생각보다 차가 안 막혀서 좀 일찍 도착했네요. 저도 워낙 오랜만에 오는 거라 혹시나 길을 헤매진 않을까 했는데.”
말을 내뱉곤 눈앞의 3층 건물을 바라보는 하준.
처음 이곳을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허름하고도 낡은 상태 그대로였다.
하준의 얘기에 한상준도 건물 위아래를 훑으며 감탄을 뱉어왔다.
“참, 저도 이렇게 직접 와서 보고는 정말 대단하단 생각밖엔 안 들더라고요. 이렇게 허름한 곳에서 시작했던 회사가 이젠 타임지 메인 표지에까지 실리게 됐으니 말입니다. 허허, 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서 앞으로도 없을 유일무이한 기록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하.”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이곳은 다름아닌 ENP 엔터의 옛 사무실 앞.
즉, 7년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하준이 가장 먼저 찾아온 장소임과 동시에, 팔도라는 간판을 달고 멤버들과 첫 시작을 함께한 곳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만큼 하준은 감회가 남다를 수밖엔 없었고, 그런 하준을 바라보며 한상준은 재차 감사 인사를 건네왔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대표님. 수많은 언론사와 방송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을 텐데 저희 TBC와 단독 인터뷰를 결정해 주셔서요. 소식 듣고는 국장님, 본부장님부터 해서 아주 예능국 전 직원이 한동안 떠들썩 했을 정도였습니다.”
“출국 전 한 번은 인터뷰 자릴 가졌어야 했는데 이왕이면 방송 쪽이 낫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물론 최 기자님의 간곡한 부탁이 있기도 했지만.”
하준의 얘기에 한상준이 멋쩍은 웃음을 띄어 보였다.
“하하, 이것 참. 윤섭이 형님이 대표님과 둘도 없는 사이라고 할 땐 하도 터무니 없는 소리라 귓등으로도 안 들었는데. 이렇게 그 형 도움을 받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하.”
의 해외 콘서트 투어 일정으로 인해 한동안 국내를 떠나 있어야 하는 하준.
그간 수많은 언론사와 방송사들의 인터뷰 요청이 있었지만 마땅히 시간을 낼 여력이 없었다.
의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회사 또한 눈부신 성장을 이루고 있었고 그곳의 수장이자 대표인 자신도 한 번쯤은 공식 인터뷰를 가져야만 했던 상황.
그런 와중에 최윤섭의 부탁 아닌 부탁이 있었고, 하준 또한 흔쾌히 수락을 한 것이었다.
건물 입구로 들어서 3층 계단을 오르며 한상준이 하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대표님 단독 인터뷰는 최초이다 보니까 저희도 질문지가 많이 뽑힐 수밖엔 없더라고요. ENP 소속 연기자들 관련, 의 향후 활동 내용, 그리고 ENP 엔터의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것들까지. 대표님 개인에 대한 질문은 최대한 줄이려고 했는데도 이게 참 워낙 흔한 기회가 아니다 보니 저희 입장도 좀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하.”
멋쩍게 웃어 보이는 한상준에게 하준도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고갤 주억 거렸다.
“일부러 뒤에 다른 일정은 안 잡았으니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이왕 하는 거 저도 성의 있게 임하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대표님!”
하준의 정체에 대해 아무도 모르던 1년 전 이맘.
김진성을 시작으로 팔도의 식구들을 하나씩 모아가던 그때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180도 달라진 현재의 상황이었다.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ENP엔터의 위상과 기업 가치, 그리고 를 포함한 초창기 멤버들의 지금의 처지들까지.
애초에 미래 예지라는 특별한 능력이 주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온전히 그것만으로 이 모든 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자신을 믿고 따라와준, 그리고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임해주었던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층에 다다라 삐걱거리는 입구 문을 열자 분주히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 스태프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한상준이 손뼉을 마주치며 스태프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 유하준 대표님 도착하셨으니 바로 인터뷰 들어갑시다! 조명 마무리 해주세요!”
* * *
“자! 푸른 연예의 밤, 오늘은 스튜디오가 아닌 아주 특별한 곳에 나와 있는데요! 특별한 장소만큼이나 아주, 아주 굉장히 모시기 힘든 분을 모셨습니다! 아마 이분을 방송에서 인터뷰 하는 건 저희가 국내 최초, 아니 전세계 최초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오늘의 스타 인터뷰, 바로 세계적인 스타메이커 ‘H’, 유하준 대표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유하준입니다.”
“와아, 제가 그동안 정말, 정말 많은 배우 분들을 모시고 인터뷰를 해왔는데요. 아까 대표님 실물을 보고는 그냥 한동안 넋을 놓고 있었던 것 같아요! 능력만 갖추신 게 아니라 비주얼까지 이건 너무 완벽한 유전자를 가지고 계신 거 아닌가요?”
“음,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오늘이 어버이날은 아니지만 좀 이따 인터뷰 끝나면 집에 전화 한 통 드려야겠네요. 이렇게 좋은 유전자 물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정말 꼭 그러셔야 할 것 같아요! 어머님께서도 여배우로 활동하셨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말 집안 자체가 엄청난 유전자를 가지고 계신 것 같아 너무, 너무 부럽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는 순조롭게 시작됐다.
본격적인 질문에 앞서 리포터가 촬영장 주변을 눈으로 훑는 시늉을 하며 하준에게 물었다.
“오늘 인터뷰 장소가 대표님이 ‘팔도’라는 간판을 달고 처음 국내에서 사업을 시작한 곳으로 알고 있는데요. 정말 여기가 그곳이 맞나요?”
“네, 맞습니다. 혹시나 해서 사무실을 그대로 놔뒀는데 이렇게 이곳에서 인터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와, 지금의 ENP 엔터를 생각하면 정말 전혀 믿기지가 않는 내부 풍경인데요. 처음 이곳에서 시작을 하신 게 얼마나 되신 거죠?”
“그렇지 않아도 오는 길에 세어봤더니 1년이 조금 지난 것 같더라고요. 처음 이곳에 와서 애들과 계약하고 곧바로 데뷔 준비를 해나갔으니까.”
리포터에게 답을 하는 동안 하준의 머릿속으로도 그때의 기억들이 스쳐 갔다.
김지혜와의 첫 만남 이후 멤버들이 있는 반지하방으로 찾아가 이준과 강아지의 이별을 막았던 일.
그리고 그들의 로드가 되어주겠다며 자신을 소개했던 일까지.
지난 1년 동안 한시도 쉴 새 없이 달려와서인지 여전히 생생히 남아 있는 그때의 기억들이었다.
하준의 얘기에 리포터가 감탄의 리액션을 짧게 내보이곤 곧바로 준비한 멘트를 꺼내왔다.
“그럼 대표님 입장에선 정말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제가 알기론 이곳 팔도 시절 계약한 분들이 바로 와 윤채경 씨라고 들었거든요! 최근 그분들의 행보가 그야말로 국내 연예계를 깜짝 놀라게 하고 있잖아요?”
리포터의 의도를 이해한 하준은 가볍게 미소 지었고, 리포터는 곧바로 말을 보태왔다.
“언론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윤채경 씨는 할리우드 영화 <아젠다>에 주연 배우로 캐스팅이 되어 곧 촬영에 들어가는 걸로 전해지고 있고, 는 모두가 알다시피 빌보드 글로벌 차트뿐 아니라 빌보드 200, 그리고 빌보드 핫 100까지 진입하는 놀라운 쾌거를 보여주고 있잖아요. 처음 그분들과 계약할 당시만 해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 못하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질문을 건네곤 리포터가 다음 차례를 위해 큐카드를 넘겼고, 하준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고갤 내저었다.
“아마 그럴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사실은 전혀 아닙니다. 이미 그때부터 전 먼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상태였으니까요.”
“……네?”
큐카드를 넘기던 리포터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하준의 답변에 눈동자를 키우며 고갤 들어 올렸다.
그러곤 자못 당황한 표정으로 하준에게 되물었다.
“먼 미래를 이미 다 알고 계셨다고요? 어떻게……?”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한텐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었거든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언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이미 그때부터 다 알고 있는 상태였죠.”
하준의 답변에 리포터뿐만 아니라 한상준을 포함한 주변 스태프들도 적잖이 당황한 반응들이었다.
농담이라고 하기엔 꽤나 진지해 보였고, 진담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황당한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주변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하준은 묘한 미소를 띄우며 리포터에게 물었다.
“제가 이곳에서 곧 일어날 일 하나를 말씀드려 볼까요?”
“……지, 지금요? 여기에서요?”
고갤 끄덕이곤 하준이 말했다.
“곧 엄청난 굉음이 들려올 거예요. 인명 피해는 없겠지만 물질적 손해는 피할 수 없을 것 같네요.”
“……그, 그게 무슨…….”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하준의 얘기들에 리포터는 촬영인 것도 잊은 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엇보다 지금 그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웃고자 농담을 던지는 건지 전혀 예측이 안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쾅!!!
“아악!!!”
하준이 얘길 꺼낸 지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정말 그의 말대로 촬영장 내로 엄청난 굉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리포터는 비명 소릴 내지르며 자릴 박차고 일어났고, 주변 스태프들 또한 반사적으로 액션들을 취해댔다.
그때, 조명 팀의 막내가 연신 몸을 숙이며 전 스태프들에게 죄송하단 말을 뱉어왔다.
“죄, 죄송합니다! 어제 다른 촬영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는 바람에…… 어, 얼른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레 들려온 굉음의 정체는 다름 아닌 조명 팀 막내가 들고 있던 조명 기기.
하준 방향으로 들고 있던 기기를 떨어 뜨리는 바람에 그대로 바닥에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이었다.
당연히 촬영은 잠시 중단됐고 리포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새도 없이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하준에게 물어왔다.
“아, 아니 대표님은 어떻게 알고 계셨던 거예요……?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정말 그,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신 건 아니죠……?”
리포터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하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요. 그게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알았을까요?”
“그, 그건…….”
리포터는 마치 공포 스릴러 영화 한편을 보고 나온 사람처럼 넋이 나가 있는 상태.
이대로 더 있다간 정말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아 하준은 표정을 바꾸곤 웃어 보였다.
“하하, 농담이에요. 아까 인터뷰 시작부터 계속 얼굴 조명 빛이 움직이길래 봤더니 졸고 계시더라고요. 분명 얼마 못 가 떨어뜨리겠다 싶어 해본 얘기였습니다.”
“아! 난 또! 하아…… 저 진짜 놀랬잖아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예지력을 다루는 영화를 보는 바람에 진짜 소름이 쫙 끼쳤다구요. 대표님 못됐어요, 정말!”
이제야 놀란 가슴이 조금은 진정이 되는지 리포터는 연신 숨을 내뱉어왔고, 그사이 한상준이 하준에게로 다가와 낮게 말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대표님. 바쁘신 분 모셔 놓고 이런 결례를 범하게 됐네요. 얼른 다시 세팅해서 인터뷰 재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전 괜찮으니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준비되면 말씀 주세요.”
온화한 미소를 건네곤 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발걸음을 옮겨 자신이 예전에 쓰던 대표 자리로 가 잠시 의자에 앉았다.
눈앞엔 자신의 옛 명패가 있었고 하준은 손을 뻗어 그것을 들어 올렸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던 미국이란 낯선 땅. 그리고, 그곳에서 갑자기 나타났던 미래 예지.
처음엔 영화 같은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거라 여겼지만, 8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난 지금, 하준은 그 모든 것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각각의 사건들은 결국 다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엔 자신의 모친 이정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의 대화 이후 지난 3개월간 그 미래 예지는 단 한 차례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었고.
“자, 곧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다들 준비해주세요!”
좋든 싫든 자신의 앞에 나타난 미래 예지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행해왔던 하준.
때론 사소했고, 때론 복잡했으며, 또 때론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도 있었다.
그렇게 8년이란 긴 시간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왔고, 그 끝엔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
모든 걸 다 이루었으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과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자신.
그렇기에 이제 다신 기댈 수 없는 그 능력임에도 하준은 조금의 아쉬움도 없었다.
“저, 대표님. 준비 다 됐는데 바로 인터뷰 진행하실까요?”
“네, 알겠습니다.”
촬영 재개를 알리는 한상준의 얘기에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들고 있던 명패를 원래의 자리로 내려놓곤 카메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잠시 뒤.
걸음을 멈춘 하준이 몸을 돌려 자신의 이름 세 글자가 적힌 명패를 바라보며 짧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동안 고마웠다. 모든 순간에 있어.’
『꿈꾸는 스타 메이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