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이틀 뒤, 서울 지방 법원에선 구명호의 결심 재판이 열렸다.
수용복 차림의 구명호를 중앙에 세운 뒤, 사건번호와 간단한 신상 확인 절차를 끝마치고선 재판장이 선고를 시작했다.
“이번 사건은 사회 전반에 큰 파장을 일으킬 정도로 그 죄질이 결코 가볍지 않은 사안입니다. 또한 피고의 사회적 위치를 감안했을 때 비록 범죄에 직접 가담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 그것을 묵인해 온 일이 이 사건 전체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재판장이 들고 있는 문서의 한 페이지를 넘기곤 다시 말을 이어갔다.
“단 오랜 시간 피고가 범죄 행위에 직접 가담한 점이 없다는 점, 비록 그것을 묵인하긴 했어도 수많은 증거들을 수집해 직접 검찰에 제출했다는 점, 그로 인해 수사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점은 충분히 참작할 만한 사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피고가 구속 상태로 수개월간 수감돼 있었다는 점, 또한 자신의 범죄 행위를 인정하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점, 피고의 선처를 바라는 수많은 탄원서들이 제출되었다는 점은 양형에 충분한 참작 사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재판장의 말이 끝나자 법정 안으론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중요한 건 바로 그가 이다음으로 이을 말들.
그 한 줄에 구명호의 미래가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재판장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구명호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고, 방청석의 사람들 또한 두 손 모아 간절한 얼굴들을 보이고 있는 상태.
잠시간의 침묵을 깨곤 재판장이 구명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주문. 피고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한다. 단, 이 판결의 확정일로부터 3년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재판장의 선고와 함께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그와 함께 재판장이 구명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번 사건의 죄질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꼭 인지하시고, 다시는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길 바랍니다.”
재판장의 말에 구명호의 두 뺨 위론 눈물이 흘렀다.
고개를 떨구곤 연신 감사하단 말만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재판장님.”
잠시 후, 법정 교도관들이 구명호를 데리고 별도의 문으로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방청석에서도 세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하준과 구세희,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그를 기다렸을 이정화였다.
* * *
“아이고,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너, 너 정말 정화가 맞는 게야?”
최 비서와 함께 구치소에서 평창동 자택으로 돌아온 구명호.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정화를 바라보며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같은 물음을 해오고 있었다.
구명호의 뺨 위로 흐르고 있는 눈물들을 닦으며 이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20년을 한결같이 옆을 지켜왔으면서 얼굴도 못 알아봐? 고생 많았어, 정말, 정말 고생많았어, 오빠.”
지금의 재회가 두 사람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울지 잘 알기에 하준과 구세희는 그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 뒤 거실로 자릴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네 사람의 대화가 시작됐다.
“하준이, 세희 정말 고생 많았다. 남은 생을 그곳에서 다 보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다 너희들 덕분이야.”
오늘의 판결에 두 사람이 얼마나 애썼을지를 알기에 구명호는 고마운 마음을 가장 먼저 표해왔다.
그러곤 하준에게 시선을 옮긴 뒤 낮게 덧붙였다.
“미안하다, 하준아. 너를 위해 시작했던 일이 결국 너한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것 같구나.”
구명호의 얘기에 하준은 옅게 미소를 띠곤 고갤 내저었다.
지난 20년간 그가 짊어졌을 짐들의 무게를 생각하면 지금의 말은 전혀 가당치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정화도 눈시울을 붉혔다.
“참 오빠도 미련한 사람이지.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을 어떻게든 숨 붙여보겠다고 20년이나 그러고 있었다니. 본인은 감옥에서 평생 살 생각까지 하면서…… 에휴, 이렇게 미련한 사람이 또 어디 있어, 정말.”
구세희가 이정화의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 이렇게 다 모일 수 있게 됐으니 다 잘된 거죠. 아줌마도 깨어나고 아빠도 이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앞으론 좋은 일들만 있을 거예요, 꼭.”
구세희의 얘기에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분위기를 상기시키기 위해 미소들을 띄워 보였다.
구명호가 집 내부를 훑으며 말했다.
“하준이 너도 이제 집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냐. 엄마도 세희도 다 여기에 들어와 있으니 너만 들어와 살면 될 것 같은데.”
“고민 중이에요. 저까지 들어와 살면 너무 북적대지 않을까 싶어서.”
“허허, 녀석도. 그 맛에 다 같이 사는 거지.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사람들인데 이젠 좀 시끌시끌하고 북적북적대며 살아도 되지 않겠어?”
하준을 보며 웃어 보이던 구명호가 갑자기 뭔가 이상함을 느끼곤 표정을 달리했다.
“근데, 하준이 너 어디가 안 좋은 게야? 아까부터 몸이 좀 불편해 보이는 것 같은데.”
하준이 홍콩에서 겪었던 사고들에 대해선 구명호와 이정화 둘 모두에게 알리지 않았기에 전혀 모르고 있을 터.
구세희가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곤 하준을 대신해 입을 열어왔다.
“아, 그게. 이번에 시상식 때문에 홍콩에 갔다가 사고가 있었어요. 아직 완전히 나은 상태는 아니라.”
“사고? 무슨 사고? 큰 사고였던 게야?”
이미 국내의 모든 언론들이 떠들썩하게 보도했던 내용이라 더 숨기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곤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인 구세희는 곧이어 구명호와 이정화에게 홍콩에서의 일들을 차분히 털어놓았다.
잠시 뒤, 눈동자를 키우며 구명호가 격앙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니, 그런 큰 사고를 당하고 수술까지 한 애를 아직 회복도 안 된 상태에서 데리고 온 게야? 당장 병원에 입원시킬 생각은 않고?”
얘기만 들어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던 하준의 사고 얘기에 구명호는 구세희를 다그쳤다.
그러자 하준이 구세희를 대신해 말했다.
“제가 그러자고 했어요. 아저씨 재판도 있고 저도 여기서 쉬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서. 오랜만에 엄마가 해주는 집밥도 먹고 싶었고요.”
모친을 힐긋해 보이며 하준이 옅게 웃어 보이자 이정화도 낮게 고갤 주억거렸다.
무척이나 격한 반응을 보여오는 구명호와는 달리 이정화는 하준의 사고 소식에도 꽤나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런 이정화를 구세희는 다소 의아하게 쳐다봤고, 이정화는 하준의 몸 상태를 훑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니 다행이다. 기사마다 워낙 호들갑들을 떠는 바람에 생각보다 더 심각한 건 아닐까 했는데.”
기사라는 말에 구세희는 그제야 ‘아’ 하고 납득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부친과는 달리 이정화는 이미 기사로 하준의 사고 소식을 접했던 모양이었다.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하준을 바라보던 구명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다들 배고플 텐데 밥부터 먹으면서 더 얘길 나누자구나. 그간 밀렸던 얘길 다 나누려면 우선 체력부터 충전해야 하지 않겠어?”
“아빠, 어디 가게?”
“일단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야지. 그 안에서 안 좋았던 기운들부터 다 털어내려면.”
“그럼 같이 가요. 아빠 기력도 많이 떨어졌을 텐데 내가 부축해 줄게.”
“그래, 그러자구나.”
구세희가 구명호를 부축하며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겨나갔고, 이정화도 손을 걷어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우리 아들이 집밥을 먹고 싶다고 했으니까 어디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볼까?”
눈썹을 들썩거리며 웃어 보이는 이정화에게 하준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요리하는 법 다 까먹은 건 아니죠? 지금이라도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밖에 나가서 먹는 게 더 좋은 선택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머? 얘가 엄마를 뭘로 보고! 요리는 타고나는 거야. 타고난 상태에서 몸으로 익힌 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절대 잊히지 않는 법이라고. 엄마가 제대로 몸보신시 켜줄 테니까 딱 기대하고 있어, 아들.”
두 팔을 걷어붙이며 호기롭게 주방으로 향하는 모친의 모습에 하준도 웃음을 지으며 따라나섰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하나씩 꺼내는 동안 하준은 머신 기계에서 커피를 내렸고, 잔이 채워지는 동안 휴대폰에 쌓인 문자들을 확인해 갔다.
그때, 이정화가 대뜸 질문을 건네왔다.
“그나저나 그 여자랑은 잘 정리하고 온 거야?”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하준은 다소 뜬금없는 그녀의 물음에 고갤 들어 쳐다봤다.
“누구랑 무슨 정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누구긴 누구야. 그날 세희랑 같이 있던 그 여자지. 그 여자가 너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거 아냐?”
모친의 얘기에 하준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모친이 언급한 그녀는 임조하 외엔 있을 수 없었지만, 모친이 임조하에 대해 알 수 있는 루트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사고에 대해 다루는 그 수많은 기사들 중에서도 임조하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기 때문에.
즉 당시 사고 현장에 임조하가 있었다는 것도,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했다는 것도, 모친 이정화는 절대 알려야 알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걸 엄마가 어떻게. 그건 기사로도 나온 적이 없는 얘기인데.”
심각한 어투로 물어오는 하준의 얘기에 이정화는 채소를 다듬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지는 법이니까. 이미 예견된 일은 막을 도리가 없더라고. 그게 바로 ‘운명’이라는 거겠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곤 싱크대로 옮겨가 손을 씻는 이정화.
그러곤 부엌칼과 도마를 집고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의식이 없는 그 시간 동안 엄마는 꿈속에서 단 한순간도 너를 놓친 적이 없었어. 네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게 늘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네 뒤를 따라갔던 것 같아.”
“…….”
“그러는 동안 때때론 네가 잘 되는 모습도, 또 때론 위험한 순간에 처하게 되는 상황들도 마주하게 됐었지. 의식을 되찾고 나서야 그 모든 것들이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는 걸 알 수 있게 됐었지만.”
처음 모친이 깨어나서 자신에게 전해왔던 이야기들.
그땐 그저 길고도 길었던 자신의 지나간 꿈들에 대한 것들을 들려주는 것뿐이라 여겼는데.
그러나 지금 모친의 말들은 결코 가볍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얘기들이었다.
어쩌면 긴 시간 자신의 앞에 나타난 미래 예지들이 모두 여기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에.
그런 하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 이정화가 지긋이 바라봤다.
그러곤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와 함께 차분한 어조를 꺼내왔다.
“이제부턴 오롯이 네 몫이야. 어떤 미래를 선택하고 만들어 나갈지, 그리고, 그 미래를 누구와 함께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