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같은 시각, VIP 병실에선 하준과 구세희가 나란히 앉아 시상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데뷔 3년차 그룹인 탑앤탑의 무대를 지켜보며 구세희가 놀란 반응을 보여왔다.
“와, 무대가 쟤네보다도 뒤쪽이야? 언제 인지도가 이렇게나 올랐대?”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TV 속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구세희의 모습에 하준이 실소를 지었다.
“이거 니네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시상식인데 사장이 무대 순서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야, 내가 이거 신경 쓸 겨를이 어딨었냐? 전체 총괄은 다 세련 언니한테 맡기고 난 아빠 일에만 매달려 있었지.”
베어 물고 남은 반쪽의 사과를 입에 쏙 집어넣고는 구세희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사장이 무대 순서까지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진 않거든?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쉴 새 없이 입을 오물거리면서도 곧바로 또 다음 사과를 집으려는 구세희에게 하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체 과일을 몇 개나 먹어대는 거야? 나 먹으라고 사다 준 거 하루 만에 다 거덜 나게 생겼네.”
“야! 그럼 난 여기서 뭐 쫄쫄 굶고만 있냐? 병원 밥은 네 거만 나오고 현지 음식은 입에 맞지도 않는데 그럼 어떡하라고. 이거라도 먹어야 네 병수발 들 힘이라도 생기는 거지!”
입을 옴뇸뇸거리며 구세희가 하준을 흘겨봤다.
“참나. 고맙단 말은 못할망정.”
어제 자신의 발언 이후 잠시간 어색했던 것과는 달리 다시 구세희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 하준도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옅게 웃어 보이며 잠시 구세희를 바라보던 하준이 다시 TV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때.
지이이잉-
지이이잉-
침대맡에 올려두었던 하준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일기 시작. 곧바로 구세희의 휴대폰도 동시에 울려오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응, 언니 왜.”
동시에 전화기를 들고선 상대방과의 통화를 이어가는 하준과 구세희.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똑같은 반응을 보여왔다.
“뭐? 무슨 기사가 났다고?”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하준과 구세희는 서로의 얼굴을 잠시 쳐다봤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각각 다른 사람임에도 그들이 건네온 얘기들은 다르지 않은 듯한 느낌.
잠시 뒤, 다소 심각해져 버린 얼굴로 두 사람이 맞은편 상대에게 말했다.
“일단 알겠어. 나도 바로 확인해 볼게.”
“어, 언니. 일단 링크 보내준 거 확인하고 내가 다시 연락 주거나 할게. 어.”
통화를 종료한 두 사람은 곧바로 휴대폰 액정화면을 만지며 뭔가를 확인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 속에 띄워진 내용들을 확인하고 일순 당황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아니, 이, 이게 무슨…… 갑자기 왜 이런 기사가.”
그래도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하준과는 달리 구세희는 당황을 넘어 황당하단 반응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미 각 포털사이트의 연예란을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는 해당 기사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그 속에 자신의 실명까지 거론됐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다 이게 무슨 얘기야……? 사람이 죽을 뻔한 사고를 가지고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세련이 보내온 링크 속 기사의 내용들은 다름 아닌 세계적인 스타 메이커 ‘H’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
홍콩의 한 외곽도로에서 덤프트럭에 치여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대형 사고와 더불어 큰 수술까지 받게 됐다는 것.
물론 내용 자체만 놓고 보면 팩트에 근거해 쓴 것이었지만, 기사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혀 다른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H’가 그 현장에 가게 된 경위, 그리고 그 2차선 좁은 도로에서 다가오는 덤프트럭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유명인의 교통사고를 다루는 일반적인 기사들과는 달리, ‘세기의 로맨스’란 단어까지 언급해 가며 온갖 어그로를 다 끌겠다는 작성자의 의도가 훤히 드러나는 내용들이었다.
문제는 그 속에 구세희의 신상 정보까지 가감 없이 전부 다 공개돼 있었다는 것.
그녀의 이름과 직업은 물론, 사고 당사자인 하준과의 관계까지.
구세희로선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기자들이 너 사고 난 걸 어떻게 알고 이렇게나 빨리 기사를 쓴 거야? 여기 병원에 있는 사람들도 네가 ‘H’라는 건 전혀 모르고 있는데.”
구세희의 얘기에 하준은 이미 상황파악을 끝마친 듯 담담한 어투로 답했다.
“현지에서 먼저 뜬 기사를 보고 퍼다 나른 것 같은데. 보니까 이미 몇 시간 전에 여기서 먼저 기사가 나갔었네.”
“여, 여기에서? 여기선 누가 그걸 쓴 건데? 기자들이라곤 아예 마주친 적도…….”
그 순간, 구세희의 머릿속으로 불쑥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고 현장에서 자신에게 하준의 명함을 건넸던 남자.
그의 정체에 대해선 이미 하준에게 들었던 터라 그가 이 사건의 시발점이라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 그럼 그 파파라치가…… 대체 왜 이런.”
좀처럼 휴대폰 액정화면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구세희는 잇따라 나온 어뷰징 기사들을 하나하나 훑어나갔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천만했던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각종 포털사이트를 점령하고 있는 기사들의 대부분은 자신과 하준의 러브스토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단순 사고에 대한 설명보단 그 편이 훨씬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엔 좋을 것이란 판단이었을 것.
입술을 질끈 깨물곤 구세희가 짧게 내뱉었다.
“하, 이러니까 기레기 소리를 듣는 거지. 조회수에 미쳐 가지고는.”
짙은 한숨을 내뱉는 구세희와는 달리 하준은 의외로 담담한 반응이었다.
포장과 과장, 그리고 살을 꽤나 많이 붙인 기사의 내용들이긴 했지만 자신이 구세희를 위해 그 사고 현장에 뛰어든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그때와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자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고.
휴대폰을 다시 침대 맡에 내려둔 채 하준이 구세희를 바라봤다.
“좀 있다 퇴원 수속이랑 비행기 예약 좀 해줘. 내일 바로 출국할 수 있게.”
“뭐? 퇴원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수술한 지 얼마 안 돼서 당분간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단 말 못 들었어? 얘가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안정이야 집에 가서 취해도 되는 거니까. 혼자 걸을 수 있을 정도는 되니까 그렇게 해줘.”
“아이참, 안 된다니까 그러네? 네가 무슨 접촉 사고라도 난 줄 알아? 너 자칫하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지도 모를 엄청난 사고를 당한 거라고. 완쾌하고도 후유증 때문에 바로 퇴원할지 말지 고민해야 할 상황에 수술한 지 며칠 됐다고 벌써 퇴원이야, 퇴원은. 절대 안 돼.”
완강한 구세희의 반응에도 하준은 침착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사흘 뒤에 아저씨 결심 날이잖아. 너나 나나 둘 다 여기에 있으면 아저씨는 누가 집으로 모셔. 그간 몸도 마음도 다 고생이셨을 텐데 우리가 편하게 모셔야지.”
사고에 대한 충격의 여파로 인해 잠시 잊고 있던 부친의 결심 기일.
정확한 건 당일이 돼봐야 아는 것이었지만 현재 분위기로썬 집행 유예가 유력한 상태였다.
그렇다는 건 그날 구치소에서 석방이 된다는 뜻이었고, 그럼 당연히 자신이 집으로 모셔야 하는 것이었다.
하준의 얘기에 구세희는 곤란한 표정과 함께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구세희를 바라보며 하준은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덧붙였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다 같이 모이는 자린데, 당연히 우리가 있어야지.”
* * *
다음 날 오전.
퇴원에 필요한 검사들을 끝마친 하준은 수속 후 호텔로 돌아왔다.
하준의 짐을 챙겨 로비로 내려온 구세희가 하준의 상태를 다시 한번 살피며 물었다.
“진짜 괜찮겠어? 너 비행기 기압 때문에 뼈 다시 부러지는 거 아냐?”
“내가 무슨 개복치도 아니고. 얼른 가자. 퇴원 수속 밟느라 좀 늦어서 간당간당 하겠다.”
“티켓이야 다시 끊으면 되는 거고. 무엇보다 지금은 네 몸이 제일 중요하니까 천천히 가자, 천천히. 알겠지?”
시종일관 조심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있는 구세희와 함께 하준은 로비 밖으로 빠져나왔다.
미리 예약해 둔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하준은 왼쪽 손목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호텔에서 공항까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지금 출발하면 수속까진 무리가 없을 듯싶었다.
평온한 표정과 함께 다시 시선을 앞으로 옮기곤 주변을 훑었다.
그런데, 그때.
“후우! 다행히 아직 출발 전이었네요? 늦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하준과 구세희의 앞으로 고급 스포츠카 한 대가 멈춰 서더니 곧이어 조수석 창문 사이로 임조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구세희가 하준에게 낮게 말을 전해왔다.
“내가 알려줬어. 가기 전에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서.”
“…….”
운전석에서 내린 임조하가 하준에게로 다가오며 싱긋 웃어 보였다.
“오해는 마요. 나 굉장히 쿨한 여자라 한번 맘 접으면 그걸로 딱 끝이니까. 오늘은 사과의 의미로 선물 하나 주려고 왔어요.”
사과라는 말에 하준이 임조하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사과를 받을 만한 일은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사고 자체도 임조하 때문에 벌어졌다곤 할 수 없는 거고.
임조하가 구세희를 짧게 힐긋하곤 말했다.
“두 사람이 그런 사이인 것도 모르고 하마터면 내가 큰 실수할 뻔했어요. 뭣보다, 그쪽이 그런 사고를 당한 것도 어떻게 보면 다 나 때문에 일어난 거기도 하고.”
임조하가 들고 있던 쪽지 하나를 하준에게 건넸다.
“이거 내 연락천데 두 사람 결혼 날짜 잡히면 꼭 연락 줘요. 아빠 도와줬던 일까지 해서 내가 제대로 보답할 테니까.”
임조하가 건넨 쪽지를 받곤 하준이 그녀의 뒤쪽에 서 있는 스포츠카를 바라봤다.
“제대로 보답하는 거라면 저 정도 사이즈는 되는 건가요?”
하준의 농담 섞인 말에 임조하가 입꼬리를 올리곤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머, 저런 거 좋아해요? 저것보다 훨씬 좋은 걸로 해줄랬는데. 뭐 원한다면 저걸로 퉁 쳐도 되고요.”
임조하의 얘기에 하준도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처음 그녀와 마주했던 날 갑작스레 나타난 미래 예지로 인해 그야말로 온통 혼란뿐이었는데.
대체 왜 그런 장면이 나타난 건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론 그녀로 인해 하준도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 어쩌면 하준이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게 더 맞는 걸지도.
하준의 미소에 임조하도 같은 표정으로 하준과 구세희를 번갈아 쳐다봤다.
“두 사람 결혼식 때 꼭 불러줘요. 내가 스케줄 다 빼서라도 비행기 타고 날아가서 꼭 두 사람한테 축가 불러줄 테니까. 이거 농담 아니고 진심이니까 꼭이에요, 꼭?”
가볍게 듣고 넘기지 말라는 듯 손가락까지 펴보이며 신신당부를 해오는 임조하.
그런데, 자신과 눈을 마주하며 말을 내뱉어오는 임조하의 얼굴 위로 홀로그램 하나가 떠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그와 동시에 지난번 그녀에게서 보았던 미래 예지의 장면이 나타나더니 그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And it’s a miracle, I’m in love with you.”
화창한 야외 풍경 속 싱그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임조하.
그녀 앞으론 하준 자신과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한 여자가 서 있었고, 곧이어 임조하가 꽃 한 송이를 들곤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꽃송이를 신부에게 건네고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노이즈로 가려져 있던 신부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따사로운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it’s a miracle, miracle, miracle. you’re my spring.”
그리고 지금껏 봐온 그 어떤 순간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하준은 이제야 모든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응? 왜 대답이 없지? 결혼식 초대 안 하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 가서 꼭 불러줄 거니까 안 부르면 알아서 해요. 알겠어요?”
미래의 장면들이 사라지고 자신을 향해 으름장을 놓는 임조하의 모습과 마주한 하준.
하준은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지긋이 바라보다 낮게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임조하 씨에게 가장 먼저 알릴 테니 그때 꼭 와주세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임조하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하준이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다 임조하 씨 덕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