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웰컴 투, 홍콩!
-와아아아아!!
다음 날 저녁. 아시아 전역에서 생중계되는 NTV 시상식이 막을 올렸다.
멤버들이 있는 대기실 TV 화면 속으론 오프닝을 알리는 화려한 퍼포먼스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의 환호성 또한 생생히 들려오고 있었다.
메이크업을 가장 먼저 끝마친 은호가 분주히 휴대폰 키패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액정 화면 치는 소리뿐 아니라 은호의 표정 또한 꽤나 비장해 보이는 상태.
그 모습에 멤버들이 힐긋거리며 물었다.
“형, 무슨 메시지를 그렇게 전투적으로 보내요? 그러다 액정 깨지겠다!”
“누군데? 집에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지?”
하늘이와 이준의 물음에 은호가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곤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일은 무슨. 대표님한테 보낸 거야. 지금쯤 병실에서 우리 무대만 계속 신경 쓰고 계실 텐데, 걱정 안 하시게끔 문자라도 드려야지.”
휴대폰을 테이블 위로 올려두곤 은호가 멤버들을 훑으며 고갤 내저었다.
“하여튼 팀 내에 이렇게 사려 깊은 사람이 나밖에 없어요, 나밖에. 대표님 병실에서 신경 쓰고 계실 거 뻔히 알면서 너흰 어떻게 문자 한 통 보낼 생각을 안 하냐? 쯔쯧.”
혀를 차며 고갤 세차게 내젓는 은호의 모습에 멤버들이 일제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호가 이준을 한번 흘깃해 보이곤 은호에게 말했다.
“형. 형 아까 화장실 갔을 때 우린 진작 다 대표님한테 연락드렸거든요? 다 같이 영상통화로? 형이야말로 지금 한참 뒷북 치고 있는 거라고요. 참나.”
강준이 곧바로 지호의 말을 이어받으며 자신의 휴대폰을 은호에게 내밀었다.
“보세요. 이렇게 대표님이 무대 잘하라고 문자까지 보내주셨는데. 아마 대표님은 형만 관심 없는 걸로 생각하고 계실걸요?”
“……허얼. 말도 안 돼. 니들 어떻게 나만 빼고.”
졸지에 자신만 이상하게 돼 버린 상황에 은호는 황급히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은호가 부리나케 휴대폰 키패드를 두드리는 동안 이준이 다소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시상식 끝나고 나서가 더 걱정이네. 대표님 퇴원하시려면 앞으로 몇 주는 더 여기에 계셔야 할 텐데.”
“우리가 옆에 같이 있어 드리면 되죠! 오늘 시상식 끝나자마자 잠옷 챙겨서 바로 대표님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전!”
지호의 얘기에 도시락을 정리하던 정진웅이 고갤 내저으며 끼어 들었다.
“그건 곤란해. 너희 이제 막 컴백한 상황이라 이후 스케줄도 풀로 차 있는 상태거든. 내일 아침 일찍 바로 다시 서울로 가봐야 돼.”
“네?! 그럼 대표님은요? 대표님 저렇게 입원해 계시는데 이 낯선 땅에 혼자 두고 저희끼리만 간다고요? 형! 그건 말도 안 돼요!”
이후의 스케줄을 알고 있던 이준과는 달리 멤버들은 당황과 절망이 담긴 얼굴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세련이 피식 웃어 보이며 말을 붙여왔다.
“하준이 옆엔 세희가 딱 붙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옆에서 밥도 먹여주고 세수도 시켜주고 머리도 감겨주고 다 할 텐데. 너네 대표님 퇴원할 때까지 세희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필 거니까 너흰 전혀 걱정할 거 없다구.”
“그럼 사장님은 다른 스케줄은 없으신 거예요? 계속 대표님 옆에서 지켜봐주실 수 있으신 거예요?”
“다른 스케줄이 있어도 이미 진작 다 취소했겠지. 걔한테 하준이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걘 늘 그랬어, 하준이가 항상 일 순위였거든.”
왠지 모르게 깊은 뜻이 내포돼 있는 듯한 세련의 얘기에 멤버들이 잠시 눈빛들을 주고받았다.
왠지 단순한 친구 사이만을 뜻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강준이 세련에게 물었다.
“아참. 그때 그 얘기 마저 해주시면 안 돼요? 저희 대표님이랑 사장님 어렸을 때 이야기. 그때 하다가 끊겼던 것 같은데.”
강준의 얘기에 다른 멤버들도 곧바로 떠올랐다는 듯 눈빛들을 빛내왔다.
“어, 맞아! 그때 그 얘기 마저 해주세요, 누나! 어디까지 하다 말았더라?”
“그, 그 대표님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다고 했었어요. 그…… 막 무슨 빅 이벤트도 하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일제히 달라붙는 멤버들의 시선에 세련도 기억이 떠오른 듯 코웃음을 쳤다.
“호호. 그래, 맞아 그때 그 얘기 하다 말았었지?”
“네! 얼른 해주세요, 누나!”
“으음. 그러니까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냐면 말이야…….”
마치 손자 앞에서 이솝 우화를 얘기하는 할머니처럼 세련의 주변으로 멤버들이 자릴 잡았고, 세련은 연신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시작해 나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세희를 괴롭히던 애들이 어느 순간 태도가 싹 바뀌어 버린 거야. 복도에서 마주쳐도 그냥 잠깐씩 못마땅한 시선 보내는 거 말곤 그냥 지나가 버리기도 하고. 뭐 시비를 걸어온다거나 그런 것도 전혀 없이 말이야.”
“잉, 갑자기요? 왜?”
“알고 보니까 하준이가 아주 어마어마한 폭탄 발언을 해버렸더라고? 세희랑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이미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으니까 더는 건드리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네에?! 겨, 결혼이요?!”
“그때면 고등학생 때 아니에요? 고등학생이 결혼을 한다고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전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입을 벌려왔다.
다시 생각해도 웃기다는 듯 세련이 ‘풉’ 하고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황당하지? 아마 다른 사람이 그런 얘길 했으면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무시해 버렸을 텐데, 그 얘길 한 사람이 하준이라서 다들 완전 충격 먹고 난리도 아니었나 보더라고. 크큭, 그때 하준이 이미지도 지금이랑 거의 다를 바 없었으니까. 절대 농담 같은 거 하고 그럴 성격이 아니었던 거지.”
“와…… 그럼 그 일진 누나들은 대표님 얘기에 충격받아서 그 뒤로 사장님한테 아예 관심을 끊어버렸던 거예요?”
“응, 대부분은 그랬는데 그래도 믿지 못하는 애들이 있긴 했었지. 워낙 그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긴 했으니까.”
세련의 얘기에 멤버들도 공감한다는 듯 낮게 고개들을 주억거려 왔다.
“근데 그렇게 믿지 못하고 있던 일부 애들도 결국 몇 달 뒤엔 그 말을 완전히 수긍할 수밖엔 없게 돼 버렸어. 하준이가 전교생이 다 있는 자리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이벤트를 해버렸으니까.”
“이벤트요? 이벤트라면 어떤……?”
호기심 가득한 멤버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세련이 짧게 네 단어를 내뱉었다.
“프로포즈.”
“프, 프로포즈요?! 대표님이 사장님한테?!”
“허얼…… 말도 안 돼.”
“어, 어디서요? 어디서 어떻게 하셨는데요?”
역시나 격한 반응을 보여오는 멤버들의 모습에 세련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평소 하준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 그 장면이 조금도 상상이 안 되고 있을 터.
더군다나 그때 하준의 나이와 학생이라는 신분을 고려하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기도 했으니.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는 듯 세련은 눈을 가늘게 떠보이곤 말을 이었다.
“그때가 아마 5월인가 그랬지? 무슨 행사 때문에 전교생이 강당에 다 모이는 자리였는데 그때 하준이가 상 받는다고 대표로 강단에 올라갔던 일이 있었거든.”
“와, 역시 대표님은 그때부터 대표를 맡으셨던 거구나. 무슨 상이였는데요?”
“글쎄. 그것까지는 나도 잘 기억이 안 나네? 워낙 타고난 머리가 있는 애라 그렇게 대표로 나가서 상 받는 일은 늘상 있는 일이었으니까.”
세련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곧바로 화제를 돌려왔다.
“암튼 보통은 상 받고 간단히 인사만 하고 내려가는데 그날은 갑자기 하준이가 마이크를 잡더라고? 그러고는 꼭 그 자리에서 해야 할 말이 있다며 잠깐만 얘기하고 내려가겠다는 거야.”
“와, 벌써부터 심장이 막 두근두근거려. 그래서요, 누나?”
“그래서는 뭐, 아까 얘기한 대로지. 그 사람 다 모여 있는 데서 걔가 갑자기 세희랑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단 얘길 하는 거야.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바로 결혼도 약속한 상태라 하고. 그러고 나서 완전 전교생이 다 뒤집어졌었지, 그때.”
“허얼…….”
지금의 하준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얘기들에 멤버들은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 강준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근데요, 누나. 그럼 지금 두 분은 헤어지신 거예요……? 두 분 다 지금 따로 사시고 친구처럼 지내시는 것 같던데.”
강준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들에 세련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풉. 왜, 둘이 결혼했다가 이혼이라도 했을까 봐? 그럼 지금처럼 지내는 게 완전 할리우드 스타일이겠네? 물론 다행히도 그런 쪽은 아니야.”
“그럼…….”
“애초에 하준이가 일부러 미친 척하고 그런 폭탄발언을 한 거였던 거지. 남은 학교생활 좀 편하게 다니려고. 어차피 둘이 같이 사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남들한테 의심받을 여지도 전혀 없던 거고. 어떻게 보면 진짜 말도 안 되는 생각인데 그 아이디어가 하준이 머리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니까 몇 배는 쇼킹했던 거지.”
“와…….”
지금 멤버들의 나이가 그 당시 하준의 나이와 얼추 비슷한 상태였기에 세련의 얘기들이 더더욱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엔 없었다.
뭐랄까,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다소 비현실적인 소재처럼 느껴진달까.
은호가 다소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갤 갸웃거렸다.
“근데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행동이 나올 수가 있는 건가……? 기계가 아닌 이상 절대 못 그럴 것 같은데.”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준도 은호의 얘기에 동조하는 듯 고갤 낮게 끄덕였다.
“음, 그러게. 단순히 학교 1, 2년 편하게 다니겠다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긴 한데.”
은호와 이준의 얘기에 세련도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 말했다.
“그치. 그래서 아직도 난 유하준 속을 모르겠다니까? 십수 년을 알고 지내면서도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알 수가. 걔네 둘 사이도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애매하게 끌고 있을 건지도 참 답답하고.”
“애매요? 두 분 사이가 지금 애매한 사이에요?”
여태껏 두 사람의 사이에 이상함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멤버들이었기에 의아한 반응을 보일 수밖엔 없었다.
물론 세련의 입장에선 그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 답답함을 느껴왔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온 거였고.
굳이 멤버들에게까지 그런 깊은 얘기까진 할 필요가 없었기에 세련은 피식 웃어 보이곤 고갤 내저었다.
“뭐, 암튼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만 알고 있어. 너희 이거 하준이랑 세희한텐 비밀이다? 알지?”
“아, 그럼요! 절대 얘기 안 할게요, 누나!”
“훗. 그럼 난 이제 일 좀 하러 가봐야겠다. 무대 잘 하고 이따 또 보자, 얘들아!”
“네, 누나!”
잠깐의 휴식을 끝내고 세련이 대기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무척이나 다급한 목소리로 정진웅이 세련을 불러왔다.
“이, 이사님!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은데.”
빠르게 세련에게로 다가온 정진웅이 곧장 자신의 휴대폰을 세련에게 건넸다.
매니저 정진웅이 자신에게 다급하게 보여줄 게 뭐가 있나 싶은 생각에 세련은 의아한 표정과 함께 액정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잠시 뒤.
화면 위로 띄워진 기사의 내용을 모두 확인한 세련은 그대로 멍한 상태가 돼 버릴 수밖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