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흐어엉…… 대표님,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마세요. 저희 옆에 꼭 붙어만 계세요…… 저희가 대표님 지켜드릴게요. 흐어어엉.”
“크흑…… 저희 한국 가면 바로 운전면허부터 딸게요. 대표님 가고 싶은 곳 있으면 어디든 다 저희가 데려가 드릴 수 있게 운전 연습 진짜 열심히 할게요, 대표님……! 크흑.”
하준과 구세희가 둘만의 대화를 나눌 새도 없이, 잠시 자릴 비웠던 멤버들이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그러곤 깨어난 하준을 발견하자 대성통곡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은호와 지호는 하준의 양품에 안겨 눈물, 콧물까지 마구 흘려대고 있는 상태.
하준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만류했다.
“지금 너희가 수술 부위를 누르고 있는 건 인지하고 있는 거지? 갈비뼈 붙기도 전에 다시 으스러질 것 같은데.”
“아아……! 죄송해요.”
황급히 가슴팍에서 떨어진 은호와 지호는 놀란 표정으로 수술 부위를 쳐다봤고, 하준은 엉망이 돼버린 자신의 상의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너희 가고 나면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 그냥 눈물이면 닦고 말려고 했는데 이건 아무래도 안 되겠네.”
“크흑, 죄송해요 대표님…….”
휴지를 뽑은 지호가 하준의 상의를 조심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옅게 웃어 보이는 하준의 상태를 보곤 세련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래도 이 정도라 천만다행이다. 너 진짜 죽을 뻔했던 거 알지? 좀만 더 옆으로 떨어졌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평생 쓸 운 여기서 다 쓴 거야, 너.”
“충돌한 뒤로는 잘 기억이 안 나네. 부딪치고 계속 회전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회전이 널 살린 거지. 그 덕에 나무숲 사이로 떨어진 거니까. 후, 이래서 졸음운전이 음주운전보다도 더 무섭다고 하는 거라니까?”
“졸음운전?”
하준의 물음에 세련이 사고의 경위를 설명해 왔다.
“그 트럭 운전기사가 졸음운전을 한 것 같다더라고. 앞에 서 있는 트럭 발견하곤 급하게 핸들을 틀었는데 하필이면 거기에 네 차가 있었던 거야. 그나마 속력이 줄어든 상태라 천만다행이었지.”
세련의 얘길 듣고 나자 잠시 잊어버렸던 그 순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첫 번째 트럭을 멈춰 세우고 난 뒤 모든 게 다 끝났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뒤에 나타난 두 번째 트럭을 발견한 후엔 그 어떠한 것도 손 써볼 수가 없는 상태였다.
자신이 트럭을 발견했을 땐, 이미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덮치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으니까.
그 뒤의 기억들은 드문드문했다.
수많은 부딪침과 회전을 반복한 뒤에 어딘가로 쿵 떨어져 버렸던 것 같은데.
조금 전 세련으로부터 당시의 상황을 듣고 나자 대략이나마 당시 현장이 어땠는지 짐작이 되는 듯했다.
“근데 너 대체 거기엔 왜 갔던 거야? 설마 세희가 거기에 있는 거 알고 갔던 거야?”
하준이 파파라치들로부터 정보를 받아 그곳까지 갔다는 사실을 세련은 아직 모르고 있는 상태.
세련의 물음에 하준이 구세희와 짧게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구세희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이제 막 깨어난 애한테 뭘 그렇게 자꾸 물어봐. 숨 쉬기도 버거울 애한테. 나중에 다 괜찮아지고 나면 그때 한꺼번에 몰아서 물어봐. 지금 말고.”
“아 참, 그렇지. 내가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갈비뼈 다쳐서 그냥 누워만 있어도 아플 텐데. 쏘리, 하준.”
한 손을 들어 미안하단 제스처를 보내오는 세련에게 옅게 웃어 보이곤 하준이 멤버들을 바라봤다.
“너희도 이제 그만 가봐. 내일이 시상식인데 아직까지 연습 하나도 못 했을 거 아냐. 조금 있다 리허설도 있지 않나?”
“그렇긴 한데…… 대표님이 이렇게 누워 계시는데 저희가 대표님 혼자 놔두고 가기가…….”
“지금은 혼자 있는 게 더 편하니까 걱정 말고 얼른 가봐. 생에 첫 시상식인데 연습 하나도 못 해서 볼품없는 무대가 돼버리면 안 되지. 그것도 아시아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을 건데.”
“…….”
그래도 멤버들이 주저하고 있자, 하준이 세련에게 말했다.
“누나가 애들 좀 진웅이한테 데려다줘. 좀 있다 리허설 하려면 지금 출발해야 할 거야. 내일 시상식까지 다 끝나고 나면 그때 다시 오는 걸로 하고.”
하준의 얘기에 세련도 고갤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지금은 너네 대표님 말대로 하자. 데뷔 후 첫 시상식 무대인데 평생 후회로 남을 무대가 돼선 안 될 거 아냐. 여긴 세희한테 맡겨 두고 우린 얼른 리허설 하러 가보자.”
멤버들의 등을 떠밀며 세련이 구세희에게 말했다.
“넌 굳이 시상식 안 와도 되니까 여기서 하준이 계속 간호하고 있어. 알겠지? 뭐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그냥 혼자 알아서 하는 걸로 하고 되도록 연락은 하지 않는 걸로. 오케이?”
“…….”
“자아, 그럼 우린 얼른 출발하자, 출발!”
“대표님! 저희 금방 끝내고 얼른 다시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아프지 마시고 회복 잘 하고 계세요! 아셨죠?”
“대표님. 저희 진짜 열심히 할 테니까 TV로 꼭 보고 계셔야 돼요! 꼭이요!”
하준을 향해 저마다 한마디씩을 내뱉곤 멤버들과 세련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산만하고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일순 고요함으로 바뀌자, 그제야 하준도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하마터면 다시 수술실로 들어가야 하는 건가 싶었네.”
“그래도 너 수술실 들어가 있을 때 애들 눈물범벅이 된 상태로 계속 기도만 했었어. 아마 쟤들이 제일 놀랬을 거야.”
구세희의 얘기에 하준도 이해한다는 듯 고갤 주억거렸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구세희가 낮게 말을 덧붙여왔다.
“그리고…… 임조하 씨도 다녀갔었어. 이 병실도 임조하 씨가 너 수술하는 동안 잡아둔 거고.”
어느새 임조하에 대한 호칭이 달라져 있는 구세희를 보자, 하준이 웃음을 지었다.
“이제 호칭이 ‘씨’로 바뀌었네? 어제까지만 해도 얘, 걔 하면서 부르더니.”
“나보다 어린 줄 알았더니 아니더라고. 역시 연예인이라 그런가 관리를 엄청 잘 받은 모양이야.”
“그래? 몇 살이던데?”
“그건 안 물어봤어. 그냥 보자마자 나랑 친구라고 하던데?”
구세희의 얘기에 하준이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서, 너도 그냥 동갑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럼 친구라는데 당연히 그런 줄 알지. 내 연락처까지 알아봤을 정도면 내 나이도 이미 파악을 끝마쳤다는 뜻일 텐데.”
“넌 앞으로 외국 같은 곳엔 혼자 내보내면 안 되겠다. 딱 사기당하기 좋은 타입이야.”
“……뭐?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애초에 홍콩에선 나이 같은 걸 물어보지도 않고 태어난 연도와 상관없이 모두가 다 친구처럼 지낸다는 사실을 구세희는 아마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알려줄까 싶다가 임조하가 자신보다 네 살이나 어린단 걸 알면 구세희 성격에 노발대발 할 것을 알기에 그냥 묻어두기로 했다.
“그래서, 임조하 씨랑은 새벽부터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눈 건데? 둘이서 할 만한 얘기들이 있었나?”
“뭐, 대화라기보다는 거의 일방적인 취조에 가까웠지.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너에 대한 것들만 물어봤으니까.”
구세희가 팔짱을 끼곤 하준을 흘겨봤다.
“내가 지금 네 상태가 이래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넌 무슨 애가 여자 관리도 제대로 못해서 나한테까지 연락을 하게 만드냐? 네가 뭘 좋아하고 어떤 여성상을 원하는지 내가 이 타국까지 와서 그런 질문을 받고 있어야겠어? 어?”
“…….”
“후우. 무슨 얘길 하려고 그 꼭두새벽부터 부르나 했더니. 내가 그 얘길 듣고는 어처구니가 없더라, 어처구니가. 스테이크도 더럽게 질기기만 하고.”
오랜만에 보는 듯한 구세희의 본래 성격에 하준은 웃음이 새어 나올 수밖엔 없었다.
웃을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에 눈을 살짝 감았다 뜨곤 하준이 구세희에게 말했다.
“그래도 너한텐 제법 익숙한 일 아닌가? 학교 다닐 때 늘 겪던 일이잖아.”
“뭐? 이게 진짜.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냐? 너 땜에 그때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그때 그것들 경찰에 신고 안 한 게 아직도 한이 된다고. 알아?”
“큭. 그래도 그 정도면 내가 알아서 잘 정리해 준 거 아닌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초대형 이벤트까지 해줬는데.”
“……참나. 그 얘긴 갑자기 왜 꺼내는 거야…….”
갑자기 십 년도 더 된 일을 꺼내오자 구세희는 민망해진 듯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하준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구세희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임조하가 묻는 말에 일일이 다 답해준 거야? 내가 뭘 좋아하고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그럼 그 자리에서 김치 싸다구를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연히 묻는 거엔 답해줬지. 거기서 내가 얘기 안 해주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니까.”
“음, 그랬구나.”
침대맡에 기댄 채로 천천히 고갤 주억거리는 하준.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얼굴 위론 뜻모를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는 듯 구세희가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냈고, 하준은 그녀가 건넨 음료를 받으며 질문을 건넸다.
“한국엔 언제 돌아갈 거야?”
“뭐 원래는 시상식 끝나고 바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너 이렇게 입원해 있으니까 너 퇴원할 때까진 꼼짝없이 같이 있어야지 뭐. 지금 네 상태론 혼자서 씻지도 못할 텐데.”
“음, 그럼 잘됐네. 안 그래도 좀 더 있다 가라고 할랬는데.”
어딘가 모르게 의미심장한 하준의 얘기에 구세희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하준도 구세희의 두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우리 아직 해결 못한 얘기를 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적어도 아저씨가 나오기 전엔 서로 합의가 돼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하준의 얘기에 구세희의 눈동자가 한층 더 키워졌다.
하준이 꺼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준이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덧붙였다.
“난 이번 일로 마음을 정한 것 같아서 말이야.”
* * *
같은 시각, 홍콩의 한 외곽에 위치한 편의점 앞.
테이블 위로 두 대의 검은색 카메라가 올려져 있었고, 서로 다른 캔 맥주를 들고 있는 두 남자는 다소 충격에 휩싸인 얼굴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낮에 그 사고 당한 남자가 ‘H’라 이거야? 그 미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스타 메이커 ‘H’?”
“어. 그 남자가 준 명함으로 검색해봤더니 그 사람이더라고. 이번에 홍콩에서 하는 시상식 때문에 들어와 있던 거고.”
“하. 어떻게 그런 일이. 넌 같이 차까지 타고 왔으면서 아예 눈치도 못 채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나 유명한 사람을?”
“…….”
지금 이 남자 오진위에게 그의 유명세 따윈 조금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오늘 벌어졌던 모든 일들의 전말. 그리고, 그 스토리.
한 여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질 각오로 트럭을 막아 세웠던 남자.
그리고 그 일련의 모든 과정과 더불어 당시의 현장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자신.
이건 결코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스토리였다.
반쯤 비워져 있던 맥주를 단숨에 입안에 털어버리곤 그가 캔을 찌그러뜨렸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의 친구 웨이에게 말했다.
“가자. 이건 우리가 직접 터뜨려야 할 초대형 블록버스터급 사건이야. 이런 걸 절대 남한테 넘겨줄 순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