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지금 TV를 시청하고 계실 모든 분들께 간곡한 부탁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우리…….”
두 번째 미래 예지에서 이어지기 시작한 장면.
시상식 무대 위에 서 있는 노세련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부디 우리 구세희 사장이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제보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부디 아무 일 없이 살아 돌아올 수 있도록…….”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노세련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한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무대 아래 관객들은 그녀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휴대폰 후레쉬 불빛들을 비춰오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시상을 위해 나온 자리에서……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계실 임조하 씨는 다행히 현장에서 먼저 구조돼 현재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합니다. 부디 임조하 씨의 빠른 쾌유를 빌겠습니다.”
빠르게 눈물을 수습하곤 이번엔 임조하의 얘길 꺼내오는 노세련.
그것과 같은 타이밍에 하준의 눈앞 장면들은 일순 흩어져 버리기 시작했다.
“아, 카드 지갑 사이에 껴 있었네. 휴, 난 또 어디서 흘리고 왔다고.”
주머니에 있는 것들을 다 뒤적거리고 나서야 객실 카드키를 찾아낸 구세희.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그녀를 바라보는 하준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해져 있을 수밖엔 없었다.
대체 조금 전 미래 예지는 어떤 상황이었던 걸까.
두 번째 미래 예지에선 그저 임조하가 시상식에 불참한 것 정도로만 여겼었는데.
조금 전 장면에선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구세희의 이름까지 언급이 되었다.
그것도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노세련의 슬픔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안전하게 돌아와 달라니. 부디,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니.
대체 구세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뭐야,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사람 민망하게.”
늘 그렇듯 부분적인 정보만을 알려주는 미래 예지였지만, 그럼에도 하준은 반드시 그것들을 유추해내야만 했다.
현장에서 먼저 구조됐다는 임조하. 그리고 생명엔 지장이 없는 상태.
그럼 어떤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는 건가?
그런데 왜 ‘먼저’라는 말을 썼던 걸까.
그것도 구세희가 살아 돌아올 수 있게 많은 제보와 관심을 호소하고 난 뒤에.
잠깐. 설마 그럼.
“야, 야, 유하준!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냐니까? 얼굴은 또 왜 그렇게 심각해져가지고는?”
자신의 얼굴 위로 손바닥을 휘휘 내젓고 있는 구세희에게 하준이 물었다.
“너 혹시 임조하 씨랑 따로 약속 잡거나 한 거 있어?”
“얘가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야. 내가 임조하랑 왜. 생판 모르는 사이에서 아까 얼굴 잠깐 본 게 단데.”
“진짜 없어? 임조하 씨한테 연락 오거나 한 것도 없고?”
“얘가 진짜 왜 이런대? 연락처를 알아야 연락이 오든 말든 하지. 그리고, 설령 안다고 한들 그 여자가 나한테 연락할 일이 뭐 있냐? 너라면 또 모를까.”
말을 내뱉고는 일순 기분이 나빠졌다는 듯 구세희가 하준을 흘겨봤다.
“참나. 임조하랑 밥 먹고 오더니 내내 머릿속에 걔 생각밖에 안 나나 보네? 왜, 홍콩 셀럽은 뭐가 달라도 한참 달랐나 보지?”
대체 뭘까.
전혀 연관성 없는 두 사람이 왜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사고를 겪게 되는 걸까.
그리고 그 사고라는 건 대체 어떤 사고인 거고.
짧은 시간차를 두고 연달아 나타난 두 개의 미래 예지였지만 지금으로썬 아무것도 짐작해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사고가 내일 일어나는 건지, 시상식 당일에 일어나는 건지. 아니면, 오늘 당장에 일어나는 건지 조차도.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구세희의 얼굴 위로 홀로그램처럼 뭔가가 떠오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앞선 미래 예지들처럼 시야가 뒤집어지지도 않은 채 그대로 빠르게 흘러가는 어떠한 장면들.
그 순간, 하준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엔 없었다.
* * *
같은 시각, 다음 스케줄을 위해 이동 중인 임조하의 차량 안.
뒷좌석에 앉은 임조하가 조수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알아봐달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요? 그 여자 말이에요.”
“응. 알아보니까 네가 얘기했던 게 맞더라고. 어릴 적부터 쭉 한 집에서 같이 살았던 모양이야. H가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그래서 정확히 두 사람의 관계가 뭔데요? 단순히 친구인 사이인 거예요, 아니면 그 이상의 뭔가가 있는 거예요?”
“글쎄. 정확한 거야 당사자들만이 아는 거겠지만 특별히 이성적인 관계라고 느껴질 만한 것들은 없었어. 두 사람 주변에서도 전혀 그런 기류는 못 느끼는 것 같았고. 그냥 가족 같은 사이가 아닐까 싶은데.”
“흠.”
사실 하준과 저녁 식사를 하기 전부터 내내 신경이 쓰이던 여자가 있었다.
바로 구세희라는 여자.
자신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한 집에서 함께 자라왔고 지금까지도 그 관계는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고.
‘H’를 자신의 남자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마음을 가진 이상, 당연히 그 존재에 대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소 진지해져 있는 임조하의 표정을 살피며 그녀의 매니저가 우려의 목소리를 내왔다.
“너 혹시 무슨 다른 생각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 그냥 잠깐 그러다 말 거지?”
아주 사소한 것 하나도 다 기사가 되는 그녀였기에 매니저의 입장에선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끊이질 않는 스캔들로 인해 유명세만큼이나 좋지 못한 이미지들도 결코 적진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이번엔 그 상대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유명 스타 메이커 ‘H’.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건진 알 수 없지만, 이번 건은 이전의 것들과는 사이즈부터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뭐?”
“아니 뭐 정말 진지한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거나…… 그래서 이미 머릿속으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다거나 하는 그런.”
조심스럽게 내뱉어오는 매니저의 말을 귓바퀴로 흘리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임조하.
그러곤 시트 등받이에서 등을 떼곤 매니저에게 물었다.
“오빠. 연락처 있죠?”
“연락처? 무슨 연락처?”
“그 여자요, 내가 알아봐달라고 했던.”
“너, 너 설마 진짜로…….”
눈동자를 키워오는 매니저를 바라보며 임조하가 당차게 고갤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만나서 모조리 다 털어봐야겠어요. 둘이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닌 건지, 그렇다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그 남자한테 접근하면 되는 건지.”
* * *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부터 울려오는 휴대폰 알람 소리를 끄곤 하준은 객실키를 챙겼다.
이미 알람 전부터 일어나 있었기에 준비는 모두 끝마친 상태.
복도로 나가자, 각 객실에서 멤버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었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저 은호 형 때문에 한숨도 못 잤어요! 조식 먹겠다고 새벽부터 일어나 가지고는 막 샤워하면서 콧노래까지 불러대고! 휴, 완전 컨디션 꽝이에요.”
“조용히 해, 인마.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우리가 또 이런 고급 호텔에서 조식을 먹어본다고. 잔말말고 얼른 따라와.”
눈이 퀭해 있는 지호의 팔을 끌고선 은호가 앞장서 갔고, 하준은 구세희와 세련의 객실 앞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이준이 말을 건네왔다.
“아까 세련 누나한테 문자 왔었어요. 먼저 내려가 있으시겠다고.”
“그래?”
밤새 고민하고 또 고민해 봤다.
부분적인 정보들만으로 어떻게 그 미래를 막을 수 있을지.
답은 하나뿐이었다.
언제, 어떻게, 왜 그 사고가 일어나는 건지 알 수 없다면 애초에 그것 자체를 봉쇄해 버리는 것.
즉, 왜 임조하와 구세희가 만나 그런 사고로까지 이어지는진 모르겠지만 아예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면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부터 내내 자신이 구세희와 함께 붙어 있으면 되는 것이었고.
“근데 은호 형은 아침 먹으러 가는데 왜 그렇게 꾸몄어요? 밖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호텔 안에서 먹는 건데.”
강준의 물음에 은호가 앞머리를 쓰윽 넘기며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언제 어디서 파파라치한테 찍힐지 모르는데 항상 멋있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야지, 인마. 어디 스타의 삶이 편할 줄 알았어?”
한껏 멋을 부리고 있는 은호를 가리킨 지호가 크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어젯밤에 편의점 잠깐 다녀왔는데 누가 자기를 몰래 찍고 있는 것 같더래요. 아무래도 그게 파파라치였던 것 같다고 이제부턴 객실 밖을 나간 순간부터 연예인 모드로 바뀌겠다나 뭐라나.”
“참나, 말도 안 돼. 임조하 정도면 몰라도 누가 우리한테 그렇게까지 관심 가진다고.”
“야, 말이 왜 안 돼. 진짜 파파라치였다니까? 휴대폰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막 찍고 있었다고. 이번 시상식에 참여하는 연예인들 다 여기서 묵기로 돼 있으니까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거겠지.”
“……에이, 그래도.”
은호와 멤버들이 파파라치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고, 곧이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먼저 음식을 담고 있는 세련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나, 좋은 아침이에요!”
“굿모닝~ 올, 그래도 다들 부지런한데? 조식 먹겠다고 아침부터 일어들 난 거야?”
“헤헤, 호텔 조식 꼭 한번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이거 다 마음껏 먹어도 되는 거죠?”
“그럼. 세 번, 네 번 계속 퍼담아 먹어도 돼. 얼른 접시 들고 와.”
“네엡!”
하준을 발견하곤 세련이 한쪽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이, 하준! 잘 잤지?”
“응. 세희는 안 보이네. 아침 안 먹고 더 잔대?”
“더 자긴. 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가지곤 아주 한껏 꾸미고 나갔는데?”
“……뭐? 나갔다고? 어딜?”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얘기에 하준의 표정은 급격히 심각해졌다.
세련은 파인애플 하나를 입에 집어넣곤 오물거리며 말했다.
“글쎄? 아침 약속 있다고만 하고 다른 말은 없었어. 그나저나 대체 누굴 만나러 가길래 그러는지 새벽부터 화장하고 머리 하고, 어휴,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향수는 또 어찌나 들이붓던지 방에서 냄새가 빠지질 않더라.”
“…….”
세련의 얘기에 하준은 곧바로 호텔 로비로 뛰쳐나왔다.
그러곤 밖으로 걸음을 옮겨 나가며 곧바로 구세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뚜뚜뚜.
그러나 수차례 걸어봐도 통화연결음 외엔 들려오지 않는 구세희의 목소리.
하준의 심장은 더욱더 세게 요동칠 수밖엔 없었다.
“사고…… 그 사고.”
어젯밤 구세희의 얼굴 위로 떠오른 홀로그램.
그리고 그 화면 위로 나타난 끔찍했던 교통사고.
이른 아침부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으면 다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생겨 버린 상황에 하준은 머릿속이 조금도 정리되질 않고 있었다.
“잠깐…….”
그런데, 그때.
막막했던 하준의 머릿속으로 문득 아까 전 멤버들의 대화가 갑자기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호텔 밖으로 나온 하준은 재빨리 주변을 살펴나갔다.
‘제발.’
부디 제발 그 어떤 누구라도 있어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준은 샅샅이 훑어갔고, 그러는 동안에도 하준의 마음은 더더욱 초조해져 가고만 있었다.
그러다 잠시 뒤.
하준의 시야 먼발치로 샌드위치를 물고 있는 한 남자가 들어왔고.
그의 목엔 검은색 카메라 한 대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