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싱긋한 미소와 함께 하준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임조하.
그런데, 그런 임조하를 마주하고 있는 하준의 표정은 급격히 굳어질 수밖엔 없었다.
조금 전 임조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황당무계한 소리 때문이 아닌, 하준의 시야가 일순 뒤집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뀌어 버린 화면 속으로 선명하게 들려오는 경쾌한 멜로디.
딴딴딴딴, 딴딴딴따.
푸르른 잔디밭 사이론 두 남녀가 서 있었고, 그들의 양옆으론 수많은 사람들이 축하의 박수를 보내오고 있었다.
보이는 장면만으로도 어떤 순간인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대체 왜 지금 이 순간에 이 장면들이 나타난 건진 조금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하객들 사이로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남녀의 얼굴은 노이즈가 깔려 전혀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
그런데, 그때.
“자, 이제 식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축가만을 남겨둔 상태인데요! 오늘 신랑 신부를 위해 축가를 불러주실 분들은 이 자리를 위해 먼 미국에서부터 한 걸음에 달려와 주신 분들입니다! 다들 누가 나올지 대충 짐작이 가시죠?”
“와아아아!”
“자, 그럼 바로 모셔보겠습니다!”
하객들의 열띤 환호성 사이로 다섯의 아이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곧 마이크를 잡고선 환한 웃음을 지어왔다.
“두 분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희 대표님을 누군가에게 보내드려야 한다는 게 쪼끔 서운하긴 하지만, 뭐 그래도 하루 중 저희와 보내는 시간들이 더 많을 것 같긴 해서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하하. 두 분 앞으로 행복하게 사세요!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
멤버들을 대표해 축하말을 건네오는 이준을 보고 나자 하준은 그제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바로 자신의 결혼식이었던 것.
“날 위로하는 작은 우산~ 두 손 꼭 잡고 이 비를 함께 걷고 싶어.”
미래의 자신이 아닌, 그 옆에 서 있는 신부를 바라보며 <우산>을 부르고 있는 멤버들.
하준은 대체 왜 이런 미래 예지가 지금 이 순간에 나타난 건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것도 임조하의 황당무계한 소리를 듣고 난 바로 직후에.
“이 비가 그쳐도 영원히 함께하길 약속해~”
축가가 흘러나오는 동안에도 하준은 끊임없이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려 애썼지만 전혀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시야 속 모든 장면들이 선명한 와중에도 오직 그녀의 얼굴만은 노이즈가 짙게 깔려 있었기 때문에.
“두 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시길 바라겠습니다.”
은호의 멘트와 함께 지호와 하늘이 각각 꽃송이를 들고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하준에게 한송이를 건넨 뒤, 옆에 서 있는 그녀에게도 한 송이를 건넸다.
그러곤 하늘이 그녀에게 무언가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눈앞의 장면들이 일순 사라져 버리며 다시 현실의 시야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쪽한텐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진 모르겠지만 나한텐 전혀 아니에요. 아까도 말했듯 이미 오래전부터 이날만을 기다려왔으니까.”
복귀된 하준의 눈앞으론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임조하의 얼굴이 드러나고 있었고, 하준은 혼란한 머릿속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대체 왜 뜬금없이 그런 장면들이 나타났던 걸까.
지금껏 늘 그래왔듯 이것 또한 분명 자신에게 일어날 미래의 모습일 텐데.
근데 왜, 대체, 지금 이 순간에.
“나도 가볍게 꺼낸 얘긴 아닌 만큼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대답할 필욘 없어요. 우리 두 사람의 연애가 공개되면 그야말로 세기의 커플이 탄생하는 걸 텐데! 그만한 준비는 하고 시작해야 되지 않겠어요? 훗.”
“…….”
도도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어 보이는 임조하의 얼굴을 하준은 심각하게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그녀와의 미래는 전혀 그려지질 않는다.
백번 양보해서 조금 전 미래 예지 속 신부가 그녀라고 하더라도 하준은 그 미래를 따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매력 있고 괜찮은 사람인지의 여부를 떠나, 애초에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일이었기에.
머릿속을 떠다니는 온갖 종류의 생각들 사이로 하준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오늘 얘긴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전 단지 제안해 주신 자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온 것뿐입니다.”
“아이참, 얘기했잖아요.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뭐, 우리에겐 앞으로 많은 시간들이 있을 거니까 이 얘긴 차근차근 풀어가도록 하자구요? 응?”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완곡한 거절 의사를 재차 꺼내려던 그때, 테이블 쪽으로 두 명의 셰프가 다가왔다.
그러곤 스테이크를 비롯한 갖가지 요리들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자, 일단 그 얘긴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고! 우선 지금은 이 맛있는 음식들에 집중해 볼까요?”
하준의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로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홍콩 최고의 레스토랑에 최고의 쉐프들이 직접 요리한 고급 요리들.
그러나, 지금의 하준의 머릿속은 그것들이 조금도 들어오질 않고 있었다.
* * *
“시상식 끝나고 일정은 어떻게 돼요?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가?”
조금도 집중하지 못했던 저녁 식사를 끝마치곤 다시 호텔 입구로 돌아온 하준과 임조하.
그녀의 다음 스케줄을 위해 잠시 떨어져 있던 경호원들이 다가왔고, 임조하는 하준에게 이후의 일정을 물어왔다.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훗, 그럼 다음에 제가 한국 갈 땐 그쪽이 저한테 맛있는 저녁 사요. 입 싹 닦기 없기예요?”
“……그래요.”
“그럼 나중에 또 봐요! 전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내일 저녁에나 다시 호텔로 돌아올 것 같은데. 그때 시간 맞으면 잠깐 또 얼굴 보는 걸로 하고. 훗, 알겠죠?”
말을 내뱉곤 하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다시 차에 올라타는 그녀.
그러곤 서서히 하준에게서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하준도 옅게 한숨을 내뱉곤 호텔 로비로 들어섰고, 그러는 동안에도 아까 전 미래 예지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분명 어떤 연관성이 있어서 나타난 걸 텐데.’
모든 순간이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미래 예지는 나타난 순간에 함께 있던 사람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그 말은 즉, 노이즈에 끼어 정체를 알 수 없던 그녀가 지금으로썬 임조하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뜻.
그렇기에 이 혼란스러움 속에서 조금도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상태였고.
‘그럼 대체 언제 일어나는 일인 걸까. 미래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지금의 마음으로썬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그렇기에 어떤 태도로 그 미래를 대비해야 할지 좀처럼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렇게 온통 임조하와 관련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던 때, 하준의 눈앞 장면이 일순 까만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대형 무대 위에 서 있는 세련의 모습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NTV 부사장 직을 맡고 있는 노세련입니다. 우선 부득이하게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한 임조하 씨를 대신해 제가 시상을 맡게 된 점 양해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낯빛이 무척이나 어둡게 느껴지는 세련의 모습.
이틀도 채 남지 않은 시상식에 임조하는 왜 참석하지 못하게 된 걸까.
지금의 장소와 그녀의 멘트만으로도 이것이 아주 가까운 미래라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다소 긴장된 마음이 들 수밖엔 없었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미래 예지가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장면을 보여준다는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일 테니까.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큐카드를 든 채 입술 질끈 깨물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곤 울먹이는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푹 숙이곤 죄송하단 말까지 내뱉어온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임조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눈물까지 보일 성격은 아닌데.
“……지금 TV를 시청하고 계실 모든 분들께 간곡한 부탁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부디 우리…….”
울먹거림을 이어가는 세련의 뒷말들이 갑자기 묵음으로 바뀌더니 또다시 눈앞의 장면들이 뭉개져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시야를 회복했을 땐 호텔 로비로 돌아와 있었다.
“…….”
너무나도 이상한 날이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그것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차를 두고 이렇게 연달아 미래 예지가 나타나다니.
지금껏 이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더군다나 그 두 가지 장면 또한 조금도 이해가 되질 않고 있었고.
대체 왜 세련은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눈물까지 보였던 걸까. 그것도 각 국에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상황이었을 텐데.
마지막에 간곡히 부탁한다는 건 어떤 얘기였던 거고.
가뜩이나 첫 번째 미래 예지로 혼란했던 머릿속이 조금 전 장면들로 인해 더욱더 복잡하게 엉켜가는 기분이다.
“유하준.”
그때 하준의 귓바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커피 두 잔을 들고 있는 구세희가 하준의 옆으로 다가왔다.
“밥 먹고 이제 들어오는 길인가 보네? 뭐 얼마나 맛있는 걸 먹었길래 해가 다 질 때까지 같이 있었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하준의 눈을 흘기는 구세희.
하준은 그녀의 손에 들린 두 잔의 커피를 확인하곤 곧바로 물었다.
“세련 누나는? 지금 객실에 있어?”
“그럼 이 시간에 어딜 가겠어. 나한테 커피 심부름까지 시키고 자긴 블루투스 마이크로 노래 삼매경에 빠져 있다니까. 어휴, 듣다 듣다 고막이 아플 지경이라 나도 잠깐 나온 거야.”
“……흠.”
구세희의 말대로라면 지금의 세련에겐 아무런 일도 없다는 건데.
그럼 대체 왜 이틀 뒤 시상식에선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임조하를 대신해 나온 시상 자리에서 그랬다는 건 그녀와 어떤 연관이 있는 일이라는 건가?
아무래도 세련의 상태를 직접 확인해봐야겠단 생각을 하며 하준은 구세희와 함께 17층에 도착했다.
세련의 객실로 향하는 동안 구세희가 우물쭈물한 목소리로 낮게 물어왔다.
“임조하는 너한테 왜 밥 먹자고 했대? 뭐 따로 단둘이서 하고 싶은 얘기라도 있었던 건가.”
“임조하 아버님이 나랑 인연이 좀 있었더라고. 그때 일이 고마워서 밥 한 번 산 것 같아.”
그녀와 나눈 대화들을 구구절절 다 꺼낼 순 없는 일이었기에 하준은 대충 그렇게 답하곤 1707호 객실 앞에 걸음을 멈췄다.
구세희는 카드키를 꺼내기 위해 들고 있던 커피 두 잔을 하준에게 잠시 건넸다.
“잠깐만 들고 있어봐.”
커피를 건네받곤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구세희를 바라보는 하준.
평소 덤벙거리는 성격처럼 여기저기 꽤나 오래 행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구세희에게 고정돼 있던 하준의 눈앞이 갑자기 이상 현상으로 바뀌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벌써 오늘만 세 번째 나타나는 기시감 가득한 그것에 하준은 심각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번엔 또 어떤 장면이 나타날지 다소 긴장된 마음이 들 수밖엔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아까 전 시상식에 서 있던 세련의 모습과 함께 세 번째 미래 예지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