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세련이 구세희의 마음을 재확인시켜 주는 동안, 하준은 오랜만에 윤채경을 만나고 있었다.
오랜 기간 자릴 비웠다는 이유로 하준은 벌써 한 시간째 윤채경의 기분을 맞춰주고 있었다.
“어휴~ 대표님 커피 아주 잘 타시는데요? 앞으로 커피 마시고 싶으면 카페에 갈 게 아니라 대표님께 연락드려야겠어요?”
“……커피는 이 머신 기계가 탄 거니까 굳이 저한테 연락은 안 하셔도.”
“흥. 그건 제 마음이거든요? 아까 분명 저한테 굉~ 장히 미안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야 컴백 준비에 활동 시즌도 아니었던 터라 하준의 공백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윤채경의 입장에선 무척이나 섭섭하게 느껴질 수밖엔 없는 시기들이었다.
드라마의 종영, 그리고 지상파 연기 대상 시상식, 거기에 차기작 검토까지.
데뷔 10년 차가 넘는 그녀였기에 하준이 없어도 알아서 잘 해낼 수 있는 것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표의 부재는 당황스러울 수밖엔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 하준이 왜, 어떠한 이유로 자릴 비웠는지 아직까지도 전혀 알려주지 않은 상태였기에 더더욱.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 또한 하준 하나만을 보고 팔도에 들어온 사람이기에 하준에겐 꽤 많은 의지를 할 수밖엔 없었다.
윤채경이 커피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하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얘기 안 해주실 거예요? 두 달 동안 대체 뭐 때문에 자릴 비웠던 건지?”
“나중에 차차 말씀드릴게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흐음. 뭐 그렇다면 더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긴 하지만.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저 대상 받았을 땐 진짜 대표님한테 연락 올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날 새벽 내내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서운함이 가득 묻어 있는 윤채경의 얼굴에 하준이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죄송해요. 그날은 다 같이 뒷풀이하느라 정신 없을 것 같아서 나중에 연락해야겠다 했는데. 좀 늦긴 했지만 대상 받은 거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치, 됐거든요? 상 받은 게 언젠데. 이미 감흥 사라진 지 오래거든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긴 했어도 하준 또한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회사의 1호 배우이자 간판 스타라 할 수 있는 그녀의 생에 두 번째 연기대상을 축하 한마디 없이 넘어가 버린 셈이니까.
가뜩이나 시상식 전부터 내내 긴장에 긴장을 멈추지 못한 상태였다고 하던데.
하준의 얼굴 위로 미안함이 제법 느껴졌는지 윤채경이 헛기침을 두어번 내뱉곤 화제를 돌려왔다.
“으흠. 뭐 암튼 지나간 건 지나간 거고. 일단 우리 오늘 안으로 이 중에서 한 작품은 꼭 골라야 돼요! 다른 건 몰라도 차기작은 꼭 대표님이랑 같이 고르려고 두 달 내내 쌓아둔 거란 말이에요. 여기저기서 언제 답 줄 수 있는지 어찌나 연락들 해오는 상황인지. 오늘은 무조건 골라야 돼요. 아셨죠?”
테이블 위로 셀 수도 없을 만큼 쌓인 시나리오들을 보니 절로 입이 벌어졌다.
원래도 시나리오가 물밀 듯 들어오는 윤채경에게 연기 대상이란 어마어마한 타이틀까지 얹어졌으니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준이 시나리오들을 훑으며 윤채경에게 물었다.
“혹시 눈여겨본 작품들은 없으셨을까요? 그래도 채경 씨가 끌렸던 것들 중에 고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아! 물론 있죠.”
윤채경이 그럴 줄 알고 따로 빼놨다는 듯 옆에서 시나리오 두 권을 꺼냈다.
“저도 아직 여기 있는 건 반밖에 못 보긴 했는데, 그래도 본 것들 중엔 이 두 개가 제일 끌리긴 했어요! 음, 하나는 로맨틱 코미디고, 하나는 그냥 멜로, 로맨스. 어떤 게 더 낫겠어요?”
윤채경이 건넨 시나리오를 받으며 하준이 되물었다.
“근데 채경 씨가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해본 적이 있던가요? 잘 떠오르지가 않는 것 같은데.”
“오~ 그래도 저에 대해 관심이 있긴 있나 보네요? 훗, 맞아요. 코미디가 들어간 건 아직 한 번도 안 해보긴 했죠. B&D에 있을 때 박 대표가 이미지 지키라고 하도 강요를 하는 바람에.”
“음.”
“근데 이제 곧 30대로 접어들기도 하니까 한번 연기 변신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더라고요? 게다가 이 시나리오에 스토리 라인이 너무 재밌게 읽히기도 하고. 보면서 가볍게 대사도 툭툭 뱉어봤는데 아주 찰진 게 입에 딱딱 달라붙던데요? 호호.”
윤채경이 저렇게까지 흥미를 두는 작품이라면 다른 건 굳이 안 봐도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윤채경 정도 되는 배우라면 이젠 흥행보단 본인이 하고 싶은 작품에 좀 더 비중을 둬도 될 연차니까.
하준이 시나리오를 펼치자, 윤채경이 옆에서 줄거리를 요약해 오기 시작했다.
“대충 스토리를 요약해 드리자면, 같은 회사에 원수 같은 두 남녀가 있는 거예요. 서로 업무적으로 얘기만 했다 하면 그냥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안 맞는 거야. 대화만 시작하면 서로 눈에 레이저를 켜고 막 불꽃이 튀니까. 근데, 알고 보니까 서로 부모님끼리 엄~ 청 각별한 사이었던 거죠. 심지어 어릴 때 정략결혼까지 약속했던 사이었고!”
“……정략결혼요?”
정략결혼이란 말에 페이지를 넘기던 하준의 손이 멈칫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며칠간 내내 신경을 쓰이게 만들던 단어였기 때문이다.
“네, 정략결혼요! 소재가 너무 신선하지 않아요?! 보통 재벌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지극히 평범한 두 남녀한테 벌어진 거죠! 그것도 진짜 지독하게 성격이 안 맞는 두 사람이!”
“…….”
하준의 마음도 모른 채 윤채경은 해당 시나리오에 완전 꽂혀 버린 듯 흥분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너희 둘. 다 크면 꼭 결혼시키자고 명호 오빠랑 나랑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었어.”
일주일 전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모친이 꺼내온 이야기.
평소 거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하준도 그 순간만큼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건 구세희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는지 동공이 흔들리며 곧바로 고갤 낮게 숙여 버렸다.
“뭐 너희가 전혀 마음이 없다고 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런 게 아니면 나이도 찼는데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겠니?”
준비.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일이었기에 너무나도 낯설 수밖엔 없었던 그 단어.
결혼이란 것 자체를 떠올려 본 적이 없을뿐더러, 그 상대가 구세희라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정략 때문에 결혼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그러니까 그냥 가볍게 듣고 흘려 버리면 되는 일이긴 했는데.
분명 그랬는데…….
왜 그 얘기 이후로 구세희와는 그렇게나 어색해졌던 걸까.
마치 내외라도 하듯 말, 행동 하나하나가 그렇게나 조심스럽고 어색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내내 어찌나 숨이 막혔던지.
그냥 서로 못 들을 얘기라도 들은 것처럼 웃고 넘겨 버리면 되는 거였는데.
그런데, 대체 뭐 때문에 그랬던 걸까.
“응? 대표님 더우세요? 왜 그렇게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셨어요?”
하준의 얼굴을 살피던 윤채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는 동안에도 하준의 시선은 시나리오에 고정돼 있었고, 페이지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던 하준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네왔다.
“이 시나리오, 혹시 결말이 어떻게 끝나죠……?”
* * *
“와아아아!! 이준 오빠!”
“은호야, 사랑해!”
“강준아 조심히 다녀와!”
“우리 지호랑 하늘이 잘 좀 챙겨주세요!”
2주 뒤, 인천 국제 공항.
멤버들의 출국 시간을 알고 있던 팬들이 공항에 미리 나와 환호성들을 보내오고 있었다.
벤에서 게이트로 향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갖가지 선물들이 밀려 들어왔다.
“대표님! 이거 제가 직접 만든 초콜릿인데 대표님 드리려고 어제 밤새 만든 거예요! 이번에도 우리 오빠들 잘 부탁드려요!”
“아, 감사합니다.”
“대표님, 이것도요! 오빠들이랑 나눠드세요!”
멤버들이 일일이 팬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온갖 선물 공세들은 하준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오롯이 멤버들을 위해서만 준비한 것들이 아닌, 하준을 위한 것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그럼 저희 잘 다녀올게요! 시상식 보면서 응원 많이 해주세요!”
“오빠들 상 많이 받고 와요! 파이팅!”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출국 수속을 밟기 위해 멤버들과 스태프들이 공항 안으로 진입했다.
오늘은 시상식 참여를 위해 홍콩으로 출국하는 날.
매년 국내에서 열리던 NTV 시상식이 올해는 특별히 홍콩 방송사와 공동 주최로 치러지는 것이었다.
데뷔 후 처음으로 참여하는 시상식인 만큼 멤버들 모두가 한껏 상기돼 있었다.
“와아, 나 홍콩은 완전 처음 가보는 건데. 영화에서 보던 거랑 진짜 똑같으려나?”
“우리 얼마 전에 그거 봤잖아요! 그, 그 마카오에서 막 도박하면서 경찰들하고 싸우는 영화! 그거 보면서 홍콩 야경 진짜 예쁘다 생각했었는데.”
지호의 얘기에 강준이 타박해 왔다.
“야, 김지호. 홍콩이랑 마카오는 다른 곳이거든? 넌 고등학생이라는 애가 그것도 모르냐.”
“응? 무슨 말이에요? 은호 형이 영화 보면서 그랬어요! 홍콩 수도가 마카오라고! 그쵸, 은호 형?”
“응. 당연하지. 강준이 쟤가 졸업한 지 꽤 돼서 그새 다 까먹었나 보다.”
두 사람의 상식 밖의 지식 수준에 강준이 할 말을 잃어버린 듯 넋을 놓고 쳐다봤다.
그러나 이런 걸 그냥 넘어갈 리 없는 이준은 곧바로 지호에게 설명을 해왔다.
“홍콩은 도시 국가라 애초에 수도라는 것 자체가 없어. 그리고 홍콩이랑 마카오는 아예 다른 도시인 거고. 지호 너, 앞으로 은호가 하는 말은 두 번, 세 번씩 꼭 확인하고 머리에 집어넣어. 괜히 학교에서 놀림이나 당하지 말고.”
“……헐. 은, 은호 형. 방금 이준 형이 한 말 정말 다 사실이에요? 형이 나한테 잘못 가르쳐 준 거였어요?!”
지호의 배신감 가득한 표정에 은호가 눈을 회피하며 중얼거렸다.
“으흠, 이상하네……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던 것 같은데. 워낙 국제 정세가 빠르게 변하다 보니. 으흠.”
“이씨. 이제 형 말은 아무것도 안 믿을 거야. 너무 자신감 있게 얘기하길래 진짠 줄 알았네!”
은호의 뒷통수에 대고 지호가 말을 내뱉고는 하준에게 곧바로 다가갔다.
“대표님! 저 은호 형이랑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리로 해주세요! 아무래도 당분간 가까이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옆에서 모든 대화를 다 듣고 있던 하준은 은호와 지호를 잠시 번갈아 쳐다보곤 흔쾌히 고갤 끄덕였다.
“그래, 내 생각도 그래. 은호는 벌로 혼자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로 잡아야겠다.”
“대표님!”
은호의 망연자실한 표정에 하준은 재밌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의 누군가가 하준을 불러왔다.
“하준아!”
목소리의 방향을 따라 고갤 돌리자, 세련이 반가운 얼굴을 하고선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와, 여기서 이렇게 다 보네? 지금 출국하는 거야?”
“아, 어. 누난 공항에 무슨 일로?”
“어머, 얘 좀 봐? 우리 방송사에서 주최하는 시상식인데 당연히 우리도 가봐야지! 우린 다음 비행긴데, 너넨 언제야?”
“우리?”
우리라는 말에 하준의 시선이 세련의 뒤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하준과 눈을 마주치곤 쭈삣쭈삣 다가오는 구세희의 모습이 보였다.
하준의 앞에 선 구세희가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갑자기 한쪽 팔을 들어 올리고선 무척이나 과장된 톤으로 인사를 건네오기 시작했다.
“와아! 여기서 이렇게 다 보네?! 이런 우연이! 호호호. 정말 너무, 너무 반가운데?! 진짜 반갑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