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꾸는 스타 메이커-150화 (151/165)

150화

“긴 꿈을 꿨던 것 같아.”

하준이 다시 병실에 들어서자 모친 이정화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침대 맡에 등을 기대곤 구세희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녀가 병실에 들어선 하준을 바라봤다.

“늘 하준이랑 함께였어. 혼자 외롭게 어딘가를 가고 있더라고.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혹시나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계속 그 뒤를 따라갔던 것 같아.”

이미 하준은 수차례 들었던 얘기들이기에 담담한 표정으로 모친의 옆에 앉았다.

“그 꿈속에 하준이는 어떤 모습이었는데요? 지금처럼 다 큰 어른의 모습이었어요, 아니면 아줌마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 어린애의 모습이었어요?”

구세희의 물음에 이정화가 옅게 웃어 보였다.

“둘 다였어. 워낙 긴 꿈이라 그 길을 걷는 동안에도 하준이 모습이 조금씩 변해가더라고. 덕분에 지루하지 않는 시간들이었지.”

2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무의식 속에 살아온 이정화.

그럼에도 마치 하룻밤 사이의 일들을 얘기하듯 평온한 어조였다.

그런 이정화의 모습에 구세희도 옅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그랬나 봐요. 하준이가 하는 일마다 다 잘됐던 게. 하준이가 잘못된 길로 빠지려고 하면 아줌마가 계속 잡아줘서.”

구세희가 하준을 힐긋 쳐다보곤 이정화에게 물었다.

“그 꿈에 저는 없었어요? 저도 좀 알려주시지! 그럼 그 고생 안 하고 훨씬 더 잘됐을 텐데.”

“호호. 그럴 걸 그랬나? 내가 나빴네. 그래도 하준이 얘기 들어 보니까 너도 어엿한 사장님이 돼서 잘 하고 있다는 것 같던데?”

“에이 잘하긴요. 이제야 겨우 적자 면해서 숨 좀 쉬는 정도인데. 그나마도 이젠 접어야 하지 않을까 싶고요.”

구세희의 얘기에 하준이 구세희를 쳐다봤다.

구세희는 애써 담담한 얼굴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에휴, 안 할 수 있으면 끝까지 빼보려고 했는데. 이젠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아빠 저렇게 되고 회사 상황도 많이 안 좋아져서. 물론 당장은 힘들겠지만 차근차근 실무 경험 쌓으면서 하다 보면 언젠간 아빠를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작은 중소기업 정도의 규모였다면 차라리 마음은 편했을 터. 그러나 영신 G&M은 국내 2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이었고 이대로 무너지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무엇보다 영신은 아버지 구명호가 밑바닥부터 손수 일궈온 그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더더욱.

구세희의 얘기에 이정화가 하준에게로 시선을 옮기곤 물었다.

“오빠 재판이 언제라고 했지?”

“3주 후에요. 오늘 재판 증인 출석 때문에 일부러 한 차례 연기하셨다더라고요.”

“음……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하준에게 지난날들의 일들을 모두 전해 들은 이정화는 마음이 무거울 수밖엔 없었다.

오로지 자신과 하준을 위해 구명호는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어온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시선을 아래로 두고 있는 구세희를 잠시 바라보곤 하준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직접 자수를 하신 거라 무죄를 받긴 힘든 상황일 것 같고 그보단 양형에 참작 사유가 될 만한 것들을 최대한 제출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징역형을 받더라도 실형만큼은 면하게 하는 게 지금으로썬 최선의 방법이니까.”

하준이 구세희에게 말했다.

“민 검사님도 최대한 노력해보겠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은 마. 제출한 자료들 중에 필요한 것들만 골라서 공소장에 넣고, 구형도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소로 잡겠다고 하는 거 보면 집행유예 가능성도 꽤 높을 것 같고. 애초에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이 사건은 세상에 드러나지도 않았을 거니까 충분히 참작 사유가 될 거야.”

민정훈이 먼저 꺼내온 것처럼 얘길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이번 재판에 앞서 미리 하준이 민정훈과 딜을 해왔던 것.

이 사건의 주요 쟁점은 제너럴이란 조직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그들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지 구명호가 아니라는 걸 강조했다.

물론 민정훈 또한 그런 하준의 얘기에 동의하지 않을 순 없었고.

수사뿐만 아니라 공판까지 맡은 그가 애초에 구형을 크게 잡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실형만큼은 피할 수 있단 게 하준의 생각.

그렇기에 이미 재판 출석 전부터 그와 합의점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고.

하준의 얘기에 이정화도 구세희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세희야. 하준이도 나도 재판 땐 직접 나가서 증언하기로 했으니까 분명 잘 될 거야. 평생을 우리 셋만 생각하며 고생해 오신 분인데 또 그 힘든 곳에서 살게 할 순 없지. 우리가 어떻게든 다시 집으로 모셔올 수 있게 해보자.”

“아니에요, 아줌마. 아줌마는 다른 생각 마시고 그저 회복에만 전념하세요. 얼른 완쾌하셔서 그동안 못 해본 거 다 하고 즐겁게 사셔야죠.”

구세희의 얘기에 이정화가 안 그래도 얘기하려 했다며 하준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너 오면 얘기하려고 했는데. 이젠 좀 여기서 벗어나도 되지 않겠니?”

하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이정화가 웃어 보였다.

“여기서만 20년을 있었어. 그것도 꼼짝달싹 못한 채 누워서만. 이젠 좀 집에 가서 따뜻한 집밥도 먹고 사람답게 좀 살아봐야 하지 않겠어? 응?”

“하지만 아직은 재활에 더 신경을.”

“여기 더 있다간 내 몸이 더 망가질 것 같아서 그래.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20년이나 여기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끔찍할 수가 없더라. 재활도 정신이 건강해야 더 잘되는 법이지.”

깨어난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하준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모친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니 그 마음이 백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정화의 얘기에 구세희가 곧바로 끼어들며 말했다.

“그럼 저희 집으로 가요, 아줌마! 하준이 혼자 사는 집보단 그래도 저희 집이 쉬시기엔 훨씬 편하실 거예요. 일해주시는 아줌마도 계시고.”

“어머, 그럼 그럴까? 아직 옛날 그 집 그대로지?”

“네, 그대로예요. 안 그래도 저 혼자 있기에 되게 쓸쓸했는데. 아줌마 오시면 훨씬 위안이 될 것 같아요.”

마치 모녀가 나누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에 하준은 그저 말없이 지켜볼 수밖엔 없었다.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있던 이정화가 갑자기 하준을 쳐다보곤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하준이 넌? 넌 언제 들어올 건데?”

“네? 저는 갑자기 왜.”

“호호, 얘가 이렇게 무드가 없어요. 둘이 같이 살기 전에 미리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어? 어제 신문 보니까 요새 젊은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들 한다던데.”

이정화가 꺼내온 갑작스러운 발언에 하준과 구세희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의 그런 반응에 이정화가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말을 꺼내왔다.

“응? 그 반응들은 뭐야? 설마 명호 오빠가 여태껏 너희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뒤 그녀가 해온 얘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 * *

일주일 뒤, 멤버들의 공식 포스터 촬영장.

첫 컴백 무대 날짜가 열흘도 채 안 남은 상황에서 이번에 새롭게 들어가는 웹 예능 포스터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프레시 세례와 함께 순차적으로 멤버들을 찍어대던 촬영 기사가 짙은 한숨을 내뱉곤 허리춤에 손을 짚었다.

“후우. 오늘 다들 컨디션이 안 좋아요? 지난번 프로필 촬영할 때랑은 분위기가 너무 다르잖아. 암만 찍어대도 A컷은커녕 B컷도 못 건지게 생겼어. 이 시간이면 진작 다음 촬영으로 넘어갔어야 하는데.”

답답함이 가득 섞인 촬영 기사의 얘기에 정진웅이 재빨리 커피를 집어들곤 다가왔다.

“저, 기사님? 계속 촬영하시느라 많이 지치셨을 텐데 잠깐 쉬어 가는 게 어떨까요? 여기 시원한 커피 쭉쭉 들이켜시고 다시 파이팅 있게 가보시죠!”

정진웅의 싹싹한 태도에 촬영 기사도 마지못해 커피를 건네받곤 고갤 끄덕였다.

“휴, 뭐 그럽시다. 만약 조금 있다 촬영에서도 계속 그림 안 나온다 싶으면 그땐 그냥 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아, 내가 바빠서가 아니라 이거 얼른 찍고 넘어가야 티저 영상이랑 프로필 영상도 하루 만에 다 마무리할 수 있어서 그런 거예요. 쉬는 동안 멤버들 분위기 좀 끌어 올려 주고요. 알겠죠?”

“아, 예예. 그럼요. 한 방에 쭉쭉 갈 수 있게 할 테니까 염려 마십쇼!”

커피를 쭉쭉 빨아대는 촬영 기사를 달래곤 정진웅이 멤버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곤 옅은 한숨과 함께 멤버들의 얼굴을 훑었다.

“다들 왜 이렇게들 기운이 없어. 웃는 것도 죄다 부자연스럽고.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

“……죄송합니다.”

“휴, 얘들아. 이거 너희 단독으로 출연하는 거야. 일부러 2집 활동 날짜에 맞춰서 스케줄도 다 잡은 거고. 프로필 촬영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계속 그렇게 얼어 있으면 다음 촬영이 진행이 안 되잖아. 응?”

“네, 죄송해요 형. 어제 계속 연습하긴 했는데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제대로 해볼게요.”

분명 컴백 날짜를 코앞에 두고선 한껏 들떠 있어야 할 멤버들임에도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질 않고 있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선 정진웅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하준과는 그 어떠한 연락도 주고받지 못했던 멤버들.

정신적 지주이자 데뷔 전부터 오로지 하준만을 믿고 따라왔던 아이들이기에 그의 부재는 꽤나 크게 다가올 수밖엔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 언제 그가 다시 돌아올지 알기라도 하면 희망적인 얘기라도 전해줄 텐데, 본인 스스로도 거기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에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짧게 고갤 끄덕이곤 정진웅이 기운을 북돋았다.

“그래. 잠깐 쉬었다 가기로 했으니까 얼른 후딱 끝내버리자. 알겠지?”

“어…….”

“어……?”

그런데, 정진웅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멤버들의 시선이 그의 뒤쪽으로 일순 향하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그와 동시에 멤버들의 눈동자가 그 어떤 때보다도 크게 팽창되기 시작했다.

“대, 대표님!”

대표라는 말에 정진웅도 깜짝 놀라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정말로 하준이 서 있었다.

“다들 나 없는 사이에 실연이라도 당한 거야? 표정들이 영 엉망이던데?”

“대표님!”

하준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곧바로 하준에게 달라붙는 멤버들.

그중 지호는 하준의 품에 꼭 안겨서는 얼굴까지 파묻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멤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준은 옅게 웃어 보였다.

“그동안 고생들 했어. 다들 컴백 준비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못 둘러봐서 미안하고.”

“대표님. 이제 아무데도 안 가실 거죠? 또 어디로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시는 건 아니죠?”

자신을 올려다보며 애처롭게 묻는 지호의 물음에 하준은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멤버들 얼굴 하나하나를 훑으며 짧게 말을 내뱉었다.

“앞으로 열흘. 제대로 준비해서 2집 대박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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