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금일 공판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변론 기일은 3주 후인 목요일 오전 10시에 진행하겠습니다.”
1차 공판이 끝나고 모두가 퇴정을 시작했다.
다시 구치소로 가야 하는 구명호는 교도관들과 함께 별도의 출입문으로 향했고, 원고 측과 피고 측 모두 제 각기 다른 문으로 법정을 빠져나갔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쉽지 않은 재판이라 저도 어떻게 될진 장담할 수 없었는데. 덕분에 제대로 한 방 먹인 것 같네요.”
법정 안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민정훈의 얼굴 위론 큰 안도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하준도 고갤 끄덕이며 담담한 어투로 답했다.
“다음 공판 땐 다른 증인들도 출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오셨어요. 썬데이 미디어에 기자님 두 분과 B&D 엔터에 박성환 대표. 특히 썬데이 미디어 분들은 피고들과 꽤 오래 관계를 맺어왔던 분들이라 증언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을 겁니다. 다음 공판도 잘 부탁드립니다, 검사님.”
“하하. 부탁은요 뭘. 사건의 크기에 비하면 제가 하는 게 너무 없는 건 아닐까 싶은 정도입니다. 오늘 제출한 증거들이 너무 결정적이라 아마 저쪽에서도 더는 어떻게 손 써볼 생각은 못할 거니까 안심하세요. 이 재판,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민정훈의 강한 확신이 담긴 말.
하준 또한 곁으로 표현은 안 해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조금 전 재판에선 자신이 제출한 두 개의 녹취록이 모두 공개되었고, 그중 하나엔 당시 범행 현장의 상황이 생생히 들어 있었기에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해당 사건의 피해자였던 모친의 직접 진술까지 포함돼 있었기에 더더욱.
그럼에도 피고 측에선 범행을 부인했고 조작 여부에 대한 검증을 요청해 왔다.
물론 원고 측에서도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었고.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하준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여섯 명의 피고 중 유독 한 사람의 얼굴만큼은 완전히 일그러져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 다음 공판에선 강기욱한텐 무기 징역이 구형될 건데, 다른 피고들은 그렇지 못할 거예요. 녹취록 증거도 그렇고 정황상 살인 미수를 집어넣을 수 있는 건 강기욱 하나뿐이라.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다른 피고들 또한 구형 자체는 세게 나갈 겁니다.”
민정훈의 얘기에 하준도 낮게 고갤 끄덕였다.
제너럴. 지난 20년간 그들 내부에서도 수차례 인원 변동이 있었고 그중 강기욱만이 유일하게 그 자릴 줄곧 지키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가 20년 전 자신의 모친을 살해하려 했던 남자.
끔찍했던 당시의 상황이 담긴 녹취록이 흘러 나오는 동안 하준은 그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고, 역시나 그의 얼굴 위론 순간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당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 또한 그 어떠한 흔적도 없이 완벽히 처리했다 믿었던 자신의 확신이 완전히 뒤집혀 버린 순간이었으니까.
이제 하준에게 있어 제너럴의 다른 다섯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강기욱 그만이 합당한 처벌을 받고 평생 죗값을 치르며 살게 하는 것 외에는.
“저, 근데 말입니다, 대표님…….”
민정훈이 하준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왔다.
하준이 쳐다보자 그가 주변을 잠시 훑고는 낮게 말을 뱉었다.
“그…… 모친께선 정말로 완전 깨어나신 게 맞으시죠. 저도 대표님 전화 받고는 일단 재판 전략을 짜긴 했는데. 이게 참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는 일이다 보니. 워낙 기적 같은 일이기도 하고.”
민정훈의 입장에선 당연히 반신반의 할 수밖엔 없는 일이었다.
하준 자신 또한 지난 며칠간의 시간들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까.
하준은 옅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네. 오늘 재판에 직접 참여했다면 더 확실한 증언이 될 수 있었겠지만 아직은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요. 빠르게 회복하고 계시니까 수사에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요청하셔도 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오늘 증언만으로도 충분했는걸요. 우선은 건강부터 회복하시는 게 최우선이죠. 정말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때 대표님께 따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였다.
말을 마친 민정훈의 시선이 하준의 뒤쪽으로 옮겨지더니 이내 누군가에게 짧게 목례를 해왔다.
하준도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구세희가 서 있었다.
“저, 그럼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추후에 따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자리를 비켜주려는 듯 민정훈이 인사를 건네곤 멀어져 갔고, 하준과 구세희 두 사람도 서로를 마주했다.
“재판 준비는 잘돼가?”
하준이 먼저 꺼내온 물음에 구세희가 낮게 고갤 끄덕였다.
“응.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있어. 쉽진 않겠지만.”
“오늘 공판이 감형에 많은 참작 사유가 될 거야. 아저씨 재판 땐 나뿐만 아니라 엄마도 직접 증언하시려고 하고.”
하준의 얘기에 구세희가 눈동자를 키우며 물었다.
“저, 정말로 아줌마가 깨어나신 거야……? 어떻게?”
“음, 아까도 얘기한 것 같은데. 누군가의 지극 정성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 같다고.”
누군가의 지극 정성.
구세희 또한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20년이란 긴 시간 동안 의식불명의 상태로 있던 그녀가 한순간에 깨어났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쉽사리 입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구세희를 바라보며 하준이 물었다.
“오늘 바빠?”
“……아니, 그렇진 않은데.”
“그럼 나랑 어디 좀 같이 갈까?”
“어디?”
구세희가 묻자, 하준은 대답 대신 옅게 웃어 보였다.
그러곤 왼쪽 손목의 시계를 잠시 흘긋해 보이곤 다시 구세희를 바라봤다.
“엄마가 너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올 때 꼭 데려오라고 하셔서.”
* * *
그로부터 두 시간 뒤.
김해공항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장 택시에 올라탔다.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구세희의 심장은 내내 두근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만 남아 있던 그녀를 직접 마주하러 가는 길이 내내 긴장될 수밖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하준아. 지금 아줌마 상태는 어떠셔?”
“조금씩 재활에 들어가고 있는 중이야.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한 상태라 바로 무리할 순 없어서 하나씩 차근차근 해 나가려고.”
“……그렇구나.”
서울에서 부산으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 하준의 모친이 깨어난 상황들에 대해 전해 듣게 된 구세희.
그 과정은 듣고도 믿기 힘든 얘기들이었고, 정말 기적이란 말 외엔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만약 그녀가 깨어나지 못 했다면, 그리고 그 증거물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재판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갈 수밖엔 없었을 테니까.
정말 이 세상에 신이란 게 존재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을 내내 하면서 여기까지 온 구세희였다.
공항을 빠져나와 고가 도로에 오를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엔 침묵만이 흘렀고, 옆자리에서 그런 구세희를 지켜보고 있던 하준이 입을 열어왔다.
“그동안 너나 아저씨나 고생하고 있는 거 알면서도 못 도와줘서 미안해. 엄마 옆을 계속 지키고 있다 보니까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그래도 챙겨봤어야 했는데.”
하준의 얘기에 구세희는 일순 눈물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목구멍으로 간신히 막아내곤 고갤 내저었다.
“무슨 말이야. 당연히 아줌마가 먼저지. 너 아니면 아무도 지켜줄 사람이 없는 건데.”
말을 내뱉은 구세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곤 이미 오래전 했어야 할 그 말을 꺼내왔다.
“……그리고 미안하단 말은 내가 해야지. 아빠가 그랬던 거에 대해 다 알고 있으면서도 너한테 솔직히 말하지 못했는데. 아무리 두렵고 무서워도 그러면 안 됐던 거였어.”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은 구세희의 모습에 하준은 옅게 웃어 보였다.
“그래. 그건 네가 잘못했지. 진작 털어놨다면 그렇게까지 고생하진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네가 그러는 바람에 차 수리비만 왕창 깨졌잖아. 안 그래?”
“……그런 말이 아니라.”
“지나간 일은 이제 다 잊기로 하자. 오래 돌아오긴 했지만 어쨌든 다 잘 해결되고 있으니까. 중요한 건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지.”
말을 마치곤 하준이 창문을 살짝 열었다.
새어 나오는 바닷바람을 느끼며 뭔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을 이어가던 하준이 창밖을 바라보며 짧게 말을 내뱉었다.
“지금부턴 아저씨 재판에만 신경 쓰는 거야. 다른 건 다 생각하지 말고.”
* * *
30분 뒤, 하준의 모친 이정화가 있는 병원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
계산을 끝마치고 내린 뒤, 두 사람은 병원 안을 걷기 시작했다.
구세희의 얼굴 위론 긴장감이 더욱더 커지고 있었고, 쉴 새 없이 심호흡을 내뱉으며 간신히 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다.
“……여, 여기야?”
하준이 한 병실 앞에 걸음을 멈춰세우자 구세희가 문 옆에 붙어 있는 환자 이름을 확인하곤 물었다.
“응. 이름이 다르게 돼있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 어서 들어가봐.”
“나, 나 혼자……? 넌?”
“난 잠시 업무과에 좀 들러야 해서. 내내 기다리고 있으셔서 엄청 반가워하실 거야. 가서 말동무 좀 해드리고 있어. 금방 갈게.”
“……아, 응.”
문 앞에 선 채 심호흡을 길게 내뱉는 구세희.
그러곤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곤 문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구세희가 병실 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뒤, 하준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두 달이란 시간 동안 줄곧 이곳에만 머물러 있던 하준.
하지만, 결코 짧지 않았던 그 시간 동안 내내 병간호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사이 자신에겐 수많은 미래 예지들이 나타났고, 그것들은 자신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명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하준은 그것들을 빠르게 실행해 나갈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