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사전에 예고돼 있지 않던 추가 증인 신청.
민정훈의 얘기에 피고 측 변호인이 곧바로 반박을 해왔다.
“이의 있습니다, 재판장님! 사전에 신청돼 있지 않던 증인 요청입니다. 당장 기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원칙대로라면 재판 변론기일 이전에 미리 증인 신청과 더불어 주 신문 사항들을 제출해야만 했던 상황.
민정훈 또한 그걸 모르지 않기에 하루 전 결정된 이 사항을 판사에게 요청하려 했었다.
하지만, 판사실 앞까지 갔던 민정훈은 결국 그 생각을 고쳐 먹기로 했다.
오늘 출석하기로 되어 있는 증인은 이 사건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릴 만한 인물이었고, 만일 피고 측에서 그 증인의 존재를 사전에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을 벌일지는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이미 오래전 그들은 그와 같은 짓을 저지른 전력이 있는 상태였기에 더더욱.
물론 이러한 선택엔 분명한 리스크가 존재했다.
지금처럼 피고 측에서 이의를 제기할 건 너무나도 자명했던 사실.
피고 측의 의견을 받아들여 재판장이 기각시켜 버린다면 오늘의 공판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돼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민정훈은 이 결정에 모든 걸 걸 수밖에 없었다.
이 재판, 그리고 지금 저 피고 측에 앉아 있는 여섯의 범죄자들을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하기 위해선 이것만이 필승 전략이었으니까.
피고 측 변호인의 이의 제기에 민정훈도 곧바로 재판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재판장님. 물론 해당 증인의 출석 결정이 늦게 정해진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증인의 신변 보호를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재판장님의 직권으로 출석을 허락해 주시길 간곡히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신변 보호라는 건 정확히 어떤 걸 얘기하는 거죠?”
“해당 증인은 이미 오래전 피고들로부터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식물인간의 상태로 살아왔기에 이 자리에 서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됐고 혹시나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사전에 공개하지 않는 게 옳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민정훈의 얘기에 증인석에 앉아 있던 구명호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구명호만큼은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을 짐작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얘기들일 수밖엔 없었고.
재판장을 향해 말을 내뱉은 민정훈이 잠시 피고 측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른 다섯에 비해 유독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쯤 되면 증언대에 세우려고 하는 이가 누군지 그도 어느 정돈 짐작하고 있을 것.
민정훈은 다시 재판장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재판장님. 본 원고는 이 사건이 지금까지의 수사 방향과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걸 불과 하루 전에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단순한 불법 행위들에 대한 것을 넘어 살인 혹은 살인 미수의 아주 중차대한 범죄입니다. 부디 이 사건의 결정적인 영향이 될 증인의 출석을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담당 검사이자 본 사건의 원고인 민정훈의 간곡한 요청에 재판장의 얼굴 위로도 깊은 고뇌가 떠올랐다.
분명 원칙엔 부합하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살인이란 단어까지 내뱉어진 만큼 결코 가볍게 여길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수사 검사인 그가 공판에까지 직접 나섰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재판장이 입을 열었다.
“본래의 원칙대로라면 사전에 증인 신청과 더불어 모든 증거 제출을 끝내야만 합니다. 다만 조금 전 원고가 언급한 것처럼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상황이 존재했다면 본 재판장은 이를 허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재판장은 곧바로 민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원고. 만일 증인의 증언을 들어보고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판단이 들면 그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예. 책임지겠습니다. 어떠한 불이익도 감수하겠습니다.”
민정훈의 단호한 대답에 재판장도 고갤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증인 신문 진행해 주세요.”
재판장의 허락과 동시에 민정훈의 시선이 방청석 뒤쪽으로 향했다.
그러곤 누군가에게 사인을 보낸 뒤 법정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런데.
‘하준이……?’
아직 증인석에 앉아 있던 구명호가 긴장된 마음으로 문을 바라보고 있던 때, 그가 떠올리던 인물과는 전혀 다른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하준.
재판장 역시 다소 의아하단 얼굴빛을 보인 채 증언대에 선 하준을 바라봤다.
“음. 우선 증인, 앞에 놓인 선서서 낭독 후 서명 날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준이 증인 선서와 함께 날인까지 끝마치자 재판장이 곧바로 물었다.
“원고. 원고가 얘기했던 증인이 맞습니까? 증인의 나이를 추정해 봤을 때 조금 전 원고가 얘기했던 것과는 다소 배치가 되는 것 같은데요.”
“네, 맞습니다 재판장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본 증인은 해당 사건 피해자의 유일한 혈육입니다. 이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기에 출석을 요청한 바입니다.”
“흠, 알겠습니다. 신문 진행해 주세요.”
민정훈은 그 어떤 재판들보다도 진지한 태도로 증언대 앞에 섰다.
그러곤 그곳에 앉아 있는 하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증인. 증인은 20년 전 활동했던 이수연이라는 배우를 아나요?”
“네,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죠?”
“제 모친입니다. 본명은 이수연이 아닌 이정화입니다.”
“그렇군요.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 영화의 주연까지 맡았던 경험이 있던데, 웬일인지 그 영화를 끝으로 일체의 활동이 없더군요. 혹시 그 이유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민정훈의 물음에 하준은 대답 대신 피고 측으로 잠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곤 그들을 짧게 훑은 뒤 다시 민정훈을 바라봤다.
“그 영화를 끝으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하준의 얘기에 방청석이 잠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민정훈은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질문을 이어갔다.
“사인이 무엇이었나요? 평소 모친에게 기저질환이 있었다거나 혹은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던 게 있었나요?”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제 모친의 사망 원인은 병이 아닌 타살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해당 발언에 조금 전보다 더 큰 술렁임이 일기 시작했다.
재판장은 곧바로 방청석을 제지했다.
“원활한 재판을 위해 모두 정숙해 주시길 바랍니다.”
민정훈은 흐름을 잃지 않은 채 신문을 이어갔다.
“방금 타살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조금 전 증인의 말을 뒷받침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있나요?”
민정훈의 물음에 하준은 대답 대신 낮게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품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민정훈에게 건넸다.
“이게 그 증거입니다. 당시 현장의 상황이 모두 담겨 있고, 이 녹취록을 듣고 나면 제 모친이 누구에 의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던 건지 모두 아시게 될 겁니다.”
하준의 발언에 피고 측 변호인이 또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나 이의 제기의 태세를 보여왔다.
그러자 재판장이 곧바로 한 손을 들어 올리며 그의 발언을 제지해 왔다.
“이것 또한 사전에 제출되지 않았던 증거물이지만 역시나 재판장의 권한으로 허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출해 주세요.”
이곳 법정의 최고 권한을 부여받은 이가 바로 재판장이었기에 피고 측 변호인은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여기서 더 이의 제기를 한다는 건 재판 결과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민정훈은 하준에게 건네받은 증거 물품을 서기에게 제출했다.
해당 증거물은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 하나와 작은 크기의 USB.
민정훈은 하준에게 다시 질문했다.
“조금 전 제출한 증거물에 당시의 상황이 모두 담겨 있다고 했는데. 해당 증거물을 이제야 공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다른 사람도 아닌 모친의 죽음에 관련된 물품을 그 긴 시간 숨겨올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지난 20년이란 시간 동안 그 물건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던 그 테이프 속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테이프를 듣게 되었고 그제야 그때의 정황을 알 수 있게 된 거다, 이렇게 보면 되는 건가요?”
민정훈의 물음에 하준은 고갤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 테이프 속엔 각종 고전 영화의 음악들이 담겨 있었고 저 또한 수없이 그것들을 들으며 지금껏 그렇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테이프의 끝자락에 그런 내용들이 담겨 있다는 걸 들은 뒤에야 알게 된 것입니다.”
“흠, 들었다라. 정확히 누구에게 그 사실을 들었다는 거죠?”
민정훈이 묻자, 하준의 시선이 재판장 앞에 있는 서기에게 옮겨졌다.
조금 전 민정훈이 건넨 증거 물품을 가리키며 하준이 입술을 뗐다.
“제가 검사님께 건넸던 두 번째 증거 물품. 그 USB 안에 그분의 모든 증언들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에 겪었던 모든 것들을 포함해 그날 그 일을 저지른 가해자의 실명까지도. 오늘은 부득이하게 이곳에 설 수 없었지만, 앞으로도 수사에 필요한 일이라면 적극 협조하겠다는 말을 전해오셨습니다.”
하준의 얘기에 표정부터 어투까지, 민정훈이 일순 다른 분위기를 꾸며냈다.
“잠시만요. 지금 그 얘기는 당시의 피해자가 직접 증언을 해왔다는 뜻인가요? 그 말은 증인의 모친 이수연 씨가 사망한 게 아니라 아직 살아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요?”
민정훈의 질문 뒤로 재판장 안으론 무거운 적막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 공판이 시작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되는 듯싶던 재판은 지금 이 두 번째 증인의 발언 이후로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판장 내 모든 시선이 하준 한 사람에게로 쏠려 있었고, 잠시간 흐르던 침묵을 깨곤 하준이 낮게 고갤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저를 포함해 모두가 사망한 줄만 알았던 제 어머니 이정화. 저 USB 안엔 그분이 직접 증언한 모든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말을 마치곤 자신의 옆 증인석에 앉아 있는 구명호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하준.
그러곤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누군가의 지극적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