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점심시간을 앞두고 멤버들이 미팅 룸으로 모여들었다.
잠시 후 이슬아와 정진웅도 도착했고, 김지혜가 들어와 메뉴를 물어왔다.
“다들 먹고 싶은 거 얘기해 주세요!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뭐?”
배달 앱을 스크롤하며 묻는 김지혜의 얘기에도 불구하고 멤버들은 의욕 없는 목소리를 내왔다.
“전 아무거나요. 다들 드시는 걸로.”
“저도 이준이 형이랑 같은 걸로요…….”
“난 강준이랑 같은 거.”
“……전 뭐 그냥 옆에서 형들이랑 누나들 먹는 거 구경할게요. 별로 배도 안 고픈데.”
“휴. 그럼 전 그 옆에서 같이 구경할게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도미노처럼 연달아 말을 내뱉어오는 멤버들.
표정과 어투, 느껴지는 분위기들이 모두 다 비슷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었다.
“이것들이 진짜. 오늘도 또 그러네! 너네 계속 이럴 거야? 곧 컴백해야 되는데 계속 그렇게 의욕 없이 있을 거냐고. 대표님한테 확 일러 버린다?!”
김지혜의 겁박에 멤버들이 일순 눈빛을 빛내왔다.
“어? 그래주시면 안 돼요 누나? 우리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고, 이대로는 도저히 컴백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대표님한테 말씀 좀 해주시면 안 돼요?”
“어어, 맞아, 맞아. 저희 실력도 실력인데 태도도 너무 불량하다고 정신교육 좀 제대로 해야 할 것 같다고 해주세요, 누나!”
“이대로 가다간 분명 대형 사고 칠 게 확실하다고, 매를 들어서라도 버릇들을 확 고쳐놔야 한다구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김지혜의 얼굴이 일순 멍해졌다.
멤버들은 더욱더 열성적으로 행동까지 취해 보였다.
“동영상! 저희 연습하는 거나 막 태도 불량한 것들 동영상으로 찍어서 대표님한테 보내는 건 어때요? 백번 얘기하는 것보단 한번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드리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연습실 가서 찍어볼까? 다들 안무 막 다 틀리고 할 수 있지?”
“그럼요! 누워서 침 뱉기죠!”
금방이라도 미팅룸을 튀어나갈 것 같은 멤버들의 모습에 김지혜가 황급히 만류했다.
그러곤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휴…… 너희가 왜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그런다고 대표님이 당장에 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잖아. 이렇게까 지 오래 자리를 비우시는 거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건데.”
“…….”
“그리고 지호. 누워서 침 뱉기가 아니라 누워서 죽 먹기야.”
“누나, 누워서 떡 먹기요.”
정진웅의 지적에 김지혜는 민망한 듯 입을 쩝쩝거렸다.
멤버들은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저희 이제 컴백 날짜까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대표님이 안 계시니까 계속 불안한 기분이에요. 지금까지 이랬던 적이 없어서…….”
“이러다 컴백하는 날까지도 안 오시면 어떡하죠……? 벌써 두 달째 얼굴을 못 뵙고 있는데.”
멤버들뿐만 아니라 김지혜 또한 하준을 못 본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상황.
업무 보고 등의 이유로 매일 한두 번씩은 통화를 주고받고 있었기에 회사 운영면에서는 큰 문제가 발생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눈앞의 광경처럼 날이 갈수록 침울한 분위기는 점점 더 심해져 가고만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여기 있는 모두가 지금껏 하준 한 사람에게만 의지하고 믿고 따라왔던 이들이기 때문에.
하늘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 누나. 혹시 대표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건 아니죠? 안 좋은 일 같은 거라든지…….”
“나도 자세한 것까지는 몰라. 그냥 좀 오래 자릴 비워야 할 것 같으니까 그때까지 잘하고 있으란 말만 하셨거든. 특히 너희 잘 부탁한다고 하셨고.”
“형은요? 형도 전혀 모르세요?”
정진웅도 고갤 짧게 주억거렸다.
“응. 나도 지혜 누나랑 별반 다를 거 없지. 너희랑 슬아 잘 챙기란 말씀 외엔 없으셨거든. 이번에 슬아 영화 들어가는 것도 보고 올려서 알고는 계시고.”
줄곧 말이 없던 이슬아도 이번엔 입술을 떼고 낮게 말문을 열어왔다.
“오디션 붙은 거 대표님한테 제일 먼저 자랑하고 싶었는데…… 감독님이 연기 잘한다고, 나중에 큰 배우 될 것 같다고 칭찬해 주신 것도 아직 말씀 못 드렸는데…….”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배역을 오디션으로 뽑을 만큼 까다롭기로 소문난 장준명 감독.
행운이 따라줬을까. 연기 경력이 얼마 되지 않아 합격보단 경험에 의의를 두고 본 오디션임에도 이슬아는 덜컥 붙어버리고야 말았다.
심지어 장준명 감독의 입으로 직접 좋은 배우가 될 것 같다는 엄청난 칭찬까지 들으며.
물론 주조연급의 대단한 배역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대사가 포함된 배역이었기에 이슬아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합격 통보를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하준에게 꼭 이 소식을 직접 전하고 싶었고.
하지만, 그 뒤로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를 직접 마주할 수 있는 상황은 주어지질 않고 있었다.
“근데, 슬아야. 너 영화 찍는 곳엔 별문제 없어? 요즘 막 다 난리잖아.”
은호의 물음에 이슬아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 원래 예정돼 있던 크랭크인 날짜보단 미뤄지긴 했는데 뭐 때문인지는. 그렇다고 어디에 물어볼 수도 없고.”
“하긴. 워낙 조심스러운 문제니까. 휴, 암튼 너 쪽엔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요즘 눈만 떴다 하면 죄다 사건 사고라 이런 시기에 컴백하는 게 맞나 싶고 그래, 우리도.”
“맞아요. 그래서 더 대표님이 생각나고 그러는 것 같아요.”
최근 잇따라 연예계에 터지고 있는 사건 사고들.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톱스타들을 포함해 방송 및 엔터계 관계자들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연달아 터져 나온 충격적인 소식들은 연예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성접대 및 스폰, 주가 조작 및 불법 시세 차익, 각종 불륜과 성매매 관련 등.
평소 연예계에서 벌어지던 일들과는 아예 스케일 자체가 다른 사건들에 모두가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엔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연예계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었다.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 발표와 함께 정치인들을 비롯한 대기업 회장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숱한 인물들까지 줄줄이 소환 조사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그들 대부분의 혐의가 모두 사실로 판명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모든 시점은, 공교롭게도 하준이 자릴 비운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자자, 다들 괜히 우울한 생각에만 빠져 있지 말고. 우린 우리의 일을 잘하고 있자고! 그래야 나중에 대표님이 오셔도 잘했다고 뿌듯해하시지! 안 그래?”
분위기를 상기시키려는 김지혜의 얘기에 정진웅도 말을 보태왔다.
“그래. 대표님껜 너희 소식도 매일 전달하고 있으니까 아무 생각 말고 컴백 준비만 신경 쓰자. 대표님이 없어도 잘 해낸다는 걸 보여줘야 그게 진짜 대표님한테 보답하는 길이지. 너희 맨날 그랬잖아? 대표님한테 진 빚 꼭 갚고 싶다고.”
두 사람의 얘기에 멤버들도 받아들이는 듯 낮게 고개들을 주억 거려왔다.
그 사이로 김지혜와 정진웅은 잠시 눈을 마주했다.
말은 이렇게 하고 있어도 두 사람 모두 근심이 없을 순 없었다.
하준이 무엇 때문에 자릴 비운 건지, 그리고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 될지.
그들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대표님 정말 괜찮으신 걸까…….’
* * *
평창동의 구명호 집.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는 거실 사이로 구세희와 최 비서가 마주하고 있었다.
곳곳에 쌓여 있는 짐들을 보며 최 비서가 물었다.
“당분간은 여기 들어와 산다고?”
“네. 이 넓은 집을 오래 비워두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저라도 살고 있어야 나중에 아빠가 다시 오셨을 때 사람 살던 냄새라도 나죠. 이렇게 한기만 느껴지는 게 아니라.”
그간 심한 맘고생을 했을 구세희의 얼굴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구명호가 구속 수사로 전환된 후, 변호인단을 포함한 재판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직접 챙기며 온 신경을 다 쏟아붓고 있는 그녀였다.
어떻게 해서든 부친의 형량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해서.
구세희가 최 비서에게 물었다.
“아빠는 좀 어떠세요? 건강은 괜찮아 보이셨어요?”
“응. 걱정했던 것보단 얼굴이 편해 보이셨어. 건강도 괜찮으시다고 하고. 모처럼 일 걱정 안 하고 쉴 수 있어서 아주 좋다고 하시더라고.”
“…….”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쏟아붓고 있음에도 여태껏 접견 한 번을 가지 못했던 구세희.
수용복을 입고 있는 부친의 모습을 마주하면 참고 있던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아 차마 그러질 못하고 있었다.
어두운 낯빛의 구세희를 바라보며 최 비서가 말을 꺼내왔다.
“아직 회장님껜 말씀을 못 드렸어. 그놈들 혐의를 완전히 입증해 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거. 재판 일주일 남은 상황에서 그 사실을 아시면 내내 괴로워하실 게 뻔하니.”
“……잘하셨어요. 지금은 모르고 계시는 게 더 나으니까.”
류민우를 포함한 그들 6인에 대한 재판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구명호의 고발로 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이뤄지긴 했지만, 막상 열어보니 중차대한 범죄의 혐의들은 입증시키기가 어려웠다.
즉, 여러 혐의들로 처벌을 받게 할 순 있어도 고작 몇 년짜리의 실형밖엔 되지 않을 거라는 것.
그마저도 그들이 지금껏 끼쳐온 영향력들을 고려하면 확실히 장담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하는 게 구명호의 목적이자 바람이었기에 구세희는 마음이 무거울 수밖엔 없던 것이었다.
최 비서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기에 긴 숨을 섞어 말을 꺼내왔다.
“너무 자책하지는 말았으면 좋겠구나, 세희야. 회장님도 충분히 인지하고 계실 거야. 그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받게 하려면 그때의 일을 증명시켜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그때의 일.
20년 전 하준의 모친에게 벌어졌던 일들을 의미했고, 그걸 입증시키기만 한다면 그들의 형량은 훨씬 더 커질 수밖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 비서의 말처럼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사건을 입증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하준의 모친이 직접 증언대에 서는 것 외엔 없으니까.
무겁고 참담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구세희는 하준을 떠올렸다.
‘하준아…… 이럴 땐 어떡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