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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스타 메이커-144화 (145/165)

144화

하준이 떠난 취조실에 홀로 남은 구명호.

적막감으로 가득 찬 그곳에서 구명호는 20년 전의 그날을 떠올렸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하준을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정화의 집으로 향했던 구명호.

하준이 최 비서를 따라 잠시 자릴 비운 사이, 그는 그녀를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건 그녀의 직업을 숨기기 위해 늘상 해오던 방식이었고, 그날도 문 앞에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분명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통화를 주고받았던 그녀는 웬일인지 아무런 대답도 해오질 않았고, 불길한 기운에 휩싸인 구명호는 곧바로 문을 열어젖히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명호를 기다리고 있던 광경은 20년 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을 만큼 충격 그 자체였다.

팔목 위로 깊게 패인 상처와 그 주변으로 퍼져 있던 붉은색 선혈들.

구명호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그녀를 업곤 병원으로 데려갔다.

불행이었을까, 다행이었을까.

과다 출혈로 인한 심각한 뇌 손상이 발생하긴 했지만 그나마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었다.

만약 구명호가 출발 전 그녀와 통화를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조금만 더 늦게 발견하게 됐다면.

아마 그녀는 그때 이미 더 이상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게 됐을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은 이정화의 의식 상태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그 시간 동안 구명호는 사태를 파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날 쓰러진 이정화의 옆에 남겨진 몇 장의 유서, 그리고 면도날과 함께 깊이 패인 팔목의 상처까지.

분명 정황만 놓고 보면 그녀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구명호만큼은 믿지 않았다.

절대 그녀는 하준을 놔두고 그런 선택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이유도 없었기에.

무엇보다, 그녀가 남겼다는 유서의 내용만으로도 모든 게 조작됐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기도 했고.

그렇게 상황을 파악해 가던 구명호는 그녀의 집에서 우연히 일기장 하나를 발견하게 됐다.

그 일기장 속엔 그녀가 겪어온 모든 심리 상태가 서술돼 있었고, 그토록 가깝게 지내온 자신 또한 전혀 모르고 있던 일들까지 세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구명호는 그제야 모든 걸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의 죽음엔 ‘그들’이 개입돼 있다는 것을.

“회장님.”

지난날의 상념에 빠져 있던 때, 취조실의 문이 열리며 민정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명호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가 복잡한 얼굴 표정을 지어왔다.

“유 대표님은 조금 전에 가셨습니다. 두 분 얘기는 잘 하셨을까요?”

“허허, 글쎄요. 내가 해줘야 할 얘기들은 모두 다 전한 것 같은데 그 녀석이 괜찮을지 그게 좀 걱정이 되네요.”

옅게 웃어 보이곤 있어도 그의 웃음이 조금도 밝게 느껴지질 않고 있었다.

민정훈은 자신의 앞에 놓인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가리키며 입술을 뗐다.

“두 분의 상황을 모르는 제 입장에선 유 대표님보다 회장님이 더 걱정될 수밖엔 없습니다. 두 분 얘기하시는 동안 밖에서 자료들을 훑어봤는데 도저히 판단이 서질 않더군요.”

구명호가 이곳 검찰청에 들어오며 함께 동봉해 온 자료들.

그것의 세세한 내용들까지 모두 확인을 끝마친 건 아니었지만, 짧게 훑는 것만으로도 민정훈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찰 수밖에 없었다.

그곳엔 정, 재계 인사들은 물론 청와대 고위 관직까지. 숱한 뇌물 수수 정황을 포함해 온갖 불법 범죄 혐의들의 증거가 담겨 있었고, 그건 단순히 누군가를 수사하고 처벌하는 정도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만약 그 수사를 시작하게 된다면, 그건 곧 대한민국 전체가 뒤집어지는 일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얼굴 위로 묻어나 있는 민정훈을 바라보며 구명호가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 있겠습니까. 검사님은 지금껏 해오던 대로만 하시면 되지요. 여기 이렇게 피의자도 있겠다, 차고 넘치는 증거들도 확보했겠다, 허허. 이보다 더 쉬운 수사가 또 있겠어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거 회장님도 아시잖습니까. 제가 검사 생활을 해오는 동안 이런 규모의 사건은 접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이게 과연 저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사건인지 그것부터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자신과는 달리 줄곧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구명호를 바라보며 민정훈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면 회장님부터가 모든 걸 다 잃게 되시는 겁니다. 직접 밑바닥부터 손수 일궈온 회사인 걸로 아는데, 그것들은 다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구명호와는 이렇다 할 일면식조차 없었던 민정훈.

그렇기에 굳이 이런 말까지 꺼내가며 그를 만류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이렇게 그가 계속 말을 내뱉어오는 건 그 스스로도 이 사건을 터뜨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판단이 쉬이 서질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정훈의 얘기에도 불구하고 구명호의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어차피 빈손으로 시작했던 일, 다시 빈손이 된다 한들 그게 뭐 그리 큰일이겠습니까. 죽고 나면 모두가 다 그리되는 것을.”

말을 내뱉곤 구명호가 민정훈의 두 눈을 마주했다.

이미 모든 결심을 끝마친 이상, 더 이상 지체할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이전과는 달라진 어투로 구명호가 민정훈을 불렀다.

“검사님.”

“네, 회장님.”

“검사님이 하지 못하는 일이라면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일 겁니다. 그럼 이 나라는 점점 더 썩어갈 거고, 그들의 희생양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겠죠. 나중엔 아예 손 써볼 수도 없을 정도로.”

“…….”

“그러니 그 어떤 방해 공작이 있더라도 끝까지 싸워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 말과 함께 민정훈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오는 구명호.

그러곤 흔들리는 민정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덧붙여왔다.

“부디 한 여자의 억울한 한이 남김없이 없어지도록.”

* * *

“이렇게 보호자가 갑자기 바뀌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회장님껜 미리 연락을 받았어요, 이제부턴 아드님이 오게 될 거라고.”

하준을 병실 문앞까지 안내해 준 간호원.

그곳은 특별 병실로 분류돼 오직 1인만이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

차트에 몇 가지 사인을 요청하곤 그녀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고, 하준은 제자리에 선 채 문앞에 적힌 이름 세 글자를 바라봤다.

김진희.

존재를 숨기기 위한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걸까.

구명호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결코 거짓이 아닐 것을 알면서도, 하준은 이곳에 선 순간까지도 좀처럼 믿어지질 않고 있었다.

지난 20년간 단 한순간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결단코 실감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

그런데, 왜일까.

쉽사리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이 문만 열면, 한 걸음만 내디디면 그토록 그리워했던 엄마가 있음에도 쉬이 행동이 취해지질 않았다.

미래 예지로 보았던 중년 여자의 모습.

만약 그 모습이 정말 엄마의 모습이었다면 자신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걸까.

그 긴 시간 동안 그녀를 홀로 외롭게 만든 미안함은 감당해 내기가 어려웠다.

드르륵.

잠시 후, 천천히 문을 밀고 병실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하준.

그곳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린 한 중년의 여자가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준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

그녀를 마주한 순간 심장이 걷잡을 수 없도록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피부도, 생김새도 모두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지만 분명 자신의 모친 이정화가 틀림없었다.

정말로 이렇게 살아서 한 하늘 아래 함께 숨 쉬고 있었다니.

직접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하준은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아까와는 다른 간호사 한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서 있는 하준을 발견하곤 살짝 눈동자를 키우더니 입을 열어왔다.

“아, 보호자분이 바뀌셨나 보네요. 환자분 링거 교체할 시간이라.”

고갤 숙이곤 하준을 지나 링거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그녀.

모친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며 링거를 교체하는 그녀를 보곤 하준이 낮게 물었다.

“지금 환자 상태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가요.”

하준이 묻자 그녀가 조금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답을 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왔다.

“아, 음. 의식이나 운동성은 없지만 호흡과 순환은 유지되는 상태세요. 어, 그러니까 살아 있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이신 거죠.”

“뇌사 상태라는 뜻일까요.”

“아, 아뇨. 엄연히 달라요. 뇌사는 생명 유지 기능, 운동 기능, 그리고 인지기능과 의식까지 모두 다 사라져 버린 상태를 뜻하는데, 그런 경우엔 사망 상태까지 고려해볼 수 있을만큼 심각한 거죠.”

그녀가 이정화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덧붙였다.

“그런데 환자분의 경우엔 그렇지는 않아요. 말 그대로 의식이 없는 상태이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거나 하진 않거든요. 희박하긴 하지만 의식이 회복될 가능성도 아예 없진 않고요.”

그녀의 정확한 상태까진 전해 듣지 못하고 온 탓에 하준은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들이었다.

심각한 얼굴의 하준을 바라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혹시 환자분과의 관계가……?”

“아들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항상 아버님이 오셔서 자녀분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환자분은 저희 원장님도 특별히 신경 쓰시는 분이라 저희가 극진히 돌보고 있으니까. 분명 의식을 회복하시는 날이 올 거예요.”

위로가 담긴 말을 전하곤 다시 하던 일을 이어가는 그녀.

잠시 뒤, 하준에게 인사를 건네곤 다시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비로소 모친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온전히 바라보는 하준.

조금 전 간호사가 건네온 말처럼 부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럼 자신이 이렇게 잘 자랐다고, 다 커서 옆을 지키고 있었다고 얘기해줄 수 있을 텐데.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하준은 한참이 지나도록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오롯이 그녀의 옆을 지키는 것 외엔 아무런 생각도 들고 있지가 않았다.

그리고 하준이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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