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지난 밤, 하준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구세희가 꺼내 온 얘기들을 수도 없이 곱씹었다.
자신의 모친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녀의 그런 죽음 뒤엔 ‘제너럴’이라는 존재들이 있었다는 것.
지난 20년간 단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는 사실들에 하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무엇보다, 그 얘길 꺼내온 이가 다름 아닌 구세희였기에 더더욱.
“나중에. 지금 하지 못하는 얘기들은 나중에 꼭 얘기해줄게.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입으로 직접.
그 말을 내뱉을 때의 구세희는 평소 자신이 알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더 큰 무언가를 알고 있으며, 지금은 그 얘길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듯.
대체 그녀는 어떻게 그 사실들을 알게 된 걸까.
그리고, 만약 그 엄청난 얘기들이 모두 진실이라면 왜 자신은 여태껏 그걸 모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까.
분명 믿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얘기들임엔 분명했지만 최근 그녀가 보였던 태도들을 생각하면 맞아떨어지는 구석도 존재했다.
제너럴이라는 위험한 존재들을 상대하기 위해 그런 무모한 일들을 벌이고 있었으니.
만약 자신이 미래 예지를 통해 파악하지 못했다면 분명 끝까지 가고야 말았을 거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억눌러가며 밤새 곱씹은 하준이 아침이 돼서야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박성환을 만나야겠다는 것.
20년 전 이수연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이가 그였고, 그녀의 모습을 가장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 또한 그일 수밖엔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이미 오래전 미래 예지를 통해 그와의 만남은 예견된 거나 마찬가지이기도 했고.
투명 플라스틱판을 사이에 두고 하준을 마주하고 있는 박성환.
조금 전 하준이 꺼낸 얘기에 그의 표정이 일순 바뀌었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립니까. 수연이를 죽게 한 자들이라니. 교통사고 가해자를 말하는 겁니까?”
바로 어제까지 하준이 알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박성환 또한 그녀의 죽음에 대해 전혀 다르게 알고 있을 터.
하준 또한 그걸 몰라서 찾아온 게 아니었다.
“혹시 제너럴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잠시 미간이 깊어지던 박성환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요. 그게 뭐죠?”
“들어본 적은 없어도 아마 그들을 직접 마주했던 적은 있으실 겁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꽤 여러 차례.”
“…….”
이건 추측이 아닌 강한 확신이었다.
모친이 남긴 유서 속엔 간접적으로나마 당시 힘들었던 상황들이 적혀 있었고, 그녀가 신인 배우였단 점을 고려하면 분명 혼자서 견뎌내야만 했던 어떠한 상황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옆에서 지켜보고 케어했을 박성환은 반드시 알고 있었을 거고.
비록 그들이 어떤 존재들인지까진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어머니가 남긴 유서 속엔 어떤 일들로 많이 힘들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배우라는 직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좋아했던 분인 걸 감안하면 그것과는 별개의 일이었을 것 같은데. 혹시 짐작 가는 게 없을까요.”
그와의 지난날의 일들은 잠시 묻어두고, 하준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 물었다.
당시엔 자신의 모친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여겼고, 그 배경엔 박성환이 반드시 영향을 끼쳤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돌고 돌아 이제야 완전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 지금. 하준은 그 어떤 것보다도 그의 증언이 필요했다.
당시의 모친, 아니, 이수연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지.
하준의 얘기에 기억을 상기시키려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박성환.
그러다 급격히 얼굴빛이 심각해지더니 대답 대신 질문을 꺼내왔다.
“잠깐…… 그럼 수연이가 교통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는 겁니까? 그놈들이 수연이를 그렇게 만들었다 이 말이에요?”
무언의 긍정을 표하는 하준의 모습에 박성환은 무척이나 충격받은 듯 시선이 허공에 머물렀다.
“아니…… 대체 왜. 수연이를 스타로 만들어주겠다고 그렇게나 호언장담하던 사람들이…….”
역시나 분명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는 듯 보이는 박성환.
하준은 그를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조금이라도 짐작 가는 게 있으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당시에 왜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그 사람들이 어머니께 무슨 짓을 했는지.”
하준이 물어오는 동안에도 박성환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표정이 좀처럼 돌아오질 않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타이머의 시간은 절반을 넘어가고 있었고, 하준은 그가 어떤 얘기라도 해오길 기다리는 수밖엔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박성환이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하준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고 보니 수연이가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느냐고, 알고선 계속 그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거냐고요.”
“…….”
“그땐 어떻게든 수연이를 띄워야겠단 생각밖에 없어서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고만 했는데. 설마 그게…….”
충격과 황망함이 한데 섞여 있는 박성환의 얼굴.
지금과는 달리, 20년 전의 그는 여느 매니저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처음으로 담당했던 이수연에게 그 누구보다도 큰 애정과 욕심이 있었을 거고.
비록 그 방식엔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진심을 다했던 그녀였기에 지금의 사실들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엔 없을 거였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그가 고갤 들곤 남은 타이머의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곤 하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놈들이 정확히 어떤 짓을 어떻게 했는진 모르겠지만 시간이 얼마 없으니 내가 기억하는 것들은 빠짐없이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20년 전의 기억이라도.”
* * *
짧았던 십 분의 접견 시간이 지나고 다시 차량으로 돌아온 하준.
시동을 켜야겠단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깊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예상했듯 박성환 또한 그들에 대해 기억하는 바가 많진 않았다.
누군가의 소개로 그들을 알게 됐고, 그 자리에 이수연을 데려갔던 게 그들과의 첫 만남이었다고.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진 몰라도 연예계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들이란 걸 알았고, 박성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그들과 교류를 이어갔다고 했다.
그렇게 이수연에 대한 물질적 스폰이 시작됐고 얼마 뒤 그녀는 생에 첫 주연작까지 맡게 됐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는 그들로부터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단 뜻을 전해왔고, 그 관계를 계속 이어가다간 분명 안 좋은 끝을 보게 될 것 같다고 했다 한다.
그들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존재들일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박성환이 해준 얘기는 여기까지였지만, 하준은 그 순간 모든 걸 확신하게 됐다.
모친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이 그들이었다는 구세희의 말이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음을.
덧붙여, 그들이 모친을 그렇게 한 이유까지도.
‘남은 다섯.’
류민우를 제외하고 이제 남은 것은 다섯.
모든 진실을 마주하게 된 이상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모든 걸 다 걸어서라도 그들을 완전히 파멸시켜 버려야만 할 것이기에.
하준은 시동을 켜고 휴대폰을 꺼냈다.
현재로서 그들에게 가장 빠르고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최윤섭뿐.
류민우 때처럼 미래 예지가 나타나준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마냥 그것만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다.
이 이상의 이성적인 침착함도, 감정을 참아낼 인내심은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런데 그때.
지잉-
들고 있던 휴대폰의 진동이 일기 시작하더니, 액정화면 위로 민정훈의 이름이 떠올랐다.
통화를 연결하자 민정훈이 곧바로 말을 꺼내왔다.
-대표님. 혹시 지금 바쁘신가요?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만.”
-그럼 혹시 잠깐 검찰청으로 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민정훈의 목소리가 다소 진지하게 느껴졌다.
류민우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혹시 뭔가가 나오기라도 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구금 시간 내에 답을 얻지 못할 것 같아 참고인의 증언 같은 게 필요하기라도 한 걸까.
하준은 차량을 출발시킬 준비를 하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런데, 민정훈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내뱉어진 건 바로 그때였다.
* * *
“유 대표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12층 복도로 들어서자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던 민정훈이 하준을 불러왔다.
하준이 그에게 다가가 곧바로 물었다.
“회장님이 취조실에 계신다는 게 무슨 얘긴가요. 회장님이 왜.”
다른 곳도 아닌 검찰청 취조실에 구명호가 있다는 얘길 듣곤 하준은 황급히 차를 몰아 이곳에 왔다.
평생 이런 곳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그였기에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고 있었다.
대체 왜 그가 여기에.
하준의 물음에 민정훈도 긴 한숨을 내뱉곤 얼굴을 쓸어 내렸다.
여러 가지의 감정이 교차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하준의 불안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내막부터 말씀드리자면 저희가 소환하거나 한 게 아니라 본인의 의지로 직접 오셨습니다. 변호사도 대동하지 않은 상태로요.”
“……직접 오셨다고요? 어떤 이유로.”
“그게, 그러니까…….”
민정훈이 입술을 잠시 깨물어 보이곤 답을 해왔다.
“제너럴이요. 그자들에 대한 신상 정보부터 해서 그간 저질러온 불법 범죄들에 대한 증거 자료들을 모두 제출하겠다고 오셨어요. 심지어 그들과 엮여 있는 인물들이 누군지도 모두 다 포함된 자료라고.”
“그게 무슨.”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체 그것들을 구명호가 어떻게 가지고 있다는 건지. 게다가, 지금 그 사건을 파헤치고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있었고.
구세희의 성격상 절대 그에게 알리진 않았을 텐데.
심각해진 하준의 표정을 바라보던 민정훈이 취조실 방향을 힐긋하곤 말했다.
“우선 내용의 신빙성이 있는지부터 따져볼 예정입니다. 제출한 자료들을 잠깐 확인해 봤는데 사건의 크기가 커도 너무 큰일이라.”
“…….”
“만약 충분히 신빙성 있는 증거란 판단이 들면 수사에 총력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놈들뿐만 아니라 거기에 엮여 있는 인물들도 줄줄이 다 소환하게 될 거고요.”
불과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어떻게 파멸시킬지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던 하준.
자신의 모든 걸 다 걸어서라도,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끝끝내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갑자기 무상해져 버린 상황이었다.
그것도 구명호가 직접 제출했다는 그 알 수 없는 자료들로 인해.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구명호를 직접 만나 봐야겠단 생각에 취조실을 바라보고 있던 때, 민정훈이 낮게 말을 던져왔다.
“그런데 그러려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대표님.”
꽤나 심각한 어투와 함께 얼굴빛이 급격히 어두워진 민정훈.
하준의 두 눈을 마주하며 그가 말을 이어왔다.
“수사가 시작되고 나면 회장님께서도 실형을 면치 못하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