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영신 G&M 회장실.
조금 전 최 비서로부터 그간의 일들을 보고받은 구명호는 일순 표정이 차게 굳어버렸다.
구명호가 최 비서를 향해 격앙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지금 세희가 그놈들에 대해 전부 다 알고 있단 얘기야?!”
“죄송합니다, 회장님. 세희가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알려주지 않으면 더 위험한 방법을 쓰게 될까 봐.”
눈동자까지 흔들리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구명호를 향해 최 비서가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아는 건진 모르겠지만 세희가 이미 그때의 일을 꽤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그분이 살아 있다는 것까지도…….”
“…….”
줄곧 우려했던 일이 기어코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날 밤 세희에게 그 일을 터놓으면서도 그렇게나 신신당부했건만.
지난 20년간 하준을 보호하기 위해 숨겨왔던 일들이 도리어 이젠 자신의 딸마저도 위험에 놓이게 만든 것이다.
구명호는 곧바로 최 비서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젯밤 그들 중에 한 놈이 검찰에 잡혔다는 건가? 세희랑 하준이도 그 자리에 있었던 거고?”
“예, 회장님. 혹시나 싶은 상황에 대비해 따로 사람을 붙여놨었는데 어제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아 제가 직접 움직였습니다. 다행히도 세희와 하준이 모두 큰일은 없었고요.”
최 비서가 구명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추측을 내놓았다.
“어제 상황을 모두 지켜본 바로는 아무래도 두 사람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미행이 붙을 걸 알고 일부러 그쪽으로 오게 만든 것 같아 보였거든요. 검찰이 나타났던 타이밍도 그렇고.”
만약 최 비서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대로 계속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만약 그 두 사람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이라면 그건 이제 시작에 불과할 테니까.
그 한 명을 시작으로 남은 다섯 명에게도 분명 순차적으로 접근해 나갈 거고.
‘대체 무슨 짓들을 벌이고 있는 게야…….’
20년 전 벌어진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알고 있는 자신의 딸 구세희.
그리고, 그런 구세희와 함께 제너럴이라는 결코 상대해선 안 될 상대들에게 접근하고 있는 하준.
어떻게든 그것만큼은 막기 위해 지난 20년간 고통을 시간을 참아온 구명호였기에 조금도 침착한 감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세희한텐 어디까지 알려준 겐가. 그놈들에 대해서 말야.”
“그들에 대한 신상 정보 정도였습니다. 그 이상은 세희도 따로 물어오지 않아서.”
“흐음…….”
지금 이 순간에도 구명호의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져 가고 있었다.
자신의 딸 세희는 둘째로 치더라도, 하준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조금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디 아직은 모르고 있어야 할 텐데…….’
상황이 이렇게까지 돼버린 이상, 이젠 영원히 비밀로 할 순 없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하준이 모든 걸 다 알아선 안 된다.
적어도 이 일이 대한 책임을 온전히 자신이 모두 짊어지기 전까진.
구명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곤 벗어두었던 외투를 입으며 최 비서에게 물었다.
“담당 검사가 누구라고 했지?”
“서울중앙지검 민정훈 검사입니다.”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가도록 하지. 영장도 없이 체포했을 텐데 다시 석방시키는 일만큼은 무조건 막아야 하니까.”
옮기던 걸음을 멈춰 세우곤 비장한 얼굴로 최 비서를 바라보는 구명호.
그러곤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어투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내가 검사를 만나고 있는 동안 자네는 그 자료들을 준비해 둬. 지난 20년간 모아온 것들, 단 하나도 빠짐없이.”
구명호의 얘기에 최 비서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회, 회장님. 그 말씀은…….”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준비해 온 것들이 아닌가. 그러니 그걸 쓰는 것도 내 손으로 직접 해야지. 더 늦어지기 전에.”
“하지만 회장님. 그럼 회장님까지…….”
마치 큰 위험이 닥칠 걸 예감하듯 최 비서가 그를 만류하려 들자, 구명호가 단호한 어투로 말을 잘랐다.
“준비해 두게. 내가 시작한 일, 내가 끝을 보도록 해야지.”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회장실 문밖으로 걸음을 옮겨 나갔다.
* * *
“류민우 씨. 다시 묻겠습니다. 제너럴이라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불법적인 일들을 벌인 사실이 있습니까?”
“…….”
중앙지검 취조실.
14시간이 넘도록 취조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민정훈과 마주하고 있는 류민우의 입은 조금도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 헤치곤 민정훈이 다시 한번 그에게 말했다.
“류민우 씨. 뭘 생각하고 이렇게 입을 닫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럴수록 더 위험에 가까워지는 건 본인일 겁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진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
“지금 여기, 서울중앙지검 취조실에 당신이 갇혀 있다는 걸 그들이 알게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습니까? 당신을 대신해 변호사를 선임하고, 영장이 발부되는 걸 막아줄 것이며, 결국 무죄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울 거라 생각합니까?”
“…….”
“천만의 얘깁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는 걸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이 그런 무모한 짓을 할 거라고 보나요? 자칫하면 그간 쌓아온 모든 것들이 한 방에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데? 그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편이 나을 거라며 이미 내부적으론 판단을 끝마쳤을 지도 모릅니다.”
겁박과 회유를 반복하며 그를 취조하곤 있었지만, 민정훈의 마음 또한 점점 초조해져 갈 수밖엔 없었다.
어젯밤 긴급 체포로 류민우를 연행해오긴 했지만, 그 일만으론 구속영장까지 발부해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이대로 류민우가 계속 묵비권만을 행사하게 된다면 결국 48시간 내엔 그를 석방시켜야만 한다.
그럼 그 뒤론 어떻게 상황이 급변하게 될지 모르고.
“류민우 씨. 지금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게 본인의 신상을 위해서도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걸 인지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쪽에서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뻗어오지 않는다는 건, 당신이 이곳을 벗어난 순간부터 어떠한 위험이 도사릴지 모른다는 것과 같은 뜻이니까요. 어쩌면 최악의 경우, 목숨까지도 위협받는 상황이 오게 될 지도 모르죠.”
“…….”
이번 민정훈 얘기엔 류민우의 표정이 미세하게나마 바뀌었다.
조금 전 그가 꺼낸 얘기들이 결코 허황된 얘기가 아니란 걸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류민우는 침묵을 지켰고, 민정훈도 답답한 마음에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때.
삐-
“검사님, 잠시.”
취조실 내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민정훈은 류민우를 잠시 바라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조실을 빠져나와 복도로 들어서자, 이묵한 계장이 다소 흥분된 어투로 말을 뱉어왔다.
“검사님! 알아냈습니다!”
“알아내다니, 뭘.”
“그놈들요! 제너럴인가 뭔가 하는 놈들! 그놈들 이름, 나이, 직업부터 해서 모조리 싹 다 알아냈어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묵한 계장의 얘기들에 민정훈은 당최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밤을 꼬박 새가며 십수 시간 동안 류민우를 취조해도 어떠한 것도 알아낸 게 없었는데.
게다가 그의 입을 통하지 않으면 절대 알아낼 수 없는 것이기도 했고.
그런데 갑자기 그들에 대한 정보들을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다 알아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피의자가 저렇게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냈다는 거죠?”
이묵한이 들고 있던 서류들을 건네며 말했다.
“일단 이것부터 보세요, 검사님. 류 수사관…… 아니, 류민우가 지금 여기에 체포돼 있다는 걸 전혀 모를 텐데도 류민우에 대한 정보들까지 완벽히 들어맞고 있어요! 그 말은 다른 정보들도 모두 일치한다는 뜻 아니겠어요?!”
이묵한이 건넨 서류들을 한 장씩 넘겨가는 민정훈. 그곳엔 류민우를 포함한 다섯 명에 대한 자세한 신상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이거 정확한 출처가 어딥니까? 이렇게 쉽게 정보를 입수했다는 건 그쪽에서 일부러 류민우 던지기용으로 보내왔단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요.”
민정훈의 얘기에 이묵한이 절대 그런 쪽은 아닐 거라며 확신에 찬 어투로 답했다.
“아마 출처에 대해 듣고 나시면 검사님도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바로 구세희 사장 부친이시거든요.”
“부친? 부친이라면.”
“영신 G&M의 구명호 회장이요. 이 자료들 전부 그분이 직접 와서 전해주신 겁니다!”
이묵한의 얘기에 민정훈의 표정이 급격히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이묵한이 복도 끝 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지금 검사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직접 검사님 만나서 본인이 알고 있는 모든 걸 다 밝혀 드리겠다고.”
* * *
경기 남부 교도소 접견실.
접견실 내로 입장을 알리는 기계음이 울린 뒤, 수용복을 입은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 플라스틱판을 앞에 두곤 그가 자리에 앉자, 그의 앞에 있던 타이머도 움직임을 시작해 갔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습니까. 본인 손으로 집어넣은 인간 어디 죗값 잘 받으며 살고 있나 직접 확인이라도 하러 오신 겁니까?”
본인의 이름 세 글자는 완전히 지운 채 4238이라는 수용 번호로 살고 있는 그. 바로 박성환이었다.
다소 공격적인 어투의 박성환에게 하준은 차분하게 답했다.
“상고는 포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끝까지 가실 줄 알았는데 조금은 의외였습니다.”
“어차피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괜히 쓸데없는 거에 시간도, 돈도 낭비하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설마 그거 물으러 여기까지 온 겁니까?”
박성환의 물음에 하준은 대답 대신 그를 바라봤다.
항소심 이후 교도소로 이감돼 기결 수용복을 입고 있는 그.
복장도, 지금의 모습도 지난번 미래 예지에서 봤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그땐 왜 대체 자신이 직접 이곳까지 와 그를 마주하고 있는 건지 납득이 되질 않았었는데.
어젯밤 구세희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들을 듣게 된 이후, 하준은 가장 먼저 그 미래 예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줄어가는 타이머 속, 하준은 박성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오로지 그쪽에게서만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준의 얘기에 미세하게 표정이 변화하는 박성환.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하준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20년 전 이수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 ‘그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