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서울 중앙 지검 민정훈 검사실.
업무 시작 시간인 9시까지 10분을 앞둔 가운데, 모두가 출근을 끝마치고 업무에 들어갈 채비들을 하고 있었다.
“검사님, 커피 한 잔 타 드릴까요?”
머그잔을 든 8급 실무관 유혜림이 자리에 앉아 있는 민정훈에게 물어왔고, 민정훈은 가볍게 고갤 끄덕이곤 자신의 전용 컵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럼 따뜻한 걸로 한 잔만 부탁해요.”
“네엡!”
두 개의 잔을 든 유혜림이 한쪽 벽면에 마련된 TV 쪽으로 걸음을 옮겨갔고, 그와 동시에 수사관 류민우도 커피 머신 앞으로 다가왔다.
“후후, 우리 류 수사관님 덕분에 매일 아침 이렇게 맛있는 커피도 다 마시고! 다른 검사실은 다 믹스 커피만 타 먹는다고 어찌나 부러워하던지. 이렇게 좋은 커피 머신을 기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류 수사관님~?”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배꼽인사를 건네는 유혜림의 모습에 류민우가 민망한 듯 옅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차피 집에 놔둬도 잘 쓰지도 않는데요, 뭐. 이왕 공짜로 생긴 거 이렇게 다 같이 유용하게 쓰는 게 낫죠.”
“어머, 겸손하시기까지! 이것 말고도 류 수사관님이 그동안 사무실에 기부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그것도 죄다 값 비싸고 유용한 것들로만! 대체 저런 건 다 어디서 공짜로 받아오시는 거예요? 어디 기부 천사라도 알고 지내시는 건가?”
“왜요, 실무관님도 소개시켜 드려요?”
“오호, 그럼 저야 땡큐죠! 안 그래도 이번에 자취방 옮기면서 집 안이 완전 텅텅 비어 있는데!”
켜진 벽걸이용 TV 아래에서 화기애애한 대화들을 나누고 있는 류민우와 유혜림. 그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민정훈의 얼굴 표정은 사뭇 어두워져 있었다.
바로, 어제 하준으로부터 들은 그에 대한 얘기들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게 진짜 모습인 거지. 내가 지난 3년 동안 알고 지낸 모습들은 전부 다 가짜였던 건가?’
처음 그에게 얘길 들었을 당시, 민정훈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얘기들에 어떤 반응을 내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가 꺼낸 얘기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황당한 소리들로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너럴…… 어떻게 그런 존재들이 있을 수 있는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닌, 법을 매일같이 다루고 범죄 여부를 밝혀내는 검사로서 그는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런 존재들이 실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과 엮여 있는 이들 또한 보통의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
만약 자신과 하준 간의 특별한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 얘길 듣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황당하고도 허무맹랑한 얘기에 가까운 그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얘길 꺼낸 이가 다름 아닌 그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먼저 불러낸 자리에서 그런 얘길 꺼내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나자, 민정훈은 마냥 헛소리로만 취급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3년 전 그가 오밤중에 전화를 걸어왔을 당시에도 지금과 매우 흡사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에.
“수사 정보가 새어 나간 일들이 어쩌면 외부에서 일어난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검사님께서 죄를 입증시키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거물급 인사들이었다면 더더욱요.”
3년 전 수사 당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켰던 민정훈.
그럼에도, 그때의 수사 과정만큼은 여전히 찝찝하고도 아쉽게만 남아 있었다.
관련 브로커들과 연예인들, 그리고 엔터 관계자들을 포함해 실제 마약 복용자들에 대한 대부분의 수사는 이뤄졌지만, 정작 가장 헤비급이라 할 수 있는 그들에 대한 죄는 조금도 입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정황은 분명했음에도 거기에 맞는 증거를 뒷받침하지 못한 이유로.
‘만약 그때 수사 정보를 유출한 사람이 류 수사관이라면…….’
순차적으로 이뤄졌던 당시의 수사 진행 상황. 그리고, 좀 더 확실한 정황을 확보한 뒤 소환하려고 했던 그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를 진행하려고 했을 땐 이미 타이밍이 너무 늦어 버린 뒤였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일제히 해외 출국 상태가 돼 있었고, 돌아와 검사를 진행했을 땐 이미 성분이 검출되지 않은 시기에 도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엔 그들이 수사망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 자체를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터라 황망함은 더욱이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고.
‘그래. 7급 공무원 월급으론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것들이었어. 그때 진작 의심을 해봤어야 했는데.’
얼마 전 우연히 마주하게 된 류민우의 다소 충격적인 모습.
수억 원도 넘는 고급 외제 차량에서 내린 그는 여의도 모처의 한 술집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그날은 그가 어김없이 반차를 낸 날이었다.
“아니, 너무 신기하잖아요! 꼭 류 수사관님이 반차 쓴 다음 날이면 대형 기사가 터진다는 게.”
며칠 전 유혜림이 했던 말.
그땐 그닥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말이었지만, 하준으로부터 그의 실체에 대한 얘길 듣고 난 지금.
민정훈은 그게 결코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단 강한 확신이 들고 있었다.
“어라? NTV 저기 노래 부르는 사람들만 나오는 곳 아니었어? 저기서 원래 뉴스도 진행했었나?”
류민우, 유혜림과는 달리 일회용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마시고 있던 이묵한 계장이 TV 화면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의 옮겨진 시선과 함께 민정훈도 잠시 상념에서 빠져나와 TV를 바라봤다.
-이번 사건은 굉장히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는데요? 한 인기 여가수가 재벌가의 장남과 오랜 시간 스폰 관계를 맺어왔다는 소식입니다. 해당 사실 자체보다도 더 놀랍게 다가오고 있는 건 바로 그 재벌가의 정체가 대한민국 재계 1위 현조 그룹이라는 건데요. 아직까지 현조 그룹에선 어떠한 답변도 해오질 않고 있는 상황에서. 장남 박진한 상무의 과거 이력들을 재조명해 보았습니다. 스물일곱 나이에 현조 모터스에 입사한 박진한 상무는…….
TV 화면 속에서 흘러나오는 여성 앵커의 얘기들에 유혜림이 입을 벙긋거렸다.
“와, 대박…… 진짜 저런 스폰 관계가 존재하긴 하구나. 그냥 지라시에나 나올 법한 얘기들이라 생각했는데!”
꽤나 충격을 받은 듯한 유혜림의 반응과는 달리, 이묵한 계장은 담담한 모습을 보여왔다.
“재벌가 놈들이 다 그렇지 뭐. 어디 스폰 관계가 저들뿐이겠어? 남아 도는 게 돈뿐인 놈들이랑 또 그걸 원하는 여자들이 서로 이해관계만 맞으면 짝짝꿍 하는 거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캐보면 수두룩 빽빽할걸?”
“하, 진짜 세상이 요지경이네요, 요지경이야.”
고개를 절레 내젓는 유혜림을 지켜보던 민정훈이 잠시 시선을 류민우에게로 옮겼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그의 얼굴 표정이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TV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미간까지 구겨가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그.
이묵한, 유혜림 두 사람 모두 그런 그의 변화를 조금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민정훈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심지어 커피 잔을 들고 있는 손까지 미세하게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어떠한 분노를 억누르려는 듯한 모습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와, 근데 이번에도 역시나네? 왜, 제가 얘기했던거요. 류 수사관님 반차 쓰는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대형 기사가 터져 나온다고! 와, 벌써 이게 몇 번째야? 너무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류 수사관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쵸?”
신기하다는 듯 꺼내오는 유혜림의 얘기에, 류민우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곤 짧게 내뱉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꽤나 심각해진 표정과 함께 곧바로 검사실을 빠져나가는 그.
그 순간, 민정훈은 왠지 모를 강한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 전 TV 화면에서 흘러 나온 해당 뉴스가 그와 어떤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무래도 이대로 가만있어선 안 되겠어.’
* * *
이른 오전 시간, NTV 복도를 걷고 있는 하준.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민정훈의 얘기들을 들으며 하준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런 뉴스가 나왔다고요? 조금 전 NTV에서요?”
-네, 바로 조금 전에요. 근데 그걸 보면서 류 수사관 표정이 갑자기 확 굳어지더라고요. 마치 터져선 안 될 일이 터져 버렸다는 것처럼. 그러곤 바로 어딘가로 나가 버렸고요.
“……흠.”
-아무래도 이대로 계속 놔둬선 안 될 것 같습니다. 그 인간들이 벌이고 있는 짓들도 그렇지만, 류 수사관을 계속 여기서 일하게 하는 건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꼴이니까요. 뭐가 됐건 다신 이쪽 일엔 발도 못 붙이도록 죗값을 확실히 치르게 해야죠.
당장 무슨 행동이라도 취하려는 듯 보이는 그의 얘기들에 하준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아직은 시기가 아닙니다. 이 일은 단순히 공무원 하나를 파면시키는 걸로 끝나선 안 될 일이에요. 아예 전체를 뿌리채 뽑지 않으면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그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어가게 될 겁니다. 어쩌면 검사님이 공직 생활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도요.”
하준의 얘기에 잠시 말이 없는 민정훈. 잠시 뒤, 수긍한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뱉어왔다.
-후…… 듣고 보니 대표님 얘기가 맞는 것 같네요. 고작 꼬리 하나 자른다고 그게 별 의미가 되진 못할 거니까.
복도를 걷고 있는 하준의 시야 앞으론 ‘사장실’이라는 팻말이 보이고 있었고, 수화기 너머 민정훈이 다시 말을 내뱉어왔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저는 류 수사관 통화 목록이랑 계좌 내역을 한번 알아보도록 할게요. 그걸 캐다 보면 분명 연결돼 있는 사람들이 나올 것 같으니까. 나오는 대로 바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표님.
“네. 저도 개인적으로 알아보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들어가세요, 검사님.”
민정훈과의 통화를 끝마친 하준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류민우 그가 현조 그룹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건 이미 미래 예지를 통해 알고 있었던 사실.
하지만, 그와 관련한 뉴스가 이렇게 곧바로 터져 나왔다는 건 다소 의아할 수밖엔 없었다.
게다가, 그걸 보도한 방송사가 다른 곳도 아닌 NTV였고.
그 내용을 대체 어디서 어떻게 입수한 건지, 또 누구의 결정으로 그걸 보도하기로 한 건지.
지금의 하준으로선 쉬이 납득이 되질 않고 있었다.
“어? 하준이?”
‘사장실’의 팻말이 걸린 문 앞에 서 있던 하준을 누군가가 불러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세련이 눈동자를 살짝 키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맞네, 하준이! 어머, 네가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세희 보러 온 거야?”
“아, 응. 요 며칠 계속 연락이 안 되고 있어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해서.”
“아, 그래? 세희가 계속 연락이 안 됐어? 이상하네. 딱히 바쁠 일도 없었을 텐데.”
이상하다는 듯 고갤 갸웃거리고는 세련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근데 세희 지금 방에 없는데. 조금 전에 나갔거든. 아마 1층 로비에 있는 카페로 갔을 거야.”
“음, 그럼 금방 오겠네. 커피 사러 간 거면.”
“아, 아니, 아니. 아마 바로 오진 않을 거야. 최 기자님 만나러 간 거라.”
“최 기자님? 최 기자님이라면.”
하준의 되물음에 세련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풉, 우리가 아는 최 기자님이 또 누가 있어. 최윤섭 기자님이지. 두 사람 요새 꽤 자주 보는 것 같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