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그럼 말씀 나누시고 좀 있다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검사님.”
“그래요. 이따 봐요.”
민정훈에게 인사말을 건넨 뒤 맞은편의 하준에게도 가볍게 목례를 하곤 서서히 멀어져 가는 그.
하준은 그런 그의 뒷모습에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자신이 본 그의 얼굴은 이미 두 차례나 마주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님……?”
급격히 심각해져 버린 하준의 얼굴 표정을 바라보며 민정훈이 조심스럽게 불러왔다.
하준은 그제야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둔 뒤 곧바로 민정훈에게 물었다.
“조금 전 그분. 수사관이라고 하셨나요?”
“아, 네. 저랑 같이 근무하고 있는 수사관님이세요. 같이 일한 지는 한 3년 정도 됐고요.”
커피숍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흘긋하곤 민정훈이 하준에게 물었다.
“왜요? 혹시 저희 수사관님이랑 안면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불과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결코 낯설게 느껴질 수가 없는 그의 얼굴.
그는 이미 두 차례의 미래 예지를 통해 본 그 남자가 확실했고, 지금 그를 여기서 마주한다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민정훈과 같은 검사실에서 일하고 있는 수사관이라면 더더욱.
하준은 대답 대신 질문을 질문으로 상쇄했다.
“저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류민우 수사관님이요. 근데, 대표님. 갑자기 안색이 너무 안 좋아지신 것 같은데. 혹시 어디 불편하신데라도…….”
류민우.
머릿속으로 그의 이름 세 글자를 계속 되뇌이며 하준은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를 찾기 시작했다.
분명 제너럴에 속해 있는 사내들 중 하나인 그.
한 번도 아닌 두 번의 미래 예지를 겪은 하준이었기에 확신하고 또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윤섭이 보내준 영상 속에서 또한 분명 포함돼 있었고.
그런데 그의 진짜 직업이 검찰 수사관이었다니.
그것도 대한민국 검찰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서울중앙지검의 소속으로.
제너럴이 어떤 존재들인지, 그리고 지난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떠한 짓들을 벌여왔는지 결코 모르지 않는 하준이었기에 지금의 사실들은 좀처럼 믿어지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엔 없었다.
“저분이랑 같이 일하신 지 3년 정도 되셨다고요.”
겨우 입술을 떼곤 하준이 물었고, 민정훈은 짧게 고갤 끄덕였다.
“예. 제가 서울중앙지검으로 온 뒤로 쭉 같이 일해오고 있는 분이세요. 그만큼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많다는 민정훈의 말에 하준은 그의 얼굴을 잠시 말없이 바라봤다.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있는 그의 눈빛.
최윤섭으로부터 들은 그들에 대한 얘길 떠올리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20년간 줄곧 상생의 관계를 이어온 썬데이 미디어 또한 그들의 진짜 정체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고 했으니.
“아, 잠시만요. 대표님.”
울려오는 진동 소리와 함께 민정훈이 하준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통화를 이어가는 그를 일별하곤 하준은 머릿속으로 생각들을 정리해 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들이 정말 다 우연인 걸까.’
그를 마주하고 난 뒤 줄곧 들고 있던 의문.
과연 지금의 상황들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우연으로만 이루어졌던 걸까.
민정훈과의 인연이 시작되게 된 3년 전 미래 예지는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하준에겐 물음표로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불과 몇 분 전 민정훈이 그 얘길 상세히 꺼내온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자신과는 그 어떠한 연관성도 없는 그 일들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보였던 건지.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것에 대한 해답을 왜 주지 않고 있는 건지.
비록 민정훈에겐 농담조로 대답을 대신 했지만, 당시의 미래 예지는 정확히 그를 가리켰었다.
해당 사건의 담당 검사로 민정훈이 배정될 것을.
그렇기에 하준 또한 그것을 그대로 따른 것뿐이었고.
그런데, 조금 전 그의 수사관이라며 한 남자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해당 사건이 일어난 시점부터 민정훈과 함께 일해오고 있었고.
과연 이게 다 우연인 걸까. 아니, 애초에 우연일 수가 있는 일인 걸까.
다른 무엇보다, 희미한 숨소리와 함께 눈을 감아가던 구세희의 옆으로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했기에 하준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3년 전 그때의 일과 지금의 상황들까지.
줄곧 물음표로 떠 있던 그것들이 이제야 느낌표로 바뀌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고, 이거 또 부장검사님 호출이네요. 참, 이 검사 일도 할 짓 못되는 것 같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부르면 부르는 대로 나가야 하니 원. 어디 대형 로펌에서 스카우트라도 오면 당장에라도 사표 던지고 싶은 심정이라니까요? 허허.”
통화를 끝마치고 온 민정훈이 자리에 앉으며 옅게 웃어 보였다.
그러곤 하준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이거 제 명함인데요, 대표님. 이제 정식으로 얼굴도 보고 했으니 자주 연락도 하고 간간이 식사 자리도 갖는 걸로 하시죠. 다른 건 몰라도 지난번 일에 대한 답례는 제가 제대로 한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게 다 누구 덕분인데요.”
그가 꺼내온 명함을 건네받은 하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와는 상반된 얼굴 표정을 지은 채로 그의 두 눈을 마주했다.
그러곤 뭔가를 결심한 듯 그를 불렀다.
“검사님.”
“예, 대표님.”
“3년 전 그때 그 사건을 맡으시면서 아쉬운 점이 많다고 하셨죠. 수사 과정에서 나온 거물급 인사들의 죄를 입증시키지 못하셨다고.”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하준의 얘기에 민정훈이 의아한 모양새를 내비추면서도 고갤 낮게 끄덕였다.
“아, 예. 그랬었죠.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당시에 수사 정보가 새어 나갔을 거라고 하셨는데. 혹시 그때 의심 가는 사람이나 정황 같은 건 전혀 없으셨나요?”
“흠…….”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의 얘기들에 별다른 반응을 보여오진 않았던 그.
헤어질 시간이 다 되어서야 대뜸 이러한 얘기들을 꺼내온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글쎄요.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었죠. 당시 그 사건을 맡았던 건 저 하나밖엔 없었으니까요. 수사가 모두 종료될 때까진 부장 검사님께도 따로 보고를 올리지 않았던 터라 정보가 대체 어디서 새어 나간 건지 미스테리할 수밖에 없긴 했었죠.”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민정훈에게 하준은 잠깐의 틈을 둔 뒤 입을 열어왔다.
“검사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들, 오로지 검사님과 저 둘만 아는 일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자신의 얘기에 차츰 심각해지는 민정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하준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에 대한 얘길 꺼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 7급 수사관 류민우란 남자의 실체에 대해.
* * *
같은 시각, NTV 사장실.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식사도 건너뛴 채 구세희와 최윤섭은 심각한 대화들을 나누고 있었다.
“현조 그룹의 박진환 상무요?”
최윤섭으로부터 어젯밤 모임의 안건에 대해 전해 들은 구세희가 다소 놀란 표정과 함께 되물었다.
“네, 현조 그룹 장남이요. 혹시 아시는 분이세요?”
“아, 몇 번 본 적은 있어요. 그룹 모임 만찬 때. 워낙 젠틀한 이미지라 그런 쪽으로 취미가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그룹 모임 만찬이요?”
아직까지도 구세희의 배경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최윤섭은 의아한 표정과 함께 물었고, 구세희는 잠시 고민하다 자신에 대한 얘기들을 그에게 짧게 해주었다.
그녀의 배경에 대해 전해 들은 최윤섭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구 사장님 아버님이 영신 G&M 구명호 회장님이라고요? 어떻게 그런 엄청난 사실을 여태껏 숨겨오실 수가…….”
“숨기긴요. 최 기자님께서 따로 묻지 않으셔서 저도 굳이 말하지 않은 것뿐이죠. 뭐, 지금 제가 하는 일들이 저희 아빠와는 전혀 무관한 일들이기도 했고요.”
“하. 이거 너무 놀라운 사실인데요.”
그녀의 배경에 대해 듣고 나자, 최윤섭은 문득 의아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럼 유 대표님도 구 사장님 부친 품 아래서 자라오신 건가요? 그럼 구 사장님이 아니면 유 대표님이라도 경영 승계 과정을 밟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최윤섭의 얘기에 구세희도 어느 정도 수긍한다는 듯 답했다.
“아빠도 그걸 가장 바라고 계셨었죠. 하준이가 미국에서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셨으니까. 물론 뭐, 하준이 정체가 밝혀지고 나선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접으실 수밖엔 없었지만.”
“하, 이것 참…… 구 사장님도 유 대표님도 두 분 다 어떤 의미론 대단하신 분들이네요. 다른 그룹들은 서로 물어뜯고 밑바닥까지 보여가면서 피 튀기게 그 자릴 차지하려고 난리인데. 두 분은 전혀 다른 쪽의 일들을 하겠다고 그 자린 쳐다도 안 보고 계시니 말입니다.”
좀처럼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 하고 있는 최윤섭의 모습에 구세희는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화제를 복귀시켰다.
“그래서 어제 최 기자님을 부른 이유가 그 스폰 관련한 내용을 어디에도 새어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단 거죠?”
“네. 지금 그룹 내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조금이라도 문제 될 만한 상황은 아예 원천봉쇄 하려는 것 같더라고요. 이미 몇몇 기자들 쪽에선 냄새를 맡은 것 같기도 하고요.”
최윤섭은 어젯밤 그들의 얘기들을 전하며 그들이 취해놓았다는 조치에 대해서도 꺼내왔다.
“웬만한 방송사들엔 미리 다 손을 써놓은 것 같더라고요. 각 방송사마다 뉴스 큐시트들을 다 점검한 뒤에 내보낼 수 있도록 해놨다는 걸 보면요. 참, 그게 가능한 일인지 저도 어제 처음 알게 됐습니다.”
팔짱을 낀 채 뭔가를 깊이 생각하던 구세희가 최윤섭에게 물어왔다.
“근데, 마지막에 그 남자는 왜 최 기자님한테 따로 돈을 준 거예요? 여태껏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면서요.”
“네. 저도 그 점이 의아하단 말이죠. 게다가 액수도 보통이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따로 전달까지 한 걸 보면 분명 뭔가 이유가 있긴 한 것 같은데.”
“……으음.”
입술을 매만지던 구세희가 뭔가 알겠다는 듯 낮게 말을 내뱉었다.
“특별히 더 신경을 써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있는 거겠죠.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더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든지.”
“흠…….”
최윤섭의 긴 한숨 소리와 함께 사장실 내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모두 어젯밤 일에 대한 플랜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구세희가 먼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어왔다.
“그거 저희 쪽에서 터뜨려 버리죠. 아무리 그 사람들 영향력이 세다고는 해도 사장인 나보단 아닐 거니까. 그거, NTV에서 그냥 터뜨려 버릴게요.”
“……네?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랬다가 무슨 해꼬지라도 당하면.”
다소 걱정스럽게 꺼내오는 최윤섭의 얘기에 구세희는 어딘가 모를 의미 심장한 표정과 함께 답했다.
“그러길 바라는 거죠. 숨어 있지만 말고 직접적으로 어떤 액션이라도 해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