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그래서 일단 이번 달 스케줄은 그렇게 잡힌 상태구요. 다음 주에 있을 아이스크림 광고까지만 끝내고 나면 아마 당분간은 좀 여유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석에 앉은 하준을 바라보며 에 대한 스케줄 보고를 끝마친 정진웅.
맞은편에선 윤채경의 매니저가 다음 보고를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정진웅은 하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하준은 테이블 중앙만 바라본 채 아무런 대답도 꺼내오지 않고 있었다.
정진웅은 한참을 기다리다 조심스럽게 하준을 불렀다.
“저, 대표님……?”
“아.”
꽤나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하준은 그제야 정진웅의 목소리를 인지하곤 고갤 들어 올렸다.
“저…… 다시 보고 올릴까요, 대표님?”
하준은 손에 들린 문서들을 빠르게 훑고는 고갤 내저었다.
“아냐. 애들 광고 촬영일은 언제지?”
“다음 주 수요일이요. 지금 잡힌 스케줄은 그게 마지막이라 이후 행사나 새 광고 계약 건에 대해선 대표님이 결정을 내려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멤버들에게 들어온 각종 행사와 방송 섭외 문의들, 그리고 광고의 종류들을 확인해 가던 하준이 정진웅에게 물었다.
“애들 촬영하면서 힘들어하거나 하는 건 없었고?”
“아이, 힘들어하긴요. 오히려 목이 빠져라 촬영날만 기다리고 있는 걸요? 맛있는 거 공짜로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맨날 광고만 찍었으면 좋겠다고 어찌나 좋아들 하던지. 참, 누가 보면 회사에서 다이어트라도 시키는 줄 알겠다니까요. 지금 걔네한테 나가는 돈의 절반이 다 식대값인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 내젓곤 정진웅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촬영 없는 날엔 꾸준히 연습실에 나와서 연습하고 있어요. 따로 시킨 것도 아닌데 매일 아침에 나와선 오후까지 하고 돌아가더라고요. 아주 그게 몸에 벤 애들처럼.”
“음.”
아직 신곡이 나오기 전이라 그 전까진 충분한 휴식을 취해도 될 멤버들.
게다가, 그 연습이라는 것 또한 매번 같은 것의 반복일 수밖엔 없을 터였고.
그럼에도 매일같이 연습실에 나와 시간을 보낸다는 건 정진웅의 말처럼 온전히 몸에 베어 있어야만 가능할 일일 거였다.
하준이 고갤 짧게 끄덕이곤 말했다.
“어제 이준이한테 연락이 왔는데 며칠 내로 타이틀곡 작업은 끝날 것 같다더라고. 다른 곡들도 이달 내론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고. 곡 나오면 콘셉트나 안무나 각 팀마다 준비할 것들도 많아질 테니까 미리 언질들 해두도록 해. 이준이랑도 계속 소통할 수 있게 챙겨봐 주고.”
하준의 얘기에 정진웅이 꽤나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헉. 싱글도 아니고 정규 앨범인데 벌써 작업이 끝나간다고요? 아니…… 기계도 아니고 어떻게.”
“곡 작업은 전부터 꾸준히 해왔으니까. 팔도에 들어오기 전부터. 작업해놓은 것들 중에서 콘셉트 정하고, 거기에 맞게끔 디벨롭 시켰다고 하더라고. 뭐 아직은 1차본이니까 다 같이 들어보고 나서 또 한 번 편곡 작업은 거쳐야겠지. 현성 씨도 붙을 거고.”
“와…… 이준이가 그쪽으론 정말 천재성이 있긴 있나 보네요. 2집 정규 앨범을 통째로 맡은 거라 부담감도 보통이 아니었을 텐데.”
감탄과 놀람이 섞인 정진웅의 얼굴을 일별하곤 하준이 이윤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채경 씨 촬영도 이달이면 다 끝나지?”
“아, 네. 오늘 마지막화 대본까지 다 나와서 스케줄 대로만 가면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오늘 저녁엔 부산 촬영이 있어서 이따 오후에 출발할 예정이고요.”
“음,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고?”
“아, 그게…….”
하준의 물음에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윤철이 이내 입술을 뗐다.
“특이사항까지는 아닌데. 누나가 요즘 감정이 좀 오르락내리락 하시는 것 같아요. 곧 있으면 연말 시상식인데 혹시나 상을 못 받으면 어쩌나 싶어서.”
“시상식?”
“네. 원래 누나가 이맘때 되면 항상 이러긴 하셨어요. 영화제야 여러 개가 있다 보니까 부담을 좀 덜 가지는 편이긴 한데, 연기대상은 아무래도 누나가 자주 가는 자린 아니다 보니까. 특히나 이번엔 여기저기서 유력한 대상 후보라고 막 떠들어대기까지 하니까 더 부담감이 크신가 봐요.”
조금은 의외의 얘기였다.
항상 자신감 넘치는 모습만 봐오다 보니 그런 일엔 꽤나 초연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녀의 연기 경력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럴 줄 알았고.
하준은 이윤철을 바라보며 가늘게 웃어 보였다.
“시청률로 보나 화제성으로 보나 딱히 걱정할 건 없어 보이는데? 뭐, 연기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네가 옆에서 잘 얘기해 줘. 괜히 안 해도 될 걱정까지 해서 촬영에 지장 생기면 안 되니까.”
“아, 네 대표님! 대표님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면 아마 한결 마음 편안해하실 것 같긴 해요.”
하준이 고갤 살짝 끄덕이곤 정진웅과 이윤철에게 말했다.
“그래. 더 보고할 내용 없으면 스케줄들 소화해. 결재 필요한 것들은 나중에 따로 올려주고.”
“예, 대표님! 그럼 수고하십시오!”
오전 보고를 끝마치곤 정진웅과 이윤철이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잠시 멈추었던 생각들을 이내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다.
“…….”
어제부터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그 장면.
아니,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 장면들은 줄곧 하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대체 세희가 왜.’
그들과는 그 어떠한 연관성도 없을 구세희가 대체 왜 그들 중 한 명과 함께 있었던 걸까.
게다가, 그 끔찍한 상황들은 무엇 때문에 펼쳐지는 거고.
지금껏 숱한 미래 예지들을 겪어오고, 또 그것들을 해결해 온 하준임에도 이번 일은 도저히 받아들여지질 않고 있었다.
인과성 자체의 문제뿐 아니라 그 끔찍한 장면들은 결코 현실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똑똑.
대표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김지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대표님. 대표님 찾는 전화가 왔는데 이걸 연결해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김지혜의 모습에 하준이 물었다.
“왜? 어디서 온 전환데?”
“그게…… 자기가 무슨 무슨 검사인데, 대표님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회사로 전화한 거라고.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연결 좀 시켜주면 안 되냐고 그러는 거예요.”
“검사?”
“네, 검사요. 그것도 처음엔 계속 누군지 안 밝히다가 제가 정확히 얘길 안 해주면 연결 못 시켜 드린다고 하니까 그때서야 얘길 하더라고요. 이거 아무래도 보이스피싱 뭐 그런 거겠죠?”
“흠.”
잠시 생각하던 하준은 괘고 있던 손을 턱에서 떼고는 말했다.
“보이스피싱이었으면 내 전화기가 꺼져 있는 걸로 끝냈겠지. 굳이 회사로까지 전화해서 그러진 않을 것 같은데.”
“그런가…… 근데 검사가 갑자기 대표님을 찾을 일이 뭐 있어요? 대표님처럼 깨끗한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서 지금 연결 대기 중이야?”
“아, 네. 하도 칭얼대길래 잠깐 기다리라 하고 대표님께 여쭤보러 온 거예요. 어떻게, 연결해 드릴까요?”
김지혜의 물음에 하준은 고갤 끄덕이곤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밤새 미래 예지에 대한 복잡한 고민들을 한 탓에 여태 휴대폰이 꺼져 있던 것도 모르고 있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옮기자, 책상 위의 전화기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네, 유하준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하준 씨! 아! 이젠 유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하려나? 하하. 접니다, 민정훈. 혹시 기억하시려나요?
민정훈. 그의 이름을 듣고도 잘 떠올려지지 않자, 하준이 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로 기억이 나질 않는 것 같은데. 혹시 저랑 어떤 일로 뵀던 분이실까요?”
-아, 하긴. 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긴 하겠네요. 그땐 뭐 저도 신입 나부랭이 시절이었으니까. 하하하.
호탕하게 웃어 보인 그가 하준의 기억을 떠올려 주기 위해 자신을 다시 소개해오기 시작했다.
-저, 서울중앙지검에 민정훈 검사입니다. 3년 전, 대표님이 주신 전화 한 통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그 민정훈이요. 음, 이 정도 얘기해 드리면 이젠 바로 기억하실 것도 같은데.
‘3년 전’, 그리고 ‘검사’라는 두 단어를 매칭한 그 순간, 하준은 그제야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곧바로 떠올린 하준은 수화기에 대고 입을 열었다.
“아, 네. 기억나네요. 근데 갑자기 무슨 일로.”
* * *
“하하. 그때도 웬만한 연예인 뺨치는 외모라고 생각은 했었습니다만, 이렇게 유명하신 분인 걸 알고 보니 그때보다도 훨씬 더 멋져 보이는 것 같은데요?”
약 두 시간 뒤, 서울 중앙 지검 앞의 한 커피숍.
하준과 마주 앉은 민정훈이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 표정을 하고선 흐뭇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준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또 곧바로 입을 열어왔다.
“이거 제가 뵙자고 했으니 계신 곳으로 제가 찾아가는 게 도리인데 이 공무원 점심시간이라는 게 딱 정해져 있다 보니 부득이하게 이 먼 길을 오시게 했습니다. 그 점 우선 사과 말씀부터 드릴게요.”
“아닙니다. 저도 바로 떠올리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 있어서. 직접 사무실로 연락까지 주셨는데.”
민정훈. 그의 얼굴을 실제로 마주한 건 하준도 처음이었다. 그와는 3년 전 전화 통화 몇 번을 한 게 전부였으니까.
그럼에도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뒤 무척이나 뚜렷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때의 사건이 결코 가볍지도, 작지도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하. 아, 제가 대표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그렇게 얘길 해도 직원들이 도무지 믿어주질 않더라고요. 직접 보는 앞에서 전화까지 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대표님 전화기도 꺼져 있으시고. 아! 혹시 번호가 바뀐 건 아니시죠?”
“아, 네. 그대로입니다. 안 그래도 다시 켜니까 부재중이 찍혀 있더라고요.”
“역시. 전 또 바뀌었으면 어떡하나 했네요. 실은, 회사에 연락할까 말까도 무척 고민했거든요. 하하하.”
커피 잔의 빨대를 입으로 옮기는 그를 바라보며 하준이 물었다.
“근데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아, 뭐 무슨 일이 있어서 뵙자고 한 건 아니고요. 지난번 일로 제가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전한 것 같아서 꼭 한번 드리고 싶었거든요. 마침 한국에 들어오셔서 번듯한 회사까지 떡하니 차리고 계시니까. 하하, 저 그때 그 일로 중앙지검까지 아주 한 방에 올라왔거든요. 그게 아니었다면 아직도 지방에서 밤낮없이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을 건데.”
당시 민정훈의 직급과 상황이 어땠는지는 하준 또한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그가 얼마나 크게 조명받게 됐는지 또한.
한껏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갑자기 하준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곤 다소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저, 대표님. 이렇게 직접 얼굴도 뵌 김에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네, 어떤.”
“지난 3년 동안 내내 궁금했었거든요. 대체 대표님은 어떻게 다 알고 계셨던 건지.”
꽤나 진지한 어투와 눈빛을 보내오며 그가 곧바로 덧붙였다.
“그 엄청난 사건들의 모든 전말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