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여의도 내에 위치한 프라이빗 비즈니스 클럽 앞.
약속 시간인 20시 정각까지 5분을 앞둔 상황에서, 최윤섭은 자신의 휴대폰 액정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하준 대표님]
갑작스레 잡힌 그들과의 만남에 대해선 아직까지 하준에젠 전하지 않은 최윤섭. 우연스러운 타이밍에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최윤섭은 잠시 고민하다 수신 버튼을 눌렀다.
“예, 대표님.”
-최 기자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혹시 뭐 하나만 여쭤볼 수 있을까 해서요.
“네, 그럼요. 어떤 건데요?”
-저한테 보내주신 영상에서 최 기자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 말입니다. 혹시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건 전혀 없으실까요?
“제 맞은편에 있던 남자요?”
하준이 가리키는 인물이 누군지 떠올리던 최윤섭은 곧이어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어왔다.
“아, 그 사람이요. 흠, 글쎄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그 사람들에 대해선 아주 사소한 거라도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요. 제가 인계받을 당시부터 저희 쪽 내부 자료조차 아무것도 받은 게 없기도 했고요.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바로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거거든요.”
이미 몇 시간 전, 그들의 신상 정보가 적힌 파일을 구세희로부터 건네받은 최윤섭이었기에 조금 전 말은 거짓이었다.
그들 하나하나의 디테일한 정보들 뿐만 아니라, 하준이 가리키는 남자에 대한 것 또한 이미 꽤나 상세히 머리에 박힌 상태였기에.
물론, 어떤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하준과 자신은 같은 목표를 향해 손을 잡은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으니까.
다만, 아직은 스스로도 온전한 정리를 끝마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구세희가 왜 그에겐 비밀로 한 채 이 위험한 일을 진행하려고 하는 건지.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친에게 일어난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도 왜 그들에 대해 파고들려고 하는 건지.
우연치고는 너무 기묘한 타이밍과, 이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어딘가 모를 불안한 분위기들은 최윤섭이 어떠한 판단을 쉽게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모두의 사활이 걸린지도 모를 이 위험한 일들에서,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중요할 것이기에 더더욱.
수화기 너머 하준의 옅은 한숨 사이로 최윤섭이 물었다.
“근데…… 그건 왜 물으시는 걸까요, 대표님?”
-아. 아닙니다. 혹시 아는 게 있으신가 해서 여쭸습니다. 곧 하나하나 알아봐야 할 정보들이기도 하니까요.
“아, 그렇긴 하죠. 저도 좀 더 분발해서 얼른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캐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쉬세요, 기자님.
“네, 대표님도요.”
하준과의 통화를 마치고선 긴 한숨을 내뱉는 최윤섭.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의 일이라 생각했던 그들과의 관계가 이젠 훨씬 더 복잡하게 얽힌 상황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저 단순한 우연으로만 받아들이기엔 힘들 수밖엔 없는 지금의 일들.
한겨울 찬 공기 속으로 긴 입김을 내뱉은 뒤, 최윤섭은 어두운 비즈니스 클럽 입구로 발걸음을 옮겨나갔다.
* * *
“이렇게 갑작스럽게 호출을 하게 돼 우선 최 기자님껜 죄송하단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지라 미리 대책을 마련해 둬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너럴의 리더 격인 그가 상석에 앉아 최윤섭에게 말을 꺼내왔다.
“저희 쪽 VIP 중에 한 분이 한 여가수와 오래전부터 스폰 관계를 맺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게 최근 기자들 사이에서 입방아에 오르 내리고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근데 문제는, 이게 절대로 외부에 흘러나가선 안 된다는 겁니다. 방송 매체는 물론이거니와 인터넷이든 신문이든 그 어떤 기사 한 줄조차도요. 지금 우리 VIP의 상황이 그런 일로 아주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도 있을 만한 상황이라 말입니다.”
최윤섭과 가까이하고 있던 그가 등받이에 등을 붙이곤 옅게 숨을 내뱉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일단 방송사들에 미리 조치는 취해둔 상황입니다. 금일부터 나갈 뉴스 큐시트들은 다 저희 쪽에서 점검할 수 있도록요. 그래서 그쪽은 딱히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은데…….”
상석 남자의 말을 이어받아, 그의 왼편에 있던 사내가 입을 열어왔다.
“행여나 이때다 싶어서 큰 거 한 방 터뜨려보려는 기자 놈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 말입니다. 이게 어디서 어떻게 말이 나온 건진 모르겠는데, 분명 기자 놈들 중에서 냄새를 맡고 흘리고 다니는 건 확실한 것 같더라고요.”
“아, 예…….”
갑작스레 자신을 호출한 연유를 듣고난 최윤섭은 상석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말씀하신 VIP가 정확히 어떤 분인지 저도 알 수 있을까요? 저도 뭔가를 알아보고 얘기하신 것들에 대비해 두려면 누군지 정돈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물론이죠.”
고갯짓을 짧게 해 보이곤 그가 곧바로 말을 꺼내왔다.
“현조 그룹의 박진한 상무입니다. 그분이 누군진 알고 계시죠?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의 장남, 현조 그룹을 통째로 이어받을 가장 유력한 차기 후계자 후보. 이번 일은 단순히 그분의 사생활 문제를 떠나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의 경영 승계 문제가 걸린 아주 중대한 사안입니다. 아시는진 모르겠지만, 지금 다른 형제들이 서로 물어뜯는 데만 아주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라서요.”
“……아, 네.”
이미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는 바였지만,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의 스케일이 역시나 보통 수준은 아니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재벌가 장남의 뒤까지 봐주고 있다니. 그것도 경영 승계 과정에까지 개입해 가며.
최윤섭이 미묘한 심경 변화를 느끼고 있던 때, 그가 등받이에서 등을 떼곤 말을 이어왔다.
“사실 스폰 문제야 이 바닥에선 비일비재한 일이라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논의할 주젠 아닙니다만, 말씀드렸다시피 이게 조금이라도 새어 나갈 시 이때다 싶어 온갖 추잡한 언론 플레이들을 해올 게 뻔한 상황이라서요. 자기들 손으로 먼저 칼을 빼들긴 힘들어도 누군가가 그걸 대신해 준다면 그보다 더 반가운 상황이 있겠습니까? 그때부턴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수밖에요.”
고개를 낮게 끄덕이곤 최윤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
“아, 뭐 별건 아닙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미 웬만한 방송사들엔 다 손을 써놓은 상태라 그쪽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기자님께선 언론사나 기자들 쪽 움직임만 유심히 살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바닥에서 십수 년을 일해왔던 분이시니 그 정도 동태쯤은 어렵지 않게 파악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상석 남자의 왼편에 있던 사내가 또 한 번 말을 거들어왔다.
“이 정도 사안이면 일개 평기자 따위가 절대 함부로 내보낼 수 있을 만한 내용은 아닐 겁니다. 그럼 데스크의 결재가 있어야만 가능하단 얘기일 거고. 이번 일은 최 기자님 뿐만 아니라 김 부장님께도 따로 요청을 해둔 상태니 조금만 관심 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최윤섭이 알겠다는 답변을 해오자, 상석의 남자가 다소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그에게 물어왔다.
“근데, 그 스폰 여가수가 누군지는 따로 안 물어보시네요? 연예부 기자시라 그걸 가장 궁금해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얘기에 최윤섭은 담담한 어투로 답했다.
“말씀하셨듯 이런 일은 이 바닥에 비일비재한 일이니까요. 지금은 그게 누군지가 딱히 중요한 사안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으흠, 하하. 뭐, 그렇긴 하죠.”
호탕한 웃음 소릴 내보이곤 상석의 남자가 테이블 끝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곤 그를 가리키며 최윤섭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우리 김 프로가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 일이라 아무쪼록 잘 부탁 좀 드려보겠습니다, 기자님. 행여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 김 프로 입장이 무척 난감해지는 상황이라서요. 그렇지, 김 프로?”
“후후, 뭐 어디 그게 저뿐이겠습니까? VIP에 관한 일들이면 곧 우리 제너럴 전체의 일이기도 한데요 뭐. 아무쪼록 최 기자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
최윤섭의 대답과 동시에 상석의 남자가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말했다.
“자자, 오늘은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인만큼 여기까지만 하고 해산하는 걸로 하자고. 다들 개인적인 일들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말을 마치고는 그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올렸고, 다른 이들 또한 이미 채워져 있는 자신들의 잔을 가볍게 위로 올렸다.
“자, 쭉 한잔 털어내고 바로 일어들 납시다.”
“수고하셨습니다!”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곤 사내들을 바라보는 최윤섭.
서로가 서로를 김 프로라 부르며 자신들끼리도 자세한 신상 정보들을 주고받지 않는 그들.
하지만 최윤섭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성이 김씨도, 그리고 프로라 부를 만한 직업을 갖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정재계뿐 아니라 엄청난 인물들과 엮여 있는 그들의 실체가 실상은 너무나도 평범하단 걸 알고 있는 지금, 최윤섭은 온갖 복잡 미묘한 감정들로 휩싸여 있을 수밖엔 없었다.
“크흐. 자, 그럼 다들 일어들 나자고.”
“예!”
저마다 벗어두었던 외투들을 집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내들.
그러곤 그것들을 상의에 걸치며 문밖으로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최윤섭 또한 그들을 뒤따라가던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얹어왔다.
“최 기자님?”
고갤 돌리니 이번 일을 특별히 더 신경 쓰고 있다는 김 프로, 그였다.
그가 최윤섭에게만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낮게 말을 뱉어왔다.
“아까는 별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긴 했는데, 실은 이번 일이 저한텐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라 말입니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는 사안이라. 특별히 좀 더 신경 좀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곤 최윤섭에게 봉투 하나를 내미는 그.
눈동자를 키우며 최윤섭이 쳐다보자, 그가 재빨리 웃어 보이며 최윤섭의 가슴 팍으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아아, 큰 건 아니니 부담 없이 받아두세요. 그냥 답례차 드리는 거니까. 하하.”
최윤섭의 어깨를 두 어번 두드리곤 곧바로 룸을 빠져나가 버리는 그.
지금껏 그들과 일하며 단 한번도 이런 일은 없었던 터라 최윤섭 또한 의아한 마음이 들 수밖엔 없었다.
‘VIP랑 뭐가 얽혀 있길래 개인적으로 이런 것까지…….’
이런 의아한 마음과 함께 또 하나 최윤섭의 머릿속으로 떠오르고 있는 한 가지.
바로 그의 진짜 모습에 대한 것이었다.
‘서울중앙지검 7급 수사관 류민우. 매일같이 법을 다루며 사는 인간이 그동안 이런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해오고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