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쨍그랑-!
최윤섭이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 잔이 그의 발 아래로 떨어졌다.
주변 시선이 일순 두 사람의 테이블로 달라붙은 가운데, 카페 종업원이 최윤섭에게로 다급히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손님? 바로 치워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최윤섭은 겨우 입술을 떼며 종업원에게 사과 말을 전했다.
“아, 죄송합니다. 깨진 잔 값은 좀 있다 나가면서 지불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다치지만 않으셨으면 돼요. 바로 치워 드릴게요!”
괜찮다는 말과 함께 종업원은 곧바로 밀대 자루를 가지러 갔고, 최윤섭은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려 구세희를 바라봤다.
“지금 그게 무슨…… 조금 전 제게 하신 말씀들…… 그게 정말 다 사실인가요, 구 사장님?”
조금 전 최윤섭에게 하준에 대한 얘길 꺼내놨던 구세희.
그 속엔 ‘제너럴’이란 사내들이 하준의 모친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까지 모두 포함돼 있었다.
물론 이 얘길 최윤섭에게 하는 게 맞을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 별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 현재 그 사내들과 가장 가까이, 그리고 또 가장 밀접한 만남을 가지고 있는 이는 오직 최윤섭 그밖엔 없었으니까.
그들의 존재를 뿌리째 뽑기 위해선 반드시 최윤섭 그가 자신의 편에 서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도 기자님을 꽤 오랜 시간 가까이에서 봐온 사람으로서 저는 기자님이 자의적으로 그런 선택을 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회사의 지시,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랬겠죠. 적어도 제가 아는 기자님은 절대로 그런 짓을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
제너럴의 얼굴이 찍힌 테이블 위의 사진들을 가리키며 구세희는 말을 이었다.
“거기 그 사람들, 그 제너럴이라는 모임이 정확히 무슨 짓을 위해 모이는 건지, 그리고 대체 왜 그런 짓들을 벌이고 있는 건지 정확히 알아야겠어요. 그리고 그들의 진짜 실체들까지도.”
자신의 앞에 놓인 냉수를 절반가량 들이켜고는 구세희가 낮게 덧붙였다.
“다시는 아줌마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그 인간들을 완전히 파멸시켜 버릴 수 있도록요.”
지금껏 그녀를 알아오는 동안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위압감 가득한 모습.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최윤섭은 그제야 하준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에게 이 일을 좀 더 이어가주길 바랬던 그의 부탁.
당시엔 그들이 그의 모친에게 어떠한 행동을 저지르진 않았다고 생각했기에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던 그것.
하지만, 구세희의 얘길 모두 듣고 나자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저, 구 사장님…… 그들이 유 대표님 모친께 정확히 어떤 짓들을 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는 여태껏 교통사고로 그렇게 됐다고만 알고 있어서…….”
“저도 정확한 것까진 알지 못해요. 다만, 아줌마를 죽음에 이를 정도로 그 인간들이 악랄한 짓을 벌인 것만은 분명하죠. 그때의 산 증인이 있으니까.”
“산 증인이라면 누굴…….”
하준의 모친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고. 거기에, 자신의 부친이 이 모든 일들에 대한 내막을 알고 있다는 것 또한.
애초에 자신이 이 모든 걸 다 떠안고 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자신의 목표는 오직 단 하나뿐이었다.
“그보다 아직 저한테 답을 안 주셨는데요, 기자님. 지금 하고 계시는 그 일, 앞으론 저를 위해 해달라는 말. 그래주실 수 있으실까요?”
최윤섭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찰 수밖엔 없었다.
그녀에게서 전해 들은 내용들이 온전히 다 정리되지도 않고 있을뿐더러, 자신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좀처럼 판단이 서질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두 사람의 목표는 같은 것 같은데…….’
제너럴이란 사내들과 맞서겠다는 두 사람의 목표는 분명 같아 보이는 상황.
하지만 구세희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어딘가 모르게 미묘했다.
하준과 구세희,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더욱.
최윤섭이 고갤 들어 구세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유 대표님은 전혀 모르고 계신 건가요? 그 일들에 대해?”
“네. 아직은요. 물론 언젠간 밝혀야만 할 일이겠지만.”
“흠…….”
구세희가 꺼낸 얘기들을 하준은 전혀 모르고 있는 거라면 대체 그는 왜 그들에게 접근하려고 했던 걸까.
그녀에게서 모든 얘길 듣고 난 뒤 그의 지난 모습들을 생각하자, 다소 의아한 마음이 들 수밖엔 없었다.
분명 마치 모든 걸 다 알고선 행동하는 듯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여전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구세희를 잠시 바라보다 최윤섭이 입술을 뗐다.
“만약 구 사장님이 하신 얘기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당연히 도와야겠죠. 믿으실진 모르겠지만 저도 이 일을 하는 내내 단 하루도 마음이 편했던 날이 없었습니다. 매일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요.”
“…….”
“만약 정말로 그들이 유 대표님의 모친을 그렇게 한 거라면. 정말로 그런 몹쓸 짓을 벌여서 그렇게 되신 거라면.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 일이죠. 그걸 알고도 제가 그들을 위해 일한다는 건 제 모든 걸 버린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고요.”
최윤섭의 얘기에 구세희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당분간은 지금 하시는 일을 계속 유지해 주셔야 돼요, 최 기자님. 그들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을 만한 증거를 확보할 때까진 최 기자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단순한 흠집 정도로 끝낼 게 아니라 완전히 파멸시켜 버리기 위해선 분명 그래야겠지요.”
“네.”
짧게 고갤 끄덕이곤 자신의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구세희.
그러곤 파일 하나를 최윤섭에게 건넸다.
“이건 그 사람들의 신상 정보들이에요. 아마 최 기자님께선 전혀 모르고 있을 내용들이겠네요.”
“……신상 정보라면.”
다소 놀란 듯한 얼굴 표정과 함께 최윤섭은 그녀가 건넨 파일을 곧바로 펼쳐 보였다.
그러자, 그곳엔 정말로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박힌 여러 장의 문서들이 쭉 나열돼 있었다.
게다가.
“이, 이걸 구 사장님이 어떻게…….”
얼굴 사진뿐 아니라 그들의 이름, 나이, 그리고 직업과 그 밖의 상세한 내용들까지 모두 포함돼 있었고.
그것들은 최윤섭뿐 아니라 썬데이 미디어의 고위 간부들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는 정보들이었다.
“구 사장님, 이 정보들이 정말로 다 신빙성이 있는 자료들인 건가요? 이걸 어디서 어떻게 구하신 건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최윤섭에게 구세희는 담담한 어투로 답했다.
“지난 20년간 조금의 빈틈도 없이 수집해 온 정보들이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최 기자님이 누군가의 인계를 받은 것처럼, 그들 또한 계속 바통을 이어받아 그 모임을 유지해 오고 있었더군요. 물론, 방식만큼은 쭉 같은 식을 고수하면서.”
구세희의 말을 귓바퀴로 주워 담으면서도 최윤섭의 해당 문서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최윤섭이 놀랄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그들의 직업.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향인 것은 물론, 무척이나 이질감이 드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하면서 그런 짓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충격적인 사실들에 최윤섭은 조금도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고, 구세희는 그런 그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지이잉-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던 최윤섭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을 울려왔고, 그와 동시에 액정화면 위로 메시지창 하나가 떠올랐다.
두 손에 든 문서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최윤섭은 잠시 휴대폰을 흘긋해 보이곤 그것을 일별했다.
그런데, 일순 동공이 커짐과 동시에 최윤섭이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긴 건 바로 그때였다.
[2000. SOS.]
분명 당분간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들과의 만남.
숫자와 영어의 조합으로 온 짧은 메시지는 그들이 자신을 호출 해올 때 늘 보내오던 그것이었고, 최윤섭은 심장이 거세게 요동칠 수밖엔 없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구세희가 곧바로 물어왔다.
“왜 그러세요, 최 기자님?”
“호출이에요. 오늘 밤 만나자는…….”
“호출이라면.”
최윤섭은 대답 대신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20시, 서울 여의도 숲. 항상 만나던 그 술집이에요.”
* * *
같은 시각, 서울중앙지검.
점심 식사 후 다소 한가한 분위기 속에서 민정훈 검사실 내부론 가벼운 대화들이 흐르고 있었다.
“에이, 말도 안 돼. 검사님이 그쪽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요! 만약 그랬으면 진작 그분이랑 축하 인사도 막 주고받고 그랬겠죠. 검사님 그런 통화하는 거 한번도 못 본 것 같은데요?”
말도 안 된다는 듯 믿지 못하는 8급 실무관 유혜림의 얘기에 민정훈이 들고 있던 일회용 종이컵을 내려놓고선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 참, 진짜라니까 그러네?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요? 나 그 사람 번호까지 저장돼 있다니까?”
민정훈이 곧바로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고, 그가 전화번호부를 뒤지는 동안 이묵한 계장이 유혜림에게 웃어 보였다.
“하하. 검사님 말 진짜야, 혜림 씨. 그분 때문에 검사님이 지금의 중앙 지검까지 오게 된 건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 말야.”
“에……?! 지, 진짜요? 아니, 그분이랑 우리 검사님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어서…… 그분은 너무너무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뭐야. 그럼 난 하나도 안 유명한 일개 평검사 나부랭이란 뜻인가? 그래서 그렇게 유명하신 분이랑은 아예 알고 지낼 급도 안 된다 이거지?”
유혜림은 부정인 듯 아닌 듯한 애매한 얼굴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흐음, 뭐 꼭 그렇다기보단…….”
“참나, 이것 보라고. 이렇게 번호도 저장돼 있잖아? ‘유. 하. 준’, 이름 세 글자 딱 보이지?”
민정훈이 내민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확인한 유혜림이 눈동자를 일순 키워왔다.
“지, 진짜네…… 와, 대박. 검사님이 어떻게 이런 분이랑…….”
“어떻게 이런 분이랑이라니! 그 말을 써야 할 주체가 바뀌어도 한참 바뀐 거 아닌가?! 8급 실무관 유혜림 씨? 응?”
“으흠…… 신기해서 그렇죠 뭐. 하루가 멀다 하고 밥 먹듯 매스컴에 나올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분이니까.”
“참나. 나도 우리 동네에선 최고로 유명하거든? 두북리의 자랑이라고 내가!”
다소 삐진 듯한 어투로 말을 내뱉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는 민정훈.
그러곤 모니터 화면 위로 띄워진 서류를 보며 이묵한 계장에게 물었다.
“류 수사관님 오늘 또 반차 쓰신대요? 점심 전까진 아무 말 없으셨던 것 같은데.”
“아, 예 검사님. 오늘 또 일이 생기셔서 쓰셔야 할 것 같다고. 아까 검사님께 올릴 서류 작성하고 계시더라고요.”
“흐음. 이거 너무 자주 쓰는 거 아닌가? 꼭 연차도 아니고 매번 반차를 쓴단 말이지.”
민정훈의 얘기에 유혜림이 안 그래도 신기한 게 있다는 듯 말을 꺼내왔다.
“근데 진짜 신기하단 말이에요? 꼭 류 수사관님이 반차 쓴 다음 날이면 막 대형 기사가 갑자기 터져 나온다니까요? 최근만 해도 벌써 몇 번 연속인지 모르겠어요. 우연치고는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뭐야. 그럼 류 수사관님이 뭐 기자 일까지 하면서 투잡이라도 뛰고 있단 소리야?”
“아뇨, 그렇다기보단. 그냥 너무 신기하다 이 말이죠. 반차 쓰는 다음 날마다 매번 이러니까 이젠 괜히 다음 날이 궁금해지고 그런다니까요?”
“흐음.”
유혜림과 이묵한 계장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민정훈의 표정 또한 사뭇 진지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조금 전 유혜림이 언급했던 얘기들은 자신 또한 이미 느끼고 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무원 월급에 그런 차를 타고 다니는 게 가능한 일인가?’
얼마 전 우연치 않게 목격한 그의 무척이나 다른 행동거지가 머릿속에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상태였기에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