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과 함께 일순 깜깜해져 버린 시야.
영상 파일 속 흘러나오던 소리도, 수화기 너머 들려오던 최윤섭의 목소리도 모두 사라져 버린 뒤, 하준의 눈앞으론 어떠한 장면 하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봐, 김 프로.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길래 이딴 기사가 터져 나온 거야? 이런 거 하나 못 막을 정도로 무능력한 사람이었나 김 프로가? 어?”
“……죄송합니다. 상무님껜 제가 어떻게든 빨리 수습하겠다고, 전혀 신경 쓰실 것 없다고 전해주시면…….”
“아,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버젓이 상무님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스폰을 했느니 어쨌느니 방송에서 그렇게들 떠들어대는데! 이게 지금 수습이 될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죄송합니다.”
창밖으론 정확히 어딘지 알 수 없는 둔치가 보이고 있는 가운데, 차량 뒷좌석으론 상반된 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바로 조금 전까지 영상 속에 비춰졌던 남자. 영상 속 최윤섭의 바로 맞은편에 있던 그의 얼굴이었다.
연신 죄송하단 말만 내뱉고 있는 그를 향해 중년의 한 남자가 담배를 꺼내 물며 말을 내뱉었다.
“후. 이번 일은 사안이 꽤 심각해요. 안 그래도 계열사 지분 때문에 이래저래 시끄러운 와중에 상무님 사생활 문제까지 터져 버렸으니. 아침부터 주주들 연락에 회장님 호출에 아주 진땀 빼고 난리도 아니었다고요.”
“…….”
“이번 거 제대로 수습 못 하면 나나 김 프로나 둘 다 끝장나는 겁니다. 상무님 경영 승계 과정에 조금이라도 브레이크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죠? 그냥 아사리판 나는 거라고요. 우리 둘 다 길거리에 나앉아서 손가락 빠는 모습 보고 싶어요? 예?”
“아, 아닙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실장님!”
“후. 이때다 싶어서 다른 형제들도 물어뜯고 난리도 아닌데. 아무리 상무님이 첫째라곤 해도, 회장님이라고 무조건 상무님 편만 들어줄 순 없을 거란 말입니다. 아, 흠이란 건 무조건 적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요?”
“예예. 그럼요, 실장님……!”
열린 창문 틈새로 담뱃재를 털어내곤 실장이란 남자가 낮게 물어왔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제너럴이 이렇게나 허술한 곳이었나요? 적어도 웬만한 방송사들은 죄다 꽉 휘어잡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장의 얘기에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곤 답했다.
“예…… 웬만한 방송사 뉴스 큐시트는 다 점검하고 내보내게 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은 저희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터져 나와 버려서. 게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건지도 알 수가 없고…….”
“흠. 제너럴 내부에 프락치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 큰 사건을 이렇게나 아무런 제재도 없이 그냥 팍 터뜨려 버릴 수가 있겠어요?”
실장의 말에 그가 격하게 부정을 해왔다.
“아닙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실장님! 다른 건 몰라도 저희 내부에 그런 건 절대, 일절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얘길 듣고난 실장이 대뜸 실소를 터뜨려 왔다.
“아, 없긴요. 그간 우리가 주고받은 것들을 생각하면 김 프로도 저쪽 입장에선 프락치나 마찬가지인 거 아닙니까? 강남 한복판에 아파트 한 채를 사고도 남을 그 돈들이 죄다 김 프로 주머니로 들어간 걸 알면 말입니다. 제 말이 틀렸나요?”
“…….”
부정할 수 없는 모양인지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곤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고, 실장이란 남자는 밖으로 담배 꽁초를 튕겨낸 뒤 그를 바라봤다.
“이번 일 제대로 정리 못 하면 나나 김 프로나 끝장이라는 말. 결코 그냥 한 소리가 아닙니다. 이건 단순한 사생활 문제를 떠나서 대한민국 최대 재벌가의 경영 승계가 걸린 문제예요. 상무님 커리어에 그 어떠한 흠집도 나지 않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막아야 한다 이 말입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 예. 실장님.”
“일단 상무님께선 그 여가수하고 완전히 정리하신다고 하니 이쪽에서도 전혀 모르쇠로 나갈 겁니다. 김 프로는 이 일이 어디서, 어떻게 새어나간 건지. 그리고, 그 방송사는 대체 무슨 의도로 그렇게 내보낸 건지 확실히 조사해 봐요. 만약 내부에 프락치가 있다면 반드시 정리해야 할 거고, 그쪽 방송사에서도 더 이상 이 일을 언급 못 하게 확실히 단도리 쳐놔야 할 거 아닙니까. 어디 일개 방송사가 대한민국 재벌을 저격합니까, 저격하기를. 내 말 알아 들었죠?”
“예, 실장님. 상무님 앞날에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도록 빠르고 확실하게 조치 취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같은 모임 사람들만 믿고 있지 말고 김 프로가 직접 움직여요, 직접. 아, 김 프로가 그동안 상무님께 받아간 돈이 얼만데. 밥값은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요?”
“……예, 예. 그럼요.”
“후. 무조건 신속하게 처리해야만 합니다. 그쪽 사장을 협박을 하든 아님 구워 삶든 방송에서 상무님 이름 다신 언급도 못 하게 해야 한다 이 말이에요. 그 순간 우리 둘 다 끝장이란 생각으로 움직이라 이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예……! 염려 마십시오 실장님.”
“후. 그럼 처리 끝내는 대로 연락 줘요. 밤이고 새벽이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실장이란 남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곤 그가 차량 뒷좌석을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검은색 고급 세단 차량은 흙먼지를 날리며 유유히 멀어져갔고, 그는 셔츠 맨 윗단추를 풀곤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이런 씨…… 대체 어디서 새어나간 거야?! 진짜 내부에 프락치가 있을 리도 없고.”
욕짓거리를 섞어 참았던 분노를 한꺼번에 쏟아내던 그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왔다.
“잠깐…… 프락치라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싶던 그는 이내 미간을 잔뜩 구기고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곧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이내 수화기에 대고 말을 내뱉었다.
“어, 난데. 최 기자한테 사람 하나 붙여봐. 아, 누구긴 누구야. 썬데이 미디어 최윤섭이지. 그놈이 누굴 만나는지, 만나서 무슨 얘길 나누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체크해 둬. 이번 일은 따블로 챙겨줄 테니까 절대 실수 없이 실시간으로 미행하면서 나한테 계속 보고하도록 해. 이 전화 끊는 대로 바로 시작하는 걸로 하고.”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며 자신의 차량 쪽으로 걸음을 옮겨나가는 그. 운전석에 다다라선 손잡이에 손을 뻗으며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 NTV 사장년. 그년에 대해서도 좀 캐내봐. 뭘 믿고 그렇게 설쳐대는 건지, 어디 구린 구석은 없는지. 만약 협박이 안 통하면 아예 두 발로 걸어 다니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릴 생각이니까 그년에 대해서도 되는 대로 샅샅이 다 캐내보란 말이야. 알겠어?”
통화를 끊고는 다시 한번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치곤 그가 운전석으로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앞의 장면들이 일순 사라져 버리며 하준의 시야가 원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일단 당분간은 모이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이번 MBS 사장 건이 좀 크기도 했고, 매번 같은 식으로 이슈를 덮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제가 보내 드린 영상은 대표님도 바로 삭제해 주세요. USB에 옮겨서 따로 제 개인 금고에 넣어두고 필요한 때가 오면 꺼낼 생각이니까. 아시겠죠, 대표님?
수화기 너머 최윤섭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동안, 하준의 얼굴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해져 있었다.
예지 속 두 사람의 대화를 접할 때만 해도 그저 단순한 사건 하나 정도로만 여겼던 하준.
하지만 말미에 흘러나온 그의 통화 내용들을 듣는 순간, 상당한 충격을 받을 수밖엔 없었다.
그가 언급한 ‘NTV 사장’이란 직함은 오로지 구세희 외엔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준은 곧바로 수화기에 대고 입을 열었다.
“최 기자님. 혹시 최근에 세희랑 따로 연락하거나 하신 건 없었나요?”
-구 사장님요? 아뇨. 따로 저한테 연 락온 건 없었는데요. 저도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먼저 연락드리지도 못했던 것 같고. 구 사장님은 갑자기 왜요?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 내용만으로는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긴 힘들었다. 다만, 홀로 남은 그의 통화로 미루어보건대, 분명 최윤섭과 구세희에 대한 어떠한 강한 의심을 가지고 있는 듯보였다.
그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위험한 조치를 취하려는 듯싶었고.
“최 기자님. 혹시 이번 제너럴과의 만남에서 별다른 얘기들은 없었나요? 예를 들면 어떤 여가수의 스폰 관련한 내용이라던가…….”
-스폰요? 아뇨, 그런 얘긴 전혀 없었는데. 그랬다면 제가 대표님께 먼저 말씀을 드렸겠죠. 지난번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신 하지 않게. 왜요, 누구 스폰 관련한 루머라도 떠도는 게 있나요?
최윤섭이 해당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건 그 시점이 지금은 아니라는 것.
게다가, 구세희와는 그 어떠한 연락을 취한 것도 없다고 했으니.
그럼 대체 조금 전 장면들은 어느 시점에 일어나는 걸까.
하준은 짧게 숨을 내뱉곤 최윤섭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본 겁니다. 영상은 말씀하신 대로 바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모임 일정에 대해서 전해오는 게 있으면 바로 말씀 좀 부탁드릴게요, 최 기자님.”
-예, 그럼요 대표님. 아무쪼록 이놈들한테 크게 한 방 날릴 수 있을 때까진 저도 긴장의 끈 놓지 않고 있겠습니다. 대표님도 항시 조심하시고요. 아시겠죠?
“네. 그럼 들어가세요, 기자님.”
-예, 대표님!
최윤섭과 통화를 끊고는 모니터 속 정지된 화면을 바라보는 하준.
그 속엔 조금 전 미래 예지의 그가 술잔을 들곤 치아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 머지않는 미래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그리고, 그는 대체 왜 구세희를 캐내려고 하는 걸까.
모니터에서 시선을 뗀 하준은 휴대폰 액정화면을 터치했다.
그러곤 최윤섭과의 통화를 시작하기 전 눌러두었던 구세희의 번호를 바라봤다.
‘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지.’
* * *
지이이잉-
지이이잉-
같은 시각, 영신 G&M 사옥 근처의 한 커피숍.
테이블 위로 휴대폰 진동이 일고 있는 가운데, 구세희는 최 비서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하준이한테 온 전화 같은데. 안 받으려고?”
액정화면 위로 떠 있는 하준의 이름을 보곤 최 비서가 물었고, 구세희는 휴대폰을 뒤집으며 말했다.
“네, 지금은 이게 더 중요해서.”
말을 마치곤 테이블 중앙으로 시선을 옮기는 구세희. 그곳엔 조금 전 최 비서가 내민 여러 장의 사진이 펼쳐져 있었다.
“이게 그 사람들이란 거죠? 제너럴인가 하는.”
“응. 세희 네가 얘기하기 전부터 나는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긴 했는데…….”
말을 내뱉곤 최 비서가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구세희를 바라봤다.
“이게 맞는 일인진 모르겠구나. 세희야. 회장님께서도 이 사실을 알면 분명 크게 노하실 거고. 회장님이 그렇게 숨겨오신 이유는…….”
“알아요. 하준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거. 그래서 최 비서님을 시켜서 계속 그쪽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던 거고.”
“…….”
“저도 하준이를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 하준이한테 조금이라도 덜 미안하고 싶어서.”
그녀의 얘기에 최 비서는 짧은 숨을 내뱉었고, 구세희는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들을 집어 하나씩 훑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어? 이건.”
한 장씩 넘겨가던 구세희의 시선이 어느 한 장에 멈추어섰다.
그러곤 미간까지 구겨가며 꽤나 유심히 살피던 구세희가 이내 눈동자를 급격히 키워왔다.
“최 비서님. 이 남자는 뭐예요? 왜 찍으신 거예요?”
구세희가 가리키는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곤 최 비서가 낮게 답했다.
“그 남자가 지금 그들의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거든. 썬데이 미디어에 최윤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