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푸하. 얘네 주말 내내 저한테 연락 와 가지곤 묻더니. 결국 대표님한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기로 결정했나 보네요? 하여튼 웃겨, 진짜.”
월요일 오전, ENP 대표실.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하준의 옆으론 김지혜가 그의 휴대폰 액정화면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아니, 저한테 주말에 연락 와서 계속 물어보더라고요. 자기들이 어떻게 벌써 정산을 받을 수 있게 된 거냐고, 받은 금액도 너무 큰데 혹시 뭐가 잘못된 거 아니냐면서요. 잘 들어간 거 맞고 아무 문제 없다고 그렇게 얘길 해줘도 애들이 수긍할 기미를 안 보이더라니까요?”
하준의 휴대폰 액정화면 위로 떠 있는 멤버들의 메시지 내용들을 훑으며 김지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어쨌든 대표님이 결정한 거고 나도 자세한 것까진 잘 모르니까, 대표님께 감사 인사나 꼭 따로 전하라고 했더니. 풉, 이건 무슨 거의 연애소설 수준인데요? 이거 쓰는 데만 최소 몇 시간은 걸렸겠네.”
김지혜가 하준의 앞으로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으며 물었다.
“대표님은 이거 하나하나 다 읽어보셨어요? 다섯 명 거 다 읽으려면 시간 꽤 걸리셨겠는데요?”
김지혜의 물음에 하준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짧게 답했다.
“확인은 다 했지. 읽은 건 첫 문장이랑 끝 문장들만이었지만.”
“에? 에이, 그건 좀 심했다! 애들 메시지 보낸 시간 보니까 아주 새벽 내내 감성에 젖어서 썼을 것 같은데. 좀 낯간지러우시더라도 다 읽어 보시지!”
너무했다는 김지혜의 얘기에도 불구하고 하준은 여전히 같은 태도를 취했다.
“물론 이게 처음 있는 일이라면 나도 그랬겠지만, 이런 메시지를 보내온 게 한두 번이 아니라. 거의 격주 꼴로 이런 걸 보내오거든.”
하준의 얘기에 김지혜가 입을 반쯤 벌리며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컥, 격주씩이나요……? 그럼 그때도 매번 이렇게 초초초초 장문이었던 거예요, 설마?”
대답 대신 옅게 웃어 보이는 하준의 모습에 김지혜는 또 한 번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그러곤 하준의 앞에 놓인 빈 커피잔을 챙기며 말했다.
“어휴. 하여튼 걔네 그렇게 순딩순딩들 해가지곤 이 험한 연예계 생활을 어떻게 해 갈는지. 벌써부터 우려가 됩니다, 우려가 돼. 커피 한 잔 더 가져다 드릴까요?”
“응, 그래주면 고맙고.”
“네엡!”
명랑하게 고갤 끄덕이곤 김지혜가 대표실을 빠져나갔고, 하준은 모니터 위로 떠 있는 파일들을 하나씩 정렬하기 시작했다.
“…….”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된 기사의 스크랩들. 그리고 그 옆으로 작게 붙어 있는 짧은 메모들.
화면 위의 모든 자료들은 주말 동안 최윤섭으로부터 받은 것들이었고, 하준은 꽤나 진지한 얼굴로 그것들을 훑어가고 있었다.
‘보기엔 주로 정치적 이슈들만 가리려는 것처럼 보여도,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자신들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배반될 것 같으면 그게 어느 분야든 따지지 않거든요. 그 사람들하고 엮여 있는 인물들도 정치인뿐만 아니라 꽤나 방대하게 퍼져 있는 것 같고요.’
그들의 직업, 이름, 그리고 그들과 엮여 있는 이들에 대한 그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한다는 최윤섭.
오로지 그들은 철저한 갑의 입장으로서 썬데이 미디어에 요구사항을 전달해 오고, 썬데이 미디어는 그들의 그런 요구들을 신속하면서도 확실하게 처리해 왔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 20년간 이어왔던 이 일의 실무를 담당하는 이가 바로 지금의 최윤섭이었고.
‘기삿거리가 없어서 내보내지 않는 게 아니에요. 적절하면서도 필요한 때에 맞춰 터뜨리려고 전부 다 묵혀두고 있는 것뿐이지. 그 사람들을 위해 쓰는 자료들은 바로 이 창고 안에서 선별하는 것들이고요.’
작은 열쇠 하나를 꺼내 보이며 자신에게 창고 안 자료들에 대한 얘길 꺼내왔던 그.
수많은 연예인들의 사적인 내용뿐 아니라, 이 바닥에서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바로 그 창고 안에 차고 넘칠 정도로 쌓여 있다고 했다.
그저 적절한 보도 시기를 위해 지금은 터뜨리지 않고 조용히 묵히고 있는 것뿐이란 말과 함께.
그리고, 그런 자료들 중 충분히 이슈가 되고 단번에 이목을 끌 수 있는 것들은 따로 분류해 그들의 요구에 맞춰 쓰고 있다고도 했고.
바로 이번 MBS 사장 추문 사건 때처럼.
‘혹시 모친의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자칫 그 사람들의 희생양이 될 뻔하셨단 제 얘기 때문에.’
그들과의 만남을 좀 더 이어가 주길 부탁한 하준의 말을 받아들이면서 최윤섭은 그의 의중을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비록 그들의 타깃이 되었던 건 맞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 실제로 모친에게 그런 일이 발생한 건 아니었기에 하준이 굳이 그들에 대해 깊이 알아야 하는 건가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어떤 존재들이고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들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하준을 걱정하는 마음이 앞설 수밖엔 없었을 거고.
하지만, 언제인지 모를 분명하고도 확실한 미래를 본 하준은 그들에 대해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최윤섭은 단지 타깃이 된 것에 그쳤다고 했지만, 미래 예지 속 그들이 나눈 대화는 결코 그런 유의 것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리고, 만일 그들이 언급한 ‘신인 여배우’가 자신의 모친이라면.
만에 하나 그게 정말 이수연이었다는 걸로 밝혀지게 돼버린다면.
하준은 결코 그들을 용서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자신의 모든 걸 다 걸어서라도.
똑똑.
“대표님, 여기 커피요!”
다소 심각해진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하준은 다시 대표실로 들어온 김지혜로 인해 그것들을 잠시 멈추었다.
“고마워. 잘 마실게.”
“네엡. 오늘은 애들도 스케줄 없고 따로 계약 건도 없는 날이라 사무실이 되게 여유로운데요? 대표님도 오늘은 별다른 일정 없으시죠?”
김지혜의 물음에 하준은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곤 낮게 고갤 끄덕였다.
“응, 그럴 것 같네.”
“그럼 좀 이따 점심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뭣 좀 사다 드릴까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싶던 하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고갤 내저었다.
“아니. 오늘 점심은 내가 알아서 먹을게. 식사 약속이 잡힐 수도 있어서.”
“아하. 네! 알겠습니다. 그럼 따로 호출할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 대표님!”
“그래.”
하준에게 인사를 건네곤 김지혜가 다시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그와 동시에 하준은 자신의 앞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지난번 NTV 로비에서의 통화 이후 이렇다 할 연락을 취해오지 않았던 구세희.
그저 요즘 바빠서 정신이 없다는 짧은 문자 메시지 한 통을 제외하곤 하준이 건넨 답장에 대한 어떠한 답변도 보내오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세련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최근 들어 갑자기 연차를 쓰는 날이 많아지기도 했다고.
“흠…….”
대체 무슨 일인 걸까.
20년을 거의 한 가족처럼 지내오는 동안 구세희의 이런 모습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지난번 로비에선 자신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듯한 모습까지도 보였었고.
아무래도 직접 만나 얼굴이라도 봐야 할 것 같단 생각에 하준은 그녀의 번호를 키패드에 입력해 나갔다.
그런데, 마지막 번호를 입력하려던 그때 하준의 휴대폰 액정화면으로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 네. 최 기자님.”
-예, 대표님. 출근은 잘 하셨죠? 혹시 지금 잠깐 통화 괜찮으실까요?
평소의 그와는 달리 꽤나 톤을 낮춘 상태로 조곤조곤 말을 내뱉어오는 그.
하준은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자세를 고쳐 잡곤 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지금 대표님 메일로 파일 하나를 보냈는데 혹시 확인 가능하실까 해서요.
“아, 네 잠시만요.”
하준은 휴대폰을 잡고 있던 손의 방향을 바꾸곤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러곤 메일을 열자, 그의 이름으로 메일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후, 제가 진짜 목숨 걸고 미친 짓 한번 해봤습니다. 어차피 대표님이랑 그러기로 한 거, 저도 아예 과감하게 나가봐야겠다 싶더라고요. 끝낼 땐 끝내더라도 저도 패 하나 정돈 휘둘러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우.
하준이 메일 속 파일을 여는 동안 최윤섭은 꽤나 긴장과 초조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로 숨을 내뱉어왔다.
하준은 화면 위로 재생되고 있는 영상들을 보고 나자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거 어떻게.”
-후, 진짜 미친 짓이다 싶죠? 허허. 용산에 상가들 싹 다 뒤져서 절대 걸리지 않을 것 같은 놈 하나 골라가지곤, 웃돈 엄청 얹어서 구한 거예요. 시계에 작업해서 가니까 전혀 눈치도 못 채더라고요. 후, 혹시나 걸릴까 싶어 어찌나 간이 떨리던지.
“…….”
최윤섭의 말을 귓바퀴로 담으며 하준은 화면 속 영상을 무척이나 심각한 얼굴로 바라볼 수밖엔 없었다.
모니터 위로 흘러나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에.
지난주 ‘제너럴’과의 모임을 위해 여의도로 향했던 최윤섭.
지금의 영상은 아마도 그때 찍은 게 아닐까 싶었다.
-이게 초소형 크기로 제작하다 보니까 유지 시간이 그리 길지는 못하더라고요. 그래도 얼굴 정도라도 찍어두면 나중에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떻게, 당연히 아는 얼굴은 없으시겠죠?
최윤섭의 물음에 하준은 여전히 그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짧게 답했다.
“네. 룸 안이 어두워서 제대로 식별이 안 되기도 하고요.”
-보시다 보면 중간에 한 번 제대로 보이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제가 실수인 척하고 일부러 룸 안에 조명을 최대로 올려 버렸었거든요. 그때 보시면 그놈들 얼굴 면면을 아주 제대로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대표님.
하준은 다소 어두운 영상 속 화면을 계속 집중해 나갔다.
물론 그가 말한 순간이 와서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다고 한들, 그게 별다른 의미는 갖지 못할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아는 얼굴은 없을 게 분명했으니까.
[하하하. 자, 이번 일도 잘 마무리해 주신 우리 최 기자님을 위해 다 같이 건배 한번 하자고. 다들 뭐 해? 잔들 안 채우고.]
어두운 분위기 속 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의 말과 함께 주변 이들이 잔을 채우기 시작했고, 곧이어 여섯 개의 팔들이 허공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최윤섭이 말한 그 순간이 시작된 건 바로 그때였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환풍기를 좀 켠다는 게 그만.]
3초도 안 되는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최윤섭의 목소리와 동시에 룸 안의 조명이 환하게 바뀌었고.
그와 함께 여섯 명의 사내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하, 우리 최 기자님이 아직 여기가 익숙지 않나 봅니다? 매번 같은 장소에서 모이는 건데도 구조를 모르시니. 하하.]
그런데, 그 순간.
조명 빛이 다시 서서히 어두워짐과 동시에 최윤섭의 바로 맞은편에 있던 남자가 말을 내뱉어 왔다.
곧 그의 하얀 치아가 다시 어두워졌고.
하준에게 이상 현상이 발생한 건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