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하준이 내민 액정화면을 훑어가던 신호진의 얼굴 표정이 급격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거…… 뭡니까?”
휴대폰을 거두고는 하준이 그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거 같아서요. 이번 신호진 씨 섭외 관련해선 감독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한 일인 것 같던데. 아닌가요?”
감독의 요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출연을 결정했다던 신호진.
하지만, 조금 전 하준의 휴대폰 액정화면에 띄워진 메시지의 내용들은 그것을 모두 뒤집어 버리는 얘기들이었다.
신호진이 미간을 잔뜩 구기며 하준에게 물었다.
“이거 감독님이 직접 보낸 거 맞습니까? 감독님 번호 맞아요?”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통화해 보시죠. 아니면 뭐, 저 문만 나가도 바로 계실 테니 직접 확인해 보셔도 될 거고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는 하준의 당당한 태도에 신호진은 일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러곤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듯 하준을 바라봤다.
“하, 지금 자기들 작품에 도움 주려고 바쁜 시간까지 쪼개서 나온 사람한테 이딴 대우가 말이 됩니까? 내가 무슨 보조 출연자들도 아니고 집으로 돌아가란 얘길 이딴 식으로 전해요?”
붉어진 얼굴빛을 하고선 신호진이 겉옷을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곤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하준을 노려봤다.
“하, 이런 대우를 당하고도 내가 가만있을 것 같아요? 출연료도 안 받고 호의로 나왔다가 제대로 갑질당했다고 다 폭로할 겁니다. 그럼 이 쓰레기 같은 작품은 물론이고, 당신 밑에 있는 윤채경도 제대로 이미지 바닥 치겠죠. 어디 한번 갈 때까지 가봅시다, 예?”
목소리가 울릴 정도로 언성을 높여가며 협박을 해오는 그의 모습에 하준도 기다렸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네, 그러시죠. 그런 지저분한 쪽이라면 저도 얼마든 대응해 줄 용의가 있습니다. 이쪽도 신호진 씨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들이 꽤 많아서요.”
하준이 꺼낸 얘기에 신호진이 비소를 날렸다.
“나에 대한 정보요? 하하. 이봐요, 대표 양반. 그렇게 아무 말이나 막 내던진다고 없던 자존심이 챙겨지는 거 아닙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그쪽 말을 믿겠어요, 내 말을 믿겠어요? 조명 좀 받았다고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래 봤자 고작 구멍가게 같은 엔터 대표밖에 안 되는 양반이 무슨 힘이 있다고. 참나.”
말을 내뱉곤 휴대폰을 꺼내는 신호진. 그러곤 곧장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정말 신호진 씨에 대해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신호진이 수화기 너머 상대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던 때, 하준이 그에게 질문들 던졌다.
그러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친한 기자분들이 몇 분 계셔서 따로 신호진 씨에 대해 아는 게 없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하나같이 다 탄식들을 내뱉어오더군요. 아마 조만간 터질 게 터져서 밑바닥을 치게 될 거라고.”
하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화기 너머 상대의 목소리가 얕게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표정이 굳어 버린 신호진은 휴대폰을 그대로 종료시켜 버리곤 하준을 쳐다봤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터질 게 터질 거라니.”
“아마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실 텐데요. 그간 신호진 씨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한둘이 아닐뿐더러, 그 사람들이 소속사에 사과 요구 및 고발 의사까지 전했다고 하던데. 설마 여태껏 모르고 계셨던 건 아니죠?”
“…….”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듯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곤 눈동자를 굴려대는 신호진.
하준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었다.
“만약 지금껏 모르고 계셨다면 소속사에선 무대응으로 안일하게 대처하고 신호진 씨에게도 따로 전달을 안 했던 거겠군요. 그럼 당연히 피해자들이 방향을 돌릴 곳은 언론사밖에 없었을 거고요.”
“…….”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가 모르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적절한 시기를 노리고 있던 것뿐이지. 신호진 씨에게 훨씬 더 큰 타격이 될 수 있고, 보다 더 큰 이슈거리를 만들 수 있는 그런 시기 말입니다.”
하준은 땅에 떨어진 그의 외투를 집어 그에게 건네며 낮게 덧붙였다.
“신호진 씨가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요.”
“…….”
줄곧 당당하면서도 뻔뻔한 태도를 보여오던 그는 하준의 연이은 말들에 전혀 다른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모두 다 진실인지 아닌진 알 수 없지만, 만에 하나 사실이기라도 한다면 그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돼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그가 그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이라도 하게 된다면 더더욱 그럴 수밖엔 없을 테고.
굳어 버린 얼굴 사이로 신호진은 간신히 입술을 떼며 물었다.
“정말입니까? 기자들이 다 알고 있는데도 안 터뜨리고 있다고요?”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제가 출처를 얻은 곳은 썬데이미디어와 뉴엔미디어, 두 곳이었습니다. 물론 국내에서 가장 손꼽히는 두 연예 매체가 이미 알고 있고, 그 시기에 대해서만 논의 중이라면 아마 손을 써보기엔 이미 늦은 것 같긴 하지만.”
하준의 얘기에 신호진이 다급해진 표정을 하고선 하준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혹시 친한 기자분들입니까? 대표님한테 이런 얘기까지 해줄 정도면 보통 사인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 그 대표님이…….”
어느새 ‘대표 양반’에서 ‘대표님’으로 호칭을 달리한 그.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무슨 말을 꺼내려는 듯하면서도 쉽사리 내뱉지 못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하준이 말했다.
“혹시나 뭔가를 부탁하려고 하시는 거라면 죄송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저 구멍가게 같은 엔터 회사의 대표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요.”
“아, 아뇨, 대표님!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던 이유는…… 그러니까, 그. 그. 겸손, 겸손하단 뜻이었습니다. 그렇게나 능력 있으신 분이 그냥 큰 곳을 인수해 버렸어도 되셨을 텐데 직접 밑바닥에서부터 손수 키우시는 모습 때문에요! 전혀, 전혀 오해는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표님!”
이미 자존심 따윈 버린 지 오래인 듯한 그는 다급한 어투로 곧바로 하준에게 부탁을 해왔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대표님 새끼인 것도 모르고 수작을 부려보려고 했었습니다…… 그 친구에겐 제가 진심으로 사과도 하고 오늘 촬영도 열심히 임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 기자님들하고 만남 한 번만 주선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직접 만나서 다 하나하나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대표님…….”
불과 5분 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괜한 자존심만 더 부렸다간 자신의 배우 커리어 전체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수도 있을 만한 얘기들이었으니까.
이번 드라마에 단발성 출연을 함으로써 자신의 주 코어층을 좀 더 넓혀보려는 그의 시도가 물거품으로 돼 버리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사정일 뿐.
애초에 이곳에 발을 디딛 순간부터 하준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 따윈 없었다.
비단 이슬아의 일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당한 피해자들 또한 분명 다수일 것이기에.
게다가 조만간 그에 대한 기사들이 터져 나온다는 건 자신이 지어낸 말이 아니었기에, 그를 이대로 출연시키는 건 자폭행위나 마찬가지였고.
눈가에 옅은 주름을 찌그러뜨리며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신호진에게 하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한테 사과하실 건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앞으로 험한 연예계 생활에 적응하려면 이 정도 액땜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물론 그 친구 또한 이런 일로 쉽게 꺾일만한 친구도 아니고요.”
왼쪽 손목을 들어 시간을 잠깐 확인하곤 하준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부탁하셨던 일은 제가 들어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아까도 말씀드렸듯 제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도 아닐뿐더러, 친분이 있다고 해서 사적인 걸 따로 부탁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그러다 정작 필요할 땐 도움을 요청 못 할 수가 있어서.”
“……대표님, 그러지 마시고…….”
“그리고 출연 취소 건에 대해 혹여나 불쾌하신 게 있다면 감독님과 한번 얘길 나눠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본인을 통하지 않고 제작사에 압박을 넣어서 진행했다고 꽤 불쾌해하고 계시는 중이라서요.”
할 말을 모두 마친 하준은 그에게 가볍게 고갤 숙여 인사를 건네곤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대, 대표님! 이렇게 그냥 가버리시면 어떡하라고…… 대, 대표님!!”
등 뒤로 들려오는 그의 다급한 목소리를 일별하곤 하준은 그대로 분장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그곳엔, 여전히 촬영용 메이드 복장을 한 채로 이슬아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음, 내가 아까도 얘기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선 그런 얼굴로 그런 얘기 꺼낼 필요 없다고. 만약 내가 뭐가 죄송한지 물으면 바로 대답할 수 있겠어?”
“…….”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 이슬아를 보며 하준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것 봐. 애초에 네가 죄송할 게 하나도 없는 일이야. 그냥 어른들의 세계가 이렇구나, 이 바닥이 이만큼 험한 곳이었구나, 그냥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털어 버리면 돼. 앞으론 이보다 더한 일도 많을 테니까.”
“네……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이슬아에게 한번 씨익 웃어 보이곤 하준이 주변을 훑었다.
“근데, 채경 씨는? 촬영 들어간 건가?”
“아, 아뇨. 지금까지 계속 같이 계시다가 잠깐 전화 좀 받고 오시겠다고 가셨어요. 애들한테 걸려온 전화 같던데.”
“애들?”
이슬아가 애들이라고 가리킬 만한 존재는 멤버들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하준이 윤채경의 분장 대기실 쪽을 바라보던 때, 윤채경이 대기실 문을 열곤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곤 미소인지 아닌지 단번에 알아차리기 힘든 묘한 얼굴 표정을 하고선 하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대표님! 저한텐 왜 얘기 안 하셨어요?”
“네? 뭘.”
“뭐라뇨! 오늘 방송 하는 거요! 휴, 지호가 전화 안 해줬으면 내일이고 모레고 계속 쭉 모르고 있을 뻔했잖아요. 지금 실시간으로 완전 난리 났다는데!”
다소 갑작스러운 윤채경의 얘기들에 하준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선 그녈 바라봤다.
그러자 윤채경이 자신의 휴대폰 액정화면을 얼굴 바로 위로 내밀며 격앙된 목소리를 꺼내왔다.
“이것 보세요! 지금 MBS 시청자 게시판뿐만 아니라 실시간 톡 반응도 완전 대박이래요,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