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매니저의 입에서 이슬아란 이름이 흘러나오자, 윤채경은 한층 더 눈동자를 키우며 물었다.
“슬아? 슬아가 왜.”
그녀와 함께 있던 하준 또한 매니저의 얼굴을 다소 심각하게 바라봤다.
곤란함과 다급함이 섞인 듯한 그의 표정과 어투는 물론, 그것들을 동반하면서까지 이슬아의 이름을 내뱉어온 연유를 떠올리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이 촬영장 내에선 가장 존재감이 미비할 수밖에 없는 그녀였기에 더더욱.
매니저 이윤철이 하준과 윤채경을 번갈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그게…… 지금 슬아가 다른 대기실에 들어가 있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아 보여서요. 민정 씨가 혹시 모르니까 무슨 얘기 하는지 몰래 좀 들어보라 해서 듣고 있었는데…….”
“뭐? 슬아가 누구 대기실에 들어가 있는데? 걔 이번 신이 마지막이었잖아?”
말을 내뱉곤 윤채경이 답답하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윤철에게 다가갔다.
“빨리 얘기 안 해? 슬아가 지금 누구 대기실에, 왜 들어가 있는 건데, 어? 그리고 뭐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거고.”
윤채경의 채근에 이윤철이 주변을 잠시 훑고는 낮게 말을 꺼내왔다.
“신호진 선배님 방에요. 조금 전 신 끝나고 슬아랑 잠시 뭘 얘기하는 것 같더니 대기실로 둘이 같이 들어가더라고요. 민정 씨가 혹시 모르니까 저보고 문 앞에 가서 들어보라길래 저도 가서 몰래 엿들었는데…….”
“그랬는데?”
“그게…… 막 이상한 얘길 자꾸 하는 것 같더라고요. 문이 닫혀 있어서 제대로 들리진 않았는데 교감이 어쩌고 하면서 좋은 배우가 되고 싶으면 자기한테 따로 많이 배워야겠다고…… 따로 시간 내줄 테니까 언제 술 한잔하러 오라면서.”
이윤철이 내뱉는 얘기들에 미간이 급격히 구겨져가는 윤채경.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려는 듯한 어투로 이윤철에게 물었다.
“어디로 오라 그랬는데. 설마 집이야?”
윤채경의 물음에 이윤철은 곤란한 얼굴을 하고선 고갤 살짝 끄덕여왔고, 윤채경은 깊은 숨을 내뱉었다.
“후우. 그 개자식 또 시작이네.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마치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들고 있던 대본을 소파 위로 던져 버리는 윤채경에게 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이런 일이 또 있었습니까?”
“후, 네. 그 선배, 아니, 그 자식 그러는 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요. 지보다 힘없고 약한 신인 여배우들만 골라서 어떻게든 수작 부려 보려고 아주 난리 치는 인간이거든요. 하, 그래도 단역한테까지 이럴 줄은 몰랐는데. 진짜 분리수거도 안 될 쓰레기 같은 놈이었네.”
윤채경의 얘기에 하준도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윤철이 처음 얘길 꺼냈을 때만 해도 혹시나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도 그럴 게, 배우로서의 신호진의 이미지는 무결점 그 자체였기 때문에.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흔히 얘기하는 A급 톱스타의 부류는 아니었지만, 깔끔하면서도 젠틀한 이미지로 최근 몇 년 새 특정 코어층 사이에선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주말 드라마계에선 A급, 아니, S급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이번 드라마의 고정 출연도 아닐뿐더러, 깜짝 출연 형태로 단발성 출연이었기에 하준은 당연히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가질 수밖엔 없었던 거였고.
“후, 가자. 선배도 선배 같아야 대우든 대접이든 해주는 거지. 다른 데에서 뭔 짓을 하든 상관없는데, 내 촬영장에선 절대 용납 못 해. 그것도 내가 직접 데리고 온 애면 더더욱. 내가 오늘 그 인간 망신살 제대로 뻗치게 해준다.”
작정이라도 한 듯한 얼굴로 윤채경이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나갔다.
그때, 하준이 윤채경을 불러세우며 말했다.
“채경 씬 여기 계세요. 제가 가보겠습니다.”
“……대표님이요? 대표님은.”
윤채경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아는 하준은 그녀의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답했다.
“애초에 슬아한테 그런 조건을 달았던 이유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선입견도 갖지 않길 바래서였습니다. 어디까지나 ‘같이 작업하게 될’ 분들에 한 해서요.”
하준이 윤채경의 바로 앞에 서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덧붙였다.
“채경 씨가 얘기한 것처럼 그런 부류의 인간이라면 앞으로도 같이 일하게 될 일은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그럼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고요.”
“……아.”
표정없는 얼굴을 하고선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어투였지만, 그 안에선 왠지 모를 강한 위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윤채경은 잠시 그의 눈을 마주하다 수긍의 의사로 고갤 낮게 끄덕였다.
“네, 대표님. 그럼 쓰레기 처리 좀 부탁드릴게요.”
잠시 후, 신호진의 분장 대기실 앞에 선 하준의 귓바퀴론 열린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오고 있었다.
“후, 너 말귀 못 알아듣냐? 그런 머리로 배우 할 수 있겠어? 남녀 사이에 교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지금껏 입이 닳도록 설명했잖아, 어?! 하, 안 그렇게 생겨놓곤 애가 왜 이렇게 멍청하지?”
“저…… 무슨 말씀이신진 알겠는데요 선배님. 그래도 선배님이 말씀하신…….”
“선배라고도 부르지도 마, 이년아. 단역 주제에 좋은 배우가 되려는 노력도 안 하면서 선배는 무슨 선배야?”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 하루만 찍고 가는 거라 그냥 유하게 넘어가줄랬는데. 너 하는 꼴 보니까 도저히 용납이 안 되네. 너 그냥 집에 가라. 너 땜에 도저히 몰입이 안 된다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달라고 내가 얘기할 거니까.”
“서, 선배님.”
이슬아의 성격상 분명 거절의 의사를 계속 내비쳤을 터. 그런 이슬아의 태도에 신호진은 이젠 회유가 아닌 겁박의 형태로 모양새를 바꾼 듯싶었다.
더 들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아 하준은 곧바로 대기실의 문을 밀곤 안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뭐야? 내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한 거 못 들었어? 지금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나가요.”
하준을 발견한 신호진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말을 내뱉어왔고, 그 옆에 서 있던 이슬아 또한 하준을 발견하곤 놀란 표정을 지어왔다.
“죄 지었어?”
신호진의 말을 무시하곤 하준이 이슬아를 향해 물었고, 신호진이 한층 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이봐요. 내 말 못 들었어요? 내가 방금 나가라고 했잖아. 당신 나 누군지 몰라?”
이번에도 역시나 하준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않은 채 이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태도는 예의를 갖춰야 할 상대한테만 보이는 거야.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한테 그런 얼굴도, 그런 말들도 할 필욘 없는 거고.”
“……대표님…….”
이슬아의 입에서 내뱉어진 대표라는 말에 신호진이 그제야 하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곤 이내 누군지 알아본 듯한 얼굴 표정을 보이고선 작게 실소를 터뜨려왔다.
“하, 뭐야. 너 저 사람이랑 아는 사이었어? 그럼 너도 팔도인가 뭐시긴가 하는 거기 소속이었던 건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 이슬아에게로 다가가 하준이 낮게 내뱉었다.
“채경 씨한테 잠깐 가 있어. 여기 끝나는 대로 데리러 갈 테니까.”
“……아. 네, 대표님.”
이슬아가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나가자 신호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어왔고, 하준은 그녀가 완전히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신호진을 바라봤다.
“고작 단역밖에 안 되는 여배우한테 긴히 할 중요한 얘기란 게 어떤 건지, 저도 궁금하네요. 그 얘기 대신 저한테 해주시죠.”
“하하. 아~ 그러니까 쟤가 지금 당신네 소속이고 당신은 쟤를 보호하러 여기에 왔다 이건 거지? 나참, 어이가 없어서.”
줄곧 의자에 앉아 있던 신호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준과 동등한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곤 하준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어이, 여기저기서 하도 떠들어대길래 어떤 사람인지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닌데 말야. 자만이든 객기든 사람 봐가면서 하자고, 응? 나 누군지 알잖아, 내가 이 촬영장에 왜 오게 됐는지도.”
낮게 말을 내뱉은 그가 다시 하준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서며 양쪽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같은 신 찍게 된 배우한테 합 한번 제대로 맞춰보자고 따로 불러서 얘기한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나 여기 감독님이 하도 부탁해서 나온 게스트야, 게스트. 한 신을 나오더라도 제대로 보여야 하는 게 바로 내 역할이라고. 근데, 고작 저런 단역이 내 연기에 방해가 되면 당연히 한마디 할 수 있는 거 아냐? 어? 안 그러냐고.”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뻔뻔하게 말을 내뱉어오는 그의 말들에 하준은 큰 동요 없이 천천히 고갤 주억거렸다.
그러곤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어디까지나 좋은 연기를 펼치기 위해 그랬단 얘기이신가요? 그게 곧 이 작품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셨던 거고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요?”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치며 ‘딱’ 소리와 함께 그가 웃음을 지어왔다.
“그럼, 그럼. 바로 그거지! 역시 대표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대화가 훨신 수월하구만. 암튼, 나가는 대로 애 교육 좀 똑바로 시켜요. 선배가 뭘 얘기하면 수긍할 줄을 알아야지, 그저 뻣뻣하게 뻐튕기기나 하고 말야. 쯔쯧, 이 바닥에서 여배우로 살아가려면 마인드부터 바꿔야 한다고 대표님이 똑바로 알려주세요. 쟤가 잘돼야 대표님도 잘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 안 그래요?”
그간 가지고 있던 그에 대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실제의 모습.
이런 모습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는 것었다. 그렇다면 그는 줄곧 이런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왔을 터.
외부적으론 그 누구보다 젠틀하고 신사적인 이미지로,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겐 힘과 권력을 이용해 어떻게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 내는 식으로.
그렇게 오늘의 이슬아 같은 숱한 피해자들이 생겨났을 거고.
자신을 향해 비열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하준이 입술을 뗐다.
“네, 알겠습니다. 저희 배우에겐 제가 따로 꼭 당부해두도록 하죠. 앞으로 험난한 일들을 겪으려면 어쩌면 이 정도 액땜은 반드시 필요한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말을 마친 하준이 안쪽 주머니로 손을 넣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저도 선배님께 뭐 하나 알려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하준은 잠시 키패드를 조작하곤 액정화면을 그의 얼굴 위로 내밀었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