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컷! 오케이! 세트 이동해서 바로 다음 신 이어갈게요!”
이재호 감독의 오케이 사인과 함께 카메라, 조명팀을 비롯한 각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준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김민정도 다음 신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으로 장소를 이동했다.
“후훗, 촬영장 분위기 되게 밝지 않아요? 분위기만큼은 지금껏 제가 겪어본 현장 중에 최고라니까요?”
윤채경의 얘기에 하준이 주변을 잠시 훑곤 말했다.
“음, 그런가요? 보통은 이렇지 않나 보네요?”
“에이, 그럼요. 촬영장이 얼마나 살벌하고 험악한 곳인데요. 허구한 날 밤새우기 일쑤니까 다들 예민한 상태들이기도 하고, 또 스케줄대로 진행이 안 돼 버리면 골치 아프니까 다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거든요. 어휴, 그런 곳에서 NG 나면 얼마나 눈치 보인다구요.”
윤채경이 잠시 시선을 옮기며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이재호와 카메라 감독이 서로 웃음을 띠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특히 제일 중요한 게 바로 저 두 감독이 어떤 사이를 유지하느냐이거든요? 연출 감독이랑 카메라 감독 사이가 나쁘기라도 하면 그 촬영장은 거의 쑥대밭이라고 보면 돼요. 드라마 끝날 때까지 모두가 다 가시방석 같은 분위기에서 버텨야 하는 거니까.”
드라마 촬영이 처음인 하준에겐 다소 생소할 수밖에 없는 얘기들이었다.
하준이 고갤 낮게 주억거리며 수긍의 모습을 보이자, 윤채경이 옅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근데 이번 드라마는 분위기가 완전 다른 거 있죠? 저 두 분 사이가 좋은 건 물론이고, 배우들도 워낙 준비들을 잘해와서 촬영이 빨리빨리 진행되다 보니까 분위기가 험악해질 일이 없더라니까요? 호호. 게다가 시청률까지 잘 나와 버리니까 이건 뭐 더 말할 것도 없는 거죠.”
100억 이상의 제작비가 들어간 대작 스케일의 이번 드라마.
윤채경과 이재호 감독의 두 번째 만남이란 것만으로도 방송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작품은 첫방부터 13%라는 아주 순조로운 스타트를 보였다.
SBC 극본 공모전 대상작의 탄탄한 스토리 라인, 윤채경에게 지상파 첫 대상 트로피를 안겼던 이재호의 뛰어난 연출력, 거기에 구멍 하나 없는 배우들의 연기력까지.
방송 중반부를 넘어선 지금은 무려 20%라는 수치를 이미 뛰어넘은 상태였고, 당연히 모두가 연말 시상식의 가장 유력한 후보들로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작품뿐 아니라 감독과 작가, 그리고 시상식의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출연 배우들까지.
하준이 수긍의 의미로 낮게 끄덕여보이자, 윤채경이 다음 촬영 세트 쪽을 잠시 힐긋거렸다.
“그래서 그런 건진 모르겠는데, 감독님이 슬아 연기를 엄청 흡족해하시더라고요? 대표님이 저한테 따로 부탁했다는 건 전혀 모르는데도 벌써 세 번이나 촬영장에 부르시고. 심지어 대사도 늘어난 것 같던데요?”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내뱉어오는 윤채경의 말에 하준도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신의 주인공인 김민정을 비롯해 메이드 복장을 한 이슬아가 함께 서 있었고, 그녀의 얼굴 위론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나 보였다.
“대사도요?”
하준이 묻자, 윤채경이 그렇다는 듯 고갤 크게 끄덕였다.
“네, 그렇다니까요? 대표님이 저한테 따로 부탁하셔서 제가 그래도 대사 한 줄 정도는 있는 단역 자리로 알아봤거든요. 감독님은 모르게 조연출한테만 따로 얘기해서. 근데 감독님이 뭐에 꽂히셨는지 그 뒤로도 계속 촬영장엘 부르시더라고요? 심지어는 대사도 점점 더 늘어나고.
“음.”
“아무래도 양 작가님한테 얘기해서 분량을 좀 늘리신 것 같더라고요. 뭐,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미비한 분량이긴 하지만.”
그때, 하준이 바라보고 있던 시야 속으로 이슬아가 자신과 눈을 마주쳐왔다.
그러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눈인사만 해 보이곤 다시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애가 그래도 어릴 적부터 기본기를 좀 다져서 그런지 표정이나 발성 같은 게 꽤 괜찮더라고요. 첨엔 아이돌 준비했다가 그만뒀다고 하길래 너무 배우를 쉽게 보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감독님 눈에 든 거면 애가 확실히 타고난 건 있다는 뜻 아니겠어요?”
“흠.”
이슬아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할 것을 약속한 하준. 단, 외부적인 요인들이 아닌 자신의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때까진 그 사실을 숨기기로 했었다.
그렇기에 이슬아 또한 촬영장에선 철저히 알은척을 하지 않고 있었고.
윤채경의 작품에 그녀를 투입시키고자 했던 건 단순히 경험적인 측면 때문이었다.
조만간 있을 오디션을 대비해 미리 실전을 경험해 본다는 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기에.
그런데, 벌써부터 감독의 눈에 띄어 미비하게나마 분량까지 늘릴 수 있게 됐다니. 그녀가 맡은 역할이 고작 단역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하면 꽤 놀라운 성과일 수밖엔 없었다.
게다가, 지난 그녀의 커리어들을 고려했을 때 실전 연기라곤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을 텐데.
윤채경이 얘기한 대로 분명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고밖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잠시 후, 해당 신의 촬영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윤채경의 대기실로 자릴 옮겼다.
매니저가 사 온 커피잔을 입으로 옮기며 윤채경이 하준에게 물었다.
“근데요. 대표님. 갑자기 슬아는 왜 도와주시기로 한 거예요? 들어 보니까 아직 계약도 안 한 상태라고 하던데.”
일단 하준이 부탁한 일이라 흔쾌히 수락을 하긴 했지만, 윤채경도 내내 의아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단순히 멤버들과 친분이 있단 이유로 그가 도움을 자처했을리는 만무한 데다, 그녀가 팔도에 있었던 시절에 하준은 그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 자신이 꺼낸 말처럼 아직 ENP와는 전속 계약을 체결한 상태도 아니었고.
윤채경의 물음에 하준도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진심이 느껴졌거든요. 기존에 하던 일도 꽤 자릴 잘 잡은 상태에서 굳이 그런 위험수를 둘 필욘 없었을 텐데.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그 말이 그냥 가볍게 꺼낸 얘기처럼 느껴지진 않았어요. 물론, 그 전에 있었던 일들로 어떤 성향을 가진 친구인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고.”
하준의 얘기에 윤채경이 고갤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전에 있었던 일들요? 슬아랑 무슨 일이 있으셨는데요?”
“음, 그냥 어떤 일이 좀 있었어요. 그 일로 제가 꽤 큰 도움을 받기도 했고.”
일명 ‘황수철 소탕 사건’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윤채경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하준은 옅게 미소를 띠곤 커피 잔을 입으로 옮겼다.
물론 윤채경에게 했던 답변들이 꾸며낸 얘기들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자신이 이슬아를 돕기로 결정한 데엔 더 큰 이유가 존재했다.
바로, 자신의 모친이 떠올랐기 때문.
그녀 또한 배우가 되기 전엔 꿈만 가진 상태로 누군가를 찾아가거나 도전의 문을 두드렸을 터.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분명 세상 그 누구보다 간절하면서도 진심이었을 거고.
자신을 찾아온 이슬아 또한 그 시절 자신의 모친과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어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이었다.
다음 신 촬영을 앞두고 있는 윤채경은 잠시 대본을 집어 들어 대사를 점검해 나갔고, 하준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커피를 마시며 생각들을 정리했다.
이틀 전 최윤섭과 나눈 대화들. 그에게 ‘제너럴’이라는 존재들에 대해 모두 전해 듣고 난뒤, 하준은 반드시 확인해 봐야만 할 무언가가 생겨났다.
다른 무엇보다, 미래 예지 속 그들이 언급한 신인 여배우가 자신의 모친과 동일 인물일 수도 있겠단 마음이 강하게 피어났기 때문에.
어쩌면 확신에 가까운 그것일 수도 있었고.
모친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떠났는지 모르지 않기에 더더욱 그것을 확인하고 확실히 해야만 했다.
만일 그들이 모친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관여돼 있다면, 결코 그대로 두어선 안 되는 존재들이기에.
“아 참, 대표님. 그 소식 들으셨죠……?”
하준의 옆에서 대사를 암기하던 윤채경이 갑자기 고갤 들고는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하준이 정확한 의미를 묻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윤채경이 낮은 목소리로 꺼내왔다.
“박 대표요. 항소심 선고가 기각돼서 1심 때 형 그대로 선고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대법원까지 갈지 안 갈진 모르겠지만.”
하준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짧게 고갤 끄덕였다.
“네, 들었습니다. 참작 사유가 없는 만큼 아마 상고심을 신청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이미 2심 때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을 거니까.”
하준의 얘기에 윤채경도 수긍한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겠죠. 국내 대형 로펌 몇 개를 선임했는데도 아무런 효과를 못 봤으니. 그만큼 증거가 확실했단 뜻이기도 할 거고…… 참, 잘됐다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네요.”
이 바닥에 발을 딛은 이후 지금까지, 줄곧 함께 해왔던 박성환이었기에 윤채경이 내뱉은 씁쓸하다의 의미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B&D에서의 과정과 결과가 어떻든,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이가 그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그것일 테니까.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윤채경을 바라보며, 하준 또한 다소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박성환의 얘기가 꺼내지자, 일전의 미래 예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지난번 구치소에서 그를 만났을 때 나타났던 미래 장면들.
미결수가 아닌 기결수의 복장을 한 채로 하준과 마주 앉아 있던 그. 그는 꽤나 심각한 얼굴 상태로 뭔가를 계속 얘기하고 있었고, 그를 바라보고 있던 미래의 자신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운 얼굴빛이었다.
대체 그 장면들은 뭘 의미하는 것들이었을까.
그의 죗값을 치르게 한 이후로 다신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왜.
자신의 앞에 나타났던 미래 예지들은 반드시 현실로 일어날 거라는 걸 알기에 하준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아 참, 대표님. 오늘 민정이랑 저랑 둘 다 촬영 일찍 끝나는 날인데. 대표님 시간 괜찮으시면 좀 이따 저녁 식사나 같이 드실래요? 슬아한테 이것저것 조언도 해줄 겸 해서 슬아보고도 잠깐 기다리라고 해뒀는데.”
윤채경의 얘기에 하준은 흔쾌히 고갤 끄덕였다.
“네, 그러시죠. 그렇지 않아도 한번 하려고 하긴 했는데.”
“치, 맨날 말만. 뷔뷔앞 애들 신경 쓴다고 저랑 민정인 완전 찬밥 신세로 놔두시더니. 미국 다녀온 뒤론 갑자기 전속계약을 막 늘리시더라고요? 제가 이렇게 먼저 말 안 꺼냈으면 아마 쭉 찬밥 신세로 놔두셨을걸요? 제 말이 틀렸어요?”
“하하, 그럴 리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회사의 1호, 2호 배우님들이신데. 거기에 걸맞는 특별한 대우는 늘 해드려야죠. 오늘 맛있는 걸로 드시죠.”
하준의 얘기에 윤채경이 팔짱을 끼곤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말 후회하시게 될 거예요. 이따 민정이 끝나면 엄~ 청 비싸고 엄~ 청 고급스러운 곳으로 가자고 할 거니까! 아시겠죠?”
하준은 대답 대신 온화한 미소로 화답했고, 윤채경은 주변을 훑으며 매니저를 찾았다.
“윤철이 얜 어디 간 거야? 장소 좀 알아보라고 할랬더니.”
그때, 하준과 윤채경이 있던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때마침 매니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윤채경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다소 심각한 얼굴 표정을 하고선 먼저 입을 열어왔다.
“저 누나. 잠깐 좀 나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
어딘가 모르게 다급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윤채경이 살짝 눈동자를 키우며 물었다.
“나? 왜? 벌써 내 촬영 순서 된 거야?”
“아뇨, 그게 아니라…….”
입술을 달싹이며 주변을 조심스럽게 훑던 매니저가 말을 덧붙여왔다.
“슬아가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