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김진성 씨! 30분 뒤에 녹화 투입될게요! 준비 마무리 해주세요!”
대기실 문을 열고 내뱉어오는 FD의 외침에 김진성의 얼굴은 일순 긴장으로 바뀌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내 심호흡을 반복하고 있던 터라 이미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진 상태의 그.
김진성이 또 하나의 청심환을 꺼내며 하준을 쳐다봤다.
“후우. 잘 되겠죠 대표님? 이거 너무 오랜만에 방송 출연이라…….”
평소 멤버들을 코칭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의기소침한 모습.
하준은 괜히 웃음이 흘러 나와 옅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몇 년 만에 출연이신 거죠?”
“후우, 글쎄요. 몇 년이 아니라 한 10년은 더 된 것 같은데요? 예능은 데뷔 이래로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음, 그럼 얼추 신인들이랑 비슷한 마음이기도 하겠네요. 어떻게, 애들한테 조언이라도 좀 해달라고 불러볼까요?”
“예? 제가 걔네들한테요? 아이고, 관두세요. 그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지, 20년이나 차이 나는 애들한테 무슨…….”
물론 하준도 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 삼아 던져본 얘기였다.
곧 녹화가 시작되는 마당에 당장 멤버들을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고개를 절레 내젓던 김진성이 갑자기 눈빛을 달리하더니 하준을 묘하게 쳐다봤다.
“저, 아니면 잠깐 전화라도 해볼까요? 그래도 걔네가 최근에 예능도 나가고 했으니까 뭔가 해줄 얘기들이 좀 있지 않을까 싶긴 한데…….”
“……아.”
단칼에 거절하는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솔깃했던 모양이다. 오늘 보여온 눈빛 중 가장 진심이 느껴지고 있는 걸 보니.
하준은 온화한 미소를 띠우며 김진성을 달랬다.
“충분히 잘할 수 있으실 거예요. 토크야 워낙 평소에도 재밌게 말씀 잘하시니까 문제없을 거고. 노래야 20년 동안 선배님이 해오시던 건데 당연히 잘 해내실 수밖엔 없죠. 평소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토크든, 노래든.”
“후우.”
하준의 얘기에 김진성은 고갤 한번 끄덕이고는 깊은 곳에서부터 숨을 길게 꺼내 내뱉었다.
오늘은 김진성의 생에 첫 예능 프로 출연날. 무려 데뷔 경력이 20년도 넘는 그가 이렇게나 긴장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선 하준도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다.
데뷔 이래 첫 예능 프로그램임과 동시에, 무려 10년 만의 방송 출연인 그.
트레이너로 완전히 전향한 이후론 두 번 다신 이런 경험은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을 터였다.
게다가, 오늘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지상파 3사 중에서도 가장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자랑하고 있는 프로.
방영 시간 또한 주말 황금 시간대라 불리는 토요일 저녁이었기에 김진성이 이토록 부담감을 느끼는 것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후우.”
끊임없이 심호흡을 반복해 가며 김진성이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전화번호부를 누르더니 누군가의 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오늘 애들 오전 스케줄은 없는 날이죠? 아직 자고 있으려나…….”
꽤나 진지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하준은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정말로 멤버들에게 전활 걸어 무슨 조언의 말이라도 듣고자 하는 모양새였다.
하준이 고갤 끄덕이며 입술을 떼려는데, 갑자기 뒤쪽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물밀 듯 밀려오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대박, 쟤네 아냐? 헐……!”
“지, 진짜네? 뭐지? 여긴 갑자기 왜 온 거지?”
“설마…… 김진성 씨 응원차 방문한 건가? 그럼 진짜 인성 대박인 건데.”
갑작스레 들려온 소란스러운 소리들에 하준도 곧바로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스태프들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의 놀란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며 안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멤버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대표님! 선생님!”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멤버들의 등장. 바로 직전까지도 멤버들에게 전화를 걸려 했던 김진성의 두 동공은 무척이나 팽창돼 있었다.
“니, 니네가 여길 어떻게.”
“에이, 오늘 선생님한테 엄청 중요한 날인데 당연히 저희가 응원하러 와봐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흴 이렇게까지 키워주신 선생님인데!”
여전히 주변에선 카메라 셔터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고, 김진성은 다소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니네 새벽까지 스케줄 있었던 거 아냐? 오후에 또 광고 촬영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김진성의 물음에 멤버들이 하준을 잠시 쳐다보곤 씨익 웃어 보였다.
“그래서 촬영 전까진 여기에 있다가 가려구요! 선생님 무대 하는 거 바로 눈앞에서 보고 싶어서 저희 세 시간만 자고 바로 씻고 나온 거예요. 헤헤.”
“대표님! 저희 그래도 되죠?”
멤버 전원이 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올 거라곤 하준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었다.
게다가 아침 해가 뜰 쯤이 돼서야 겨우 스케줄이 끝났다는 정진웅의 메시지를 받았던 터라 더더욱.
겨우 세 시간밖에 못 잤다는 멤버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쌩쌩해 보였고, 누구 하나 피곤한 기색 없이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하준도 마냥 안 된다고만은 할 수가 없었다.
“흠, 정말 괜찮겠어? 오후에 있을 촬영도 또 새벽까지 이어질지 모르는데.”
“헤헤, 그럼요! 잠 적게 자는 건 워낙 다들 적응된 상태라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여기서 선생님 녹화 지켜보는 게 잠 좀 더 자는 것보다 훠얼씬 더 피로가 풀릴 거 같은데요? 다들 그렇지?”
“당근이죠! 백 배, 아니, 천 배는 더!”
“후후, 선생님 안 떨리세요? 저흰 처음 예능할 때 엄청, 엄청 떨렸는데.”
은호가 묻자, 김진성은 웬일인지 대답 대신 오묘한 얼굴빛을 보여왔다.
조금 전까지 긴장하고 있던 모습과는 달리, 꽤나 큰 감동이 밀려온듯한 표정.
김진성이 다소 목이 메이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왔다.
“……으흡. 떨리긴. 내 짬밥이 얼만데. 이왕 온 김에 다들 잘 지켜봐. 너희도 언젠간 다 겪게 될 일들이니까.”
무심하게 말을 내뱉곤 곧바로 물을 집어 드는 김진성.
“어험. 청심환이 목에 걸렸나…… 왜 이렇게 목구멍이 자꾸 답답한 느낌이지…….”
괜한 혼잣말을 꺼내며 그것을 벌컥 들이켜댔다.
그 모습에 하준도 웃음이 지어져 잠시 그를 바라보다 멤버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야? 진웅인 오늘 반차 내서 너희 데려다줄 인원도 없었을 텐데.”
“아!”
지호가 곧바로 입을 열려던 때 옆에 있던 이준이 먼저 답을 해왔다.
“슬아가 데려다줬어요. 오디션 준비 때문에 마침 SBC에 갈 일이 있다고 해서. 저희 MBS에 내려주고 슬아는 바로 SBC로 갔어요.”
“으음.”
이준의 얘기에 하준은 천천히 고갤 주억거렸다.
이슬아의 오늘 일정에 대해선 하준도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바로 자신이 그런 일정을 잡아준 당사자였으니까.
지금쯤 윤채경을 만나 이런저런 코칭들을 받고 있을 터였고.
그녀에게도 얘기했듯 당분간은 한 발짝 물러서 그녀를 지원하고 지켜볼 생각이었다.
“김진성 씨! 지금 바로 녹화 들어갈게요! 스튜디오로 나와주세요!”
김진성과 멤버들이 얼마 간의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있던 때, 다시 FD가 대기실 문을 열곤 콜을 해왔다.
김진성이 긴장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멤버들이 일제히 팔을 들어 보였다.
“선생님 파이팅! 저희가 바로 앞에서 계속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아무 걱정 말고 편하게 하고 오세요! 녹화 다 끝날 때까지 자리 지키고 있을게요!”
“저희 따로 소장용으로 선생님 노래 부르는 것도 다 녹화해 둘게요. 헤헤, 파이팅이에요!”
멤버들의 연이은 파이팅에 김진성도 조금은 표정이 누그러진 듯한 모습이었다.
고갤 크게 끄덕여 보이곤 김진성이 대기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겨 나갔다.
그러다 문앞에 다다라선 잠시 걸음을 멈추곤 하준을 바라봤다.
“대표님. 정말 잘 끝나겠죠? 괜히 실수라도 해서 역효과만 나는 건 아닌지…….”
하준이 가지고 있다는 그 계획 아래 가장 처음으로 시작된 예능 스케줄.
김진성은 그를 백 퍼센트 신뢰하면서도 혹여나 자신의 실수로 인해 모든 일을 그르치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느낌이었다.
그의 근심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며 하준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선배님이 무척이나 잘 해내주실 거라 믿기도 하고요.”
그러곤 오래전 자신이 보았던 미래 예지를 떠올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반드시 이루실 겁니다. 트레이너로서가 아닌, 가수 김진성으로서의 재기를.”
* * *
대한민국 최고의 MC 중 하나라 불리는 그와 토크를 이어가고 있는 김진성.
정식 토크쇼가 아닌 버라이어티로 분류되는 프로라 그런지 다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녹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김진성 또한 꽤나 편해진 표정과 어투로 멘트를 이어가고 있었고.
“와, 역시 연륜이란 게 이런 건가? 아까 긴장하시던 모습은 싹 사라지고 어떻게 저렇게나 말을 잘하시지? 그것도 요리조리 다 재미있게?”
“그쵸? 처음엔 좀 긴장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몇 분 지나니까 바로 평소 선생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우린 절대 저렇게 못할 텐데!”
하준의 바로 옆에서 녹화를 함께 지켜보고 있던 멤버들도 김진성의 수준급 토크에 다소 놀란 반응들을 보여왔다.
그도 그럴 게, 청심환을 무려 다섯 개나 씹어 먹었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유쾌한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는 그였으니까.
“이야, 김진성 씨 토크 살아 있네~ 살아 있어! 20년 만에 예능은 첫 출연이라더니 이거 나보다 말을 더 잘하는 것 같은데요?”
“에이, 무슨 말씀을요. 대한민국 최고의 MC님이 그렇게 얘기하시면 방송 끝나고 괜히 저만 폭탄 맞습니다? 웬 아재가 나와가지곤 시답지 않은 얘기들만 떠들다 가냐고요. 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방송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하하, 지금의 입담 실력이면 절대 그렇게 되진 않을 것 같은데요?”
두 사람의 녹화를 지켜보는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내내 웃음들이 띄어져 있었고, 이대로만 계속 진행된다면 하준의 계획은 순조롭게 마무리 될 수 있을 터였다.
지금의 토크보다 중요한 건, 바로 김진성이 지난 두 달간 준비해 온 자신의 메들리 무대였으니까.
처음 미국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던 멤버들의 미래 모습들. 그중 몇 개의 장면은 바로 김진성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하준이 멤버들의 트레이닝을 부탁하기 위해 그를 처음 만났을 당시 그런 말을 내뱉은 것 또한 그런 연유에서였고.
‘트레이너로서가 아닌 ‘가수 김진성’으로서 다시 무대에 서게 해드리겠습니다.’
무조건 현실이 될 거라 확신하고 있었던 그것.
그리고, 머지않아 그 말은 곧 반드시 현실로 이뤄지고 말 것이었다.
그렇게 녹화를 지켜보고 있던 하준의 머릿속으로 문득 어떠한 생각 하나가 불쑥 끼어든 건 바로 그때였다.
바로 어젯밤 갑자기 나타났던 미래 예지의 한 장면.
아니, 정확히는, 미래 예지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는 없는 그것.
분명 현상만큼은 그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때 느껴졌던 감정만큼은 분명 그것과 결을 달리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건, 미국에서부터 줄곧 자신을 괴롭혀 왔던, 그리고 이젠 더 이상 나타나고 있지 않던 그때의 악몽과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검은 양복의 남자들과 붉은색 립스틱 여자…….’
그녀의 정체가 자신의 모친이었다는 사실을 안 뒤론 줄곧 나타나지 않고 있던 것이었는데.
그런데, 대체 왜 어젯밤 그 느낌이 다시 느껴졌던 걸까.
그리고.
‘대체…….’
자신이 보았던 장면 속 홀로 병실에 누워 있던 그.
아니,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