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갑자기 걸려 온 하준과의 통화를 종료하곤 머리를 쓸어 넘기는 구세희.
그러곤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하.”
아직은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추측에 불과한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왜인지 모를 불안함이 강하게 엄습해 오고 있었다.
대체 왜일까.
도저히. 아니, 도무지 믿어지지도, 또 말이 안 되는 사실임이 분명한데도 대체 왜 이런 불안한 생각이 강하게 들고만 있는 걸까.
‘만약 정말로 아줌마가 살아 있다면…….’
만약 자신의 이 말도 안되는 추측이 사실로 밝혀지게 된다면, 혹여나 그렇게 된다면.
‘하준인…….’
하준에겐 뭐라고 얘길 해 줘야 하는 걸까. 이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만 하는 걸까.
다른 무엇보다, 만약 그녀가 정말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고 있다면 자신의 아버지 구명호는 그 모든 것을 지난 시간 동안 숨겨 온 게 돼 버린다.
이 엄청난 비밀을 다 알면서도 철저히 비밀로 해 온, 그것도 무려 ‘20년’이란 시간 동안.
지난 시간, 하준이 얼마나 힘들어했고 또 얼마나 그녈 그리워했는지,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이가 바로 자신이었기에 구세희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아냐.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부정해 보는 구세희.
지금은 그녀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보단, 그것의 후폭풍이 더욱 크고 두렵게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그녀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구명호가 이 모든 걸 철저히 비밀로 숨겨 온 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앞으로 두 번 다신 하준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온갖 복잡한 생각들로 엉켜 버린 머릿속은 점점 더 자신을 옥죄어 오고 있었고, 뭔가 확실한 정리를 하지 않으면 지금의 마음은 조금도 나아지질 않을 것 같았다.
제자리에 선 채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고 있던 구세희가 뭔가를 결심한 듯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전화번호부를 뒤지더니 어느 한 번호에서 스크롤을 멈추었다.
“…….”
자신의 부친 구명호.
자신이 마주하게 될 진실이 무엇이든, 지금 그에게서 어떠한 대답이라도 듣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지금의 복잡한 심경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지금 자신이 걱정하고 있는 ‘그’를 위해서라도 꼭 그래야만 했기에.
그렇게 구세희는, 먼발치서 자신이 떠올리고 있는 ‘그’가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전화번호부의 그 이름을 꾹 눌렀다.
* * *
같은 시각, EPN 엔터의 녹음 작업실.
오전 일찍부터 나와 내내 곡 작업을 하고 있는 이준의 뒤론 멤버들뿐 아니라 이슬아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슬아가 사 온 샌드위치를 한 입 물며 은호가 물었다.
“움움, 슬아 네가 여긴 웬일이야? 것도 이렇게 먹을 것까지 싸 들고?”
이준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아직까지 이슬아의 결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
그렇기에 이 이른 오전 시간부터 회사에 찾아온 연유 또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마침 너희들도 있다길래 얼굴이나 볼 겸해서 들렀지. 그리고, 이건 싸 온 게 아니라 사 온 거고.”
이슬아가 와구와구 먹고 있는 은호의 샌드위치를 가리키자, 지호가 곧바로 은호를 만류해 왔다.
“아이, 형. 우리 며칠 뒤에 이 샌드위치 광고 찍는 거 잊었어요? 지금 그렇게 막 먹어 대다 나중에 질려 버리면 어쩌려고. 햄버거 광고 찍을 때 그렇게나 괴로워해 놓고선!”
“응? 너희 또 광고 찍어? 무슨 광고를 무대 서는 것보다도 자주 찍는대? 그것도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인 그룹이?”
이슬아가 다소 황당하다는 듯 물어 오자, 하늘이 수긍한다는 듯 헤헤거리며 말했다.
“헤헤, 그쵸? 그래서 저희도 되게 신기해요. 엄청 유명한 분들이나 찍는 줄 알았던 걸 우리가 계속 하고 있으니까.”
샌드위치와 같이 사 온 오렌지 주스를 들어 올리며 강준도 말을 보태 왔다.
“매니저 형한테 들어보니까 계약금도 보통 신인의 경우보다 훨씬 높게 해 주셨대요. 년 단위로 계약하는 조건으로.”
“년 단위? 와, 그럼 한 번만 찍는 게 아니라 계속 전속 모델처럼 활동하는 거야? 니네 다섯명 다? 니네 대박이다…….”
팔도 초창기 때의 멤버들을 생각하면 가히 인생 역전이라고 표현해도 결코 과장이 아닌 지금의 모습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평소 모습만큼은 그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느껴지지 않아 평소엔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무척이나 게걸스럽게 샌드위치를 헤치우고 있는 은호의 모습을 코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에휴, 근데 은호 넌…….”
“우우우움. 나? 나 왜. 뭐가.”
“……아니다, 아니야. 많이 먹어. 지금처럼 그렇게 와구와구, 계에속, 쭈욱.”
팔을 쭉 내밀며 내뱉는 이슬아의 권유에 은호가 고맙다는 듯 찡긋거리며 다음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그때, 곡 작업에 한창이던 이준이 몸을 돌리곤 이슬아에게 물어 왔다.
“그래서, 대표님이랑은 얘기 잘했어? 너가 하려는 건 도와주시겠대?”
“아, 응. 일단 얘긴 잘 끝나긴 했는데.”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말들에 멤버들이 흠칫 놀란 듯 물어 왔다.
“응? 슬아 누나 우리 대표님 만나셨어요? 오잉, 왜요?”
“아~ 다른 볼일 있다고 했던 게 그거였구나 그럼! 어쩐지, 좀 갑작스럽다 했는데.”
“무슨 얘기했는데요 누나? 뭘 도와준다는 거예요?”
연이어 물어 오는 멤버들의 질문에 이슬아는 굳이 숨기지 않고 답했다.
“나 다시 이쪽 일이 하고 싶어졌거든. 그래서 EPN 들어오고 싶다고 대표님께 부탁드리러 온 거야.”
“헐, 진짜요? 대박.”
“누나 그럼 다시 가수 데뷔 준비하는 거예요? 그룹으로? 아니면 솔로?”
멤버들의 놀란 반응 사이로 은호도 입을 반쯤 벌리고선 먹던 샌드위치를 곧바로 테이블에 놓았다.
“야…… 이슬아. 너 하던 일은 어쩌고? 이제 겨우 자리 잡아서 엄청 잘되고 있다며. 그럼 그건 다 관두는 거야?”
은호를 시작으로 멤버들의 얼굴을 훑으며 이슬아가 고갤 끄덕였다.
“오전에 폐업신고까지 다 끝내고 왔어. 그리고, 가수 말고 다른 쪽으로 도전해 보려고 하는 거고.”
“다, 다른 쪽이요? 어떤……?”
이번 지호의 물음엔 이준이 대신 답했다.
“연기가 하고 싶대. 슬아 원래 어릴 적 꿈이 배우였잖아. 연습생 되기 전부터.”
“헉…….”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에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일제히 같은 표정들을 선보이는 멤버들.
그런 멤버들의 모습에 이슬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풉, 지금 너희가 놀라는 이유가 내가 사업을 그만둬서인거야, 아님 가수가 아니라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해서인 거야?”
“그, 그야…….”
“둘 다죠! 당연히!”
잠시 후, 이슬아에게서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에 대해 전해들은 멤버들은 또 한 번 벙찐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컥…… 지, 진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요……?”
“야야, 너 제정신이야 이슬아……?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마음이 들 수가 있는 거야? 하.”
“와,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슬아 누나는 역시 다른 사람들이랑 뇌 구조 자체가 확실히 다른 것 같아! 진짜 짱 멋있어.”
짱 멋있다는 지호의 얘기에 은호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야, 저게 뭐가 멋있어? 우리 그때 진짜 큰일날 뻔한 거 잊었냐? 그 타이밍에 대표님이 안 나타났으면 우리 진짜 죽을지도 몰랐다고. 그 험상궂은 아저씨한테!”
“그러니까 더 멋있는 거죠! 그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자신의 적성을 찾는 사람이 슬아 누나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이 세상에 그런 일이’에 제보할 만한 일 아니에요 이건?”
“……하, 말을 말자. 말을 말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 오는 은호와 지호의 대화 사이로 이준이 재차 아까의 질문을 다시 건네왔다.
“그래서, 어떻게 결론이 났는데? 대표님이 도와주시겠대?”
이준의 물음에 이슬아가 고갤 짧게 끄덕였다.
“응. 감사하게도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최대한 도와주시겠대.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해 주셨고.”
“우와, 대표님이 그러셨어요? 대박! 잘됐다 누나! 대표님이 그런 말씀하신 거면 누나 무조건 성공하겠는데요?”
“내 말이! 와, 그럼 슬아 누나도 이제 우리랑 같은 소속사 식구가 되는 건가? 예전처럼 맨날 얼굴 보면서 밥도 먹고 장난도 치고?”
멤버들의 얼굴 위론 한껏 기대감이 묻어나 있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이슬아가 이곳에 온 목적이 EPN의 소속이 되고 싶다는 것, 그리고 이곳의 수장인 하준이 모든 걸 돕겠다고 했다는 것.
그건 곧, 이슬아의 성공이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란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멤버들의 반응과는 달리 이슬아는 어딘가 모르게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데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대표님이 도와주시기로 했다며.”
이준의 물음에 이슬아가 고갤 천천히 주억거리며 말했다.
“응, 그러긴 하셨는데. 그 말을 하시면서 같이 했던 얘기가 좀 걸려서.”
“같이 했던 얘기?”
이슬아가 짧게 숨을 내뱉곤 말을 이었다.
“우선 도와주시는 대신 외부엔 그 사실을 밝히지 않으실 거래. 백그라운드나 그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오로지 내가 실력으로만 인정받을 수 있게 될 때까진.”
“아.”
이슬아의 다소 어두운 표정에 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기대했던 답이 아니라 좀 실망했던 거야?”
이슬아는 곧바로 고갤 내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애초부터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걸.”
“그럼 왜.”
“그냥 뭔가 다른 준비를 하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게 맞을 거라고 하셨을 때. 그때 뭔가…….”
뭐라 표현하기 힘든 그때의 느낌을 이슬아는 어떻게 꺼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저 그 순간 느낀 감정은 분명 그러했으니까.
멤버들 또한 이슬아가 꺼낸 얘기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슬아가 고갤 내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암튼 얘긴 잘 끝났어. 내 실력으로 인정받게 될 때까진 다 도와주신다고 하셨고, 나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 보겠다고 했고. 계약은 그 이후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으흠, 그랬구나.”
어찌됐건 하준이 돕기로 했다고 하니 멤버들은 무척이나 안심이 될 수밖엔 없었다.
그가 돕는다는 게 어떤 성공을 보장하는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는 자신들이었으니까.
이준이 줄곧 이슬아의 손에 들려져 있는 뭔가를 가리키며 물어 온 건 그때였다.
“근데, 그건 뭐야? 아까부터 계속 손에 꼭 쥐고 있던데.”
“아, 이거?”
이준의 물음에 이슬아가 그것을 펼쳐 보이며 답했다.
“대본이야, 대표님이 직접 주신. 바로 다음 주에 있을 오디션에 지원해 보기로 했거든.”
그 말을 꺼내는 이슬아의 표정은 이전과는 다소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대본을 전해 줄 당시 하준이 꺼낸 얘기가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그날 밤 저녁. 평창동 구명호의 자택 앞으로 차량 한 대가 들어섰다.
리모컨을 이용해 거대한 대문의 문을 열고 들어선 해당 차량은 늘상 주차하던 그곳으로 차를 멈추어 세웠고, 이내 시동을 꺼뜨렸다.
그리고, 곧이어 운전석 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다름 아닌 구세희.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거대한 저택을 바라보고 있는 구세희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