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가 흘러나오자, 이슬아를 바라보고 있던 하준의 표정이 일순 멍해졌다.
다 큰 성인 여자가, 그것도 모델 뺨칠 정도로 이미 클 만큼 큰 것 같은 키의 그녀가.
자길 키워 달라니, 대체 무슨.
“그게 무슨…….”
다소 황당한 얼굴로 하준이 묻자, 이슬아가 눈빛을 한층 더 빛내며 말했다.
“포기했던 꿈을 다시 이뤄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요!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앞으론 영영 기회도 없을 것 같고 또, 평생 후회하며 살 것 같아서.”
“…….”
짓고 있는 표정이나 어투로 봐선 분명 농담은 아닌 듯싶었다. 물론 애초에 본인과 그런 농담을 나눌 사이도 아니긴 했지만.
그녀의 꽤나 진지한 얼굴을 잠시간 훑던 하준이 다시 입을 열곤 물었다.
“혹시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될까? 음. 분명 처음 연습생을 그만둘 때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을 거고, 또 지금은 새로운 분야에서 꽤 자리도 잘 잡은 것 같은데. 굳이 지금에 와서 왜 그런 마음을 품게 된 건지 조금은 의아해서 말이야.”
멤버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이슬아가 속해 있던 연습생 그룹은 데뷔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고.
하지만 모두가 다 아는 이유로 데뷔가 무산됐고, 같은 그룹의 멤버들은 뿔뿔이 다른 회사로 흩어지게 됐다고 했다.
물론 그룹 내의 리더이자 가장 실력 있는 멤버였던 이슬아 또한 여러 곳의 계약 제안을 받았던 상황.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걸 고사하고 아예 이 세계를 떠나는 선택을 했다고 했다.
그 뒤론 새롭게 도전한 분야에서 보란 듯 자리까지 잡은 상황이었고.
그런 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꿈에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고 하니 하준은 의아한 마음이 들 수밖엔 없던 거였고.
무엇보다, 다시 연습생으로 돌아가 데뷔를 준비하기엔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기에.
하준의 물음에 이슬아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라는 듯 곧바로 답을 해왔다.
“제가 그 일을 할 때 정말 몸서리치도록 즐겁고 흥분된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사업을 할 땐 조금도 느껴본 적이 없던 카타르시스가 막, 막! 솟구치는데, 그런 일을 놔두고 맞지 않는 옷을 계속 입으며 사는 건 도저히 아니다 싶더라구요.”
이해가 될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는 이슬아의 말에 하준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
“그 일을 할 때 즐겁고 흥분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는데. 정확히, 무슨 일을 언제 어떻게 해봤다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아! 그게.”
운을 떼곤 잠시 시선을 내려 어딘가 모를 오묘한 미소를 머금는 이슬아.
입술은 계속 달싹이면서도 뭔가 즐거웠던 기억을 상기시키는 듯한 얼굴 표정이었다.
그러다 다시 고갤 들어 올리곤 하준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애들이랑 같이 대표님 돕겠다고 막 그랬을 때요! 분명 위험할 수도 있고 또 큰일이 날 수도 있을 만한 상황이었는데, 순간순간 느껴지던 감정들이 너무 흥분되고 막 떨리더라구요! 카메라 앞에서 하는 가짜가 아닌, 진짜 실전에서 통하는 연기를 제가 하고 있단 생각이 드니까요!”
“…….”
이번에도 역시나 그녀의 말을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꿈을 다시 이루고 싶은 계기와 그 일이 대체 무슨 상관이라는 건지. 게다가, 왜 노래가 아닌 연기를 할 때 그런 감정들이 느껴진다는 건지.
하준이 작게 웃어 보이며 물었다.
“혹시 다시 이루고 싶다는 그 꿈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걸까? 내가 알기론 걸그룹을 준비했던 걸로 아는데.”
하준의 물음에 이슬아가 입을 살짝 벌리곤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아, 아뇨! 그땐 그랬는데 지금은 다른 쪽으로 도전을 해보고 싶어졌어요. 제가 수년간 노래하고 춤출 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그 잠깐의 시간 동안엔 막 물밀듯 쏟아졌었거든요. 그러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은 바로 연기구나, 그리고 배우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어요!”
“아.”
이제야 그녀가 뭘 얘기하려고 하는지 하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조금은 황당한 마음이 들 수밖엔 없었고.
자칫하면 큰일로 번질 수도 있었던 그 위험천만했던 상황들. 그 순간들을 겪고도 느낀 감정들이 이런 쪽이라니.
보통의 사람들이 가질 법한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 하준은 다소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올 수밖엔 없었다.
“그러니까, 그때를 계기로 연기를 하고 싶단 마음이 강하게 생겨났다 이런 얘기인 거야?”
하준과 이슬아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지혜는 당최 무슨 소리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그때라는 게 뭘 얘기하는 거지……? 게다가, 이 친구는 또 누구인 거고…….’
김지혜가 팔도에 들어온 시점은 오로지 멤버들만 남아 있던 시절.
그 전에 데뷔 준비를 하다 무산된 걸그룹이 있다곤 들었지만, 자신이 입사했을 땐 이미 그들은 나가고 없었던 뒤라 당연히 이슬아의 존재에 대해선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황수철과 멤버들, 그리고 이슬아 간의 있었던 일들 또한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에 더더욱 지금의 대화를 이해하기란 어려웠고.
그저 지금 들고 있는 생각은 딱 하나뿐이었다.
‘비주얼만 봐선 여배우로도 전혀 손색이 없을 외모이긴 한 것 같은데. 얼굴부터 해서 몸매까지. 괜히 걸그룹을 준비했던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김지혜가 혼자만의 감탄을 이어가고 있던 때, 이슬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입을 열어왔다.
“네! 그래서 저 좀 키워주시면 안 될까요, 대표님? 저 진짜, 진짜 열심히 할 자신 있어요! 그 누구보다도! 저 어렸을 적부터 아카데미로 쌓아온 기본기가 있어서 조금만 잘 다듬으면 정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거예요! 아니, 꼭 그럴게요! 어떻게…… 안 될까요오……?”
숨도 안 쉬고 자기를 어필해오다 말미엔 일순 눈꼬리를 축 내리며 간절하게 물어오는 이슬아.
다른 건 몰라도 그녀가 얼마나 진심인지만큼은 충분히 느껴지고 있었다.
“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준 또한 쉽게 결정 내릴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를 위해 소속 연예인들을 늘리고 회사를 키우겠단 생각은 확고했지만, 이건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멤버들과 달리 그녀의 미래를 확신할 수도, 장담할 수도 없는 것은 물론. 행여나 자신이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녀는 지금의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무엇보다, 팔도, 아니, EPN의 먼 미래엔 하준 자신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대표님, 대표님은 저에 대해서 잘 모르시겠지만 저 정말 악바리거든요? 근성 하나는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 있어요! 제가 어떻게든 성공해서 대표님한테 절대 마이너스 같은 존재는 되지 않을 테니까 한 번만 저 믿고 키워주시면 안 될까요? 네? 저 꼭, 꼭!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그 순간.
무척이나 간절한 어투와 함께 꼭 배우가 되고 싶다며 내뱉어오는 그녀를 보자, 하준의 머릿속으론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갔다.
바로, 어젯밤 드레스 차림을 하고선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던 자신의 모친.
사진 속 그녀 또한 배우라는 직업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그 일을 하는 그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왜인진 모르겠지만, 이슬아를 바라보고 있는 하준의 눈앞으론 그녀의 환한 미소가 자꾸만 오버랩 되고 있었다.
“……흠.”
곧바로 어떤 말을 꺼내기 보단 잠시간 침묵을 지키며 무언갈 생각하는 하준.
그와 마주하고 있는 이슬아뿐 아니라 김지혜 또한 하준의 사뭇 진지한 분위기에 그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그의 입에서 어떠한 답이 꺼내질지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 외에는.
고요한 대표실 내의 침묵을 깨고 하준이 입을 열어온 건 그로부터 일 분여가 지난 시점이었다.
“만약 다시 가수의 꿈을 키우고 싶다고 했으면 난 단칼에 거절했을 거야. 내 계획 안엔 오로지 외에 다른 누군가는 없었으니까.”
다소 단호한 어투로 말을 꺼내곤 곧바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가 가수가 아닌 그 일을 꼭 해야겠다면, 그리고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면. 내가 도울 수 있는 데까진 한번 도와보도록 할게. 네가 이 자리에서 했던 모든 말들이 다 진심이라면 말이야.”
하준의 얘기에 이슬아가 고갤 크게 끄덕였다.
“저 정말 진심이에요, 대표님. 그리고 꼭 성공할 자신도 있구요! 혹여나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해도 절대, 절대 대표님 원망할 일은 없을 거예요!”
결의에 찬 이슬아의 눈빛을 말없이 바라보는 하준.
곧이어 뭔가를 결정한 듯 입을 열어왔다.
“좋아. 그럼 네 진심과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먼저 확인부터 해보자.”
* * *
-아이고, 아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시겠습니다, 대표님! 아, 미국에서 온 지 얼마 됐다고 그렇게나 쉴 틈 없이 바쁘신 겁니까? 이거 이러다 대표님이랑 밥 한 끼 먹으려면 내년까지 기다려야겠어요?
박용태와의 통화를 이어가며 NTV 로비로 들어선 하준.
왼쪽 손목의 시계를 힐긋하곤 웃어 보였다.
“바쁜 것만 어느 정도 끝내고나면 시간 내서 식사 한번 하시죠, 기자님. 두 분의 최 기자님들도 같이요.”
-응? 그 인간들하고도 같이요? 흠, 뭐 저야 상관은 없지만, 혹여나 그때 돼서 두 사람이 대표님 시간에 못 맞춘다고 하면 그냥 버리고 저희끼리 먹죠 뭐. 딱히 중요한 사람들도 아닌데.
“하하. 그건 그때 가서 보고요. 아무튼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자님.”
-에이, 감사는요 뭘. 팔도, 아니 EPN 엔터가 점점 몸집이 커지는 거 보니까 제가 다 흐뭇하던걸요? 아 요새 기자들 모이기만 하면 다 대표님 얘기뿐이에요. 이러다 국내 엔터 시장 다 장악하는 거 아니냐고요. 하하.
호탕한 웃음소릴 내오던 박용태가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건네왔다.
-아참, 근데요 대표님. 그 바꾼 회사명 말인데요, EPN. 그거 대체 무슨 뜻입니까? 여기저기서 물어보는데 저도 당최 뜻을 알 수가 있어야지요. 허허, 대표님이 직접 바꾸신 거면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것 같긴 한데.
박용태의 물음에 하준은 걸음을 계속 이어가며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사실 별 뜻은 없어요. 그냥, 팔도라는 이름을 영어로만 바꾼 것뿐이라. 워낙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길래 조금 개명해 본 겁니다.”
-아! 이런이런! 그런 쪽일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네요. 하하, 이거 기사로 내보내면 반응들이 꽤 재밌겠는데요?
통화를 이어가며 데스크에서 출입증 발급 절차를 밟는 하준.
그때, 하준의 시야 먼 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기자님. 제가 지금 볼일이 좀 있어서 나중에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전속 관련해서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내보내 주시면 될 것 같은데.”
-아, 예 그럼요! 그건 제가 알아서 잘 써서 내보낼 테니 걱정 마시고 볼일 잘 보세요.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대표님!
“네, 들어가세요. 기자님.”
통화를 끊고는 곧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하준.
바로 자신의 시야 끝쪽에 보이고 있는 구세희였다.
수화음이 연결되는 동안에도 하준은 구세희의 움직임을 계속 눈으로 훑고 있었고, 구세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곤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런데 곧바로 받기보다는 뭔가를 망설이는 듯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고, 여전히 통화는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이내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하준아.
“회사지?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는데. 시간 괜찮으면 커피나 한잔하자. 따로 할 얘기도 있고.”
하준의 시야엔 여전히 멈춰 서 있는 구세희가 보이고 있었고, 그녀는 하준의 제안에 잠시 말이 없다 곧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아, 어쩌지? 지금 나 잠깐 밖에 나와 있어서 오늘은 힘들 것 같은데…….
평소와 달리 다소 힘없이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 게다가 밖에 나와 있다는 말까지 지어내는 그녀의 얘기에 하준은 의아한 마음이 들 수밖엔 없었다.
먼발치의 그녀를 지켜보던 하준은 이내 알겠다는 듯 답했다.
“그래, 그럼 조만간 시간 내서 보는 걸로 하자. 하려던 얘긴 그때 만나서 하는 걸로 하고.”
-응, 그래. 내가 다시 연락 줄게.
통화를 종료한 구세희는 여전히 제자리에 선 채로 움직이질 않았고, 이내 한 손을 이마에 짚으며 뭔가 깊은 고뇌에 빠진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흠.”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구세희의 그런 모습.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하준 또한 다소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