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저도 새 둥지에서의 출발이 굉장히 기대됩니다! 하하하.”
계약서의 최종 사인을 끝마치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하준에게 인사를 해오는 그.
하준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B&D에 있을 때와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있을 거예요. 혹 불편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주세요. 제가 없을 땐 이 친구에게라도 바로바로.”
계약 과정 내내 옆에서 자릴 지키고 있던 김지혜를 쳐다보며 류지혁이 고갤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대표님! 저야 대표님 하나만 보고 온 거라 딱히 요청 드릴 건 없을 거예요. 제가 쌩 신인은 아니라 더더욱. 하하.”
하준이 내민 손을 맞잡으며 류지혁이 씨익 웃어 보였고, 하준도 미소로 화답했다.
“그럼 점심 식사 맛있게 하시고요 대표님, 조만간 차기작 관련해서 논의 드리러 다시 찾아뵐게요. 아, 혹시 그 전에 괜찮다 싶은 시나리오 있으면 따로 챙겨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저도 들어오는 대본들은 꼼꼼히 챙겨보도록 할게요. 그리고, 전속 기사는 아마 내일 중으로 나가게 될 것 같은데. 괜찮으시죠?”
“아휴, 그럼요. 계약서까지 쓴 마당에 기사야 언제 나가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제부턴 제가 ‘EPN’ 소속이라는 게 중요한 거죠. 하하하.”
무척이나 들뜬 얼굴로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
하준과 또 한 번의 미소를 주고받곤 크게 고개 숙인 뒤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김지혜가 곧바로 찻잔을 치우며 말했다.
“역시 듣던 대로 완전 인성이 갑인 것 같은데요? 예의도 엄청 바른 것 같고! 와, 인기 많다고 다 거만한 게 아니었어. 짱!”
계약 과정 내내 보여온 태도를 눈앞에서 지켜본 김지혜는 감탄해 마지않는 표정이었다.
찻잔을 치우던 김지혜가 갑자기 궁금해졌다는 듯 하준에게 물어왔다.
“근데요, 대표님. 갑자기 회사 이름은 왜 바꾸신 거예요? 처음 회사 인수할 때도 전혀 개의치 않으셨던 분이?”
김지혜의 물음에 하준이 가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
“그냥. 여기저기서 하도 바꿨으면 좋겠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길래. 시대가 어느 시댄데 그런 이름을 쓰냐면서 말이야. 뭐라더라, 소개 할 때마다 수치사할지도 모른다나?”
“어머!”
하준의 얘기에 김지혜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손을 들어 입 위로 포갰다.
“혹시 제가 술 취해서 회식 자리에서 막 그런 얘기 했던 건 아니죠, 대표님……? 지금 그거, 제 얘긴 아니죠……?”
놀람과 당황스러움이 섞여 있는 김지혜의 반응에 하준이 다소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 말은, 너도 그동안 쭉 그런 생각을 해왔다는 건가?”
“아! 그, 그럴 리가요! 팔도 이름이 얼마나 좋았는데요! 막, 막, 그. 그러니까…… 뭔가 비, 비빔 라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김지혜의 모습에 하준은 피식 웃어 보이곤 서류들을 정리해 갔다.
그러자 김지혜가 민망한 얼굴을 하고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요, 대표님. 갑자기 왜 이렇게 소속 연예인들을 늘리시는 거예요? 그것도 B&D 소속이었던 배우들 위주로……?”
무슨 일인지 미국에 다녀온 뒤로 내부 직원들을 채용하기 시작한 하준.
채용한 직원들의 대부분은 윤채경과 김민정 등 기존의 배우들을 케어하는 부서로 투입시켰다.
단 두 명의 여배우를 위해서라기엔 다소 많게 느껴졌던 인원들.
아니나 다를까, 오전엔 김민우와 류지혁이란 두 명의 라이징 스타들이 사무실을 방문해 왔다.
자신들의 전속 계약과 관련해 대표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며.
최근 가장 핫하면서도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두 명의 남배우들. 얼마 전까진 두 사람 다 B&D 소속이었지만 박성환의 구속 이후 상호 협의하에 계약이 해지되었다.
FA 시장에 대어가 나타났다며 수많은 기사들에서 떠들어댔던 터라 김지혜 또한 결코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런 그들이 다른 곳도 아닌 이곳을 선택했다는 것, 그리고 외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하준이 그들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계약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내내 의아한 마음이 들 수밖엔 없던 것이었다.
김지혜의 물음에 하준이 시선은 서류에 두며 말했다.
“앞으론 회사를 좀 더 키워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마침 두 사람에게 먼저 연락이 오기도 했고.”
“아…… 그분들이 먼저 연락을 해왔던 거구나? 하긴, 여기엔 채경 언니도 있으니까.”
잠시 수긍하는 듯싶던 김지혜가 곧바로 다시 물어왔다.
“그럼 앞으로 배우뿐 아니라 가수 쪽도 늘리시는 거예요? 채용한 직원들은 다 배우 쪽 부서로만 배치됐던데.”
“아니. 그렇진 않을 거야.”
고개를 내젓곤 하준이 덧붙였다.
“지금껏 그래왔듯 이 회사에 마련되어진 모든 장비와 연습실들은 앞으로도 애들을 위해서만 관리가 이뤄질 거야. 애초에 이곳으로 사옥을 옮긴 이유도 다 그것 때문이니까.”
“아……!”
차분한 음성이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은 김지혜가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더 묻고 싶었던 것들을 접어두곤 김지혜가 곧바로 화제를 돌려왔다.
“아 참! 근데요 대표님, 그 바꾼 회사 이름 ‘EPN’은 대체 무슨 뜻이에요? 뭔가 영어 약자 같기도 한데!”
“응, 맞아.”
그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하준이 고갤 끄덕이곤 유창한 영어 단어들을 내뱉어왔다.
“Eight provinces nationwide. 여기에 앞글자만 딴 거야. E.P.N.”
“에잇 프로…… 음, 그러니까 조금 전 그 영어들이 다 무슨 뜻인데용? 대표님이 직접 지으신 거면 뭔가 엄청난 의미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유창한 영어 실력뿐 아니라 하준의 미국에서의 커리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지혜였기에 한껏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답을 기다렸다.
하준은 그런 김지혜와 한번 눈을 마주치곤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그럼, 굉장한 의미가 있지. 애들 뿐 아니라 우리 소속 연예인들이 수치사당할 일을 미연에 방지하게 되는 거니까.”
“에잇, 그런 거 말구요 대표님! 그 영어 단어들이 가진 뜻 말이에요, 뜻! 얼른 말씀 좀 해주시면 안 돼요오?”
자신의 채근에도 하준은 그저 뜻 모를 웃음만 지어 보이자, 김지혜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듯 쟁반을 내려놓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쳇, 그냥 직접 검색해 보는 게 더 빠르겠네요.”
그러곤 휴대폰 액정화면을 마구 두드리며 검색을 시작하는 김지혜.
그때, 팔도 대표실의 문을 누군가 노크하기 시작했다.
똑똑.
“저, 대표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미리 약속이 돼 있으시다고.”
여직원의 얘기에 김지혜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와는 달리 하준은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네, 들어오라고 하세요.”
“응? 누가 또 오기로 돼 있었어요? 오전 계약은 김민우 씨, 류지혁 씨 두 분이 다였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체크했나……?”
잠시 검색을 멈추곤 김지혜가 메모해둔 내용들을 살피려 하자 하준이 말했다.
“아냐. 내가 개인적인 손님이야. 갑자기 잡힌 거라 미처 전달을 못했네.”
“아, 그렇구나! 그럼 곧바로 차 내올게요, 대표님!”
“그래, 고마워.”
김지혜가 휴대폰을 바지 뒷주머니로 꽂고는 곧바로 쟁반을 챙겨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슬아가 대표실 안쪽으로 모습들 드러냈다.
“저, 안녕하세요. 대표님. 제가 좀 일찍 왔죠……?”
통화 때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전에 봤을 때와는 다소 소극적인 태도의 그녀.
하준은 옅게 웃어 보이며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아냐, 딱 맞춰서 왔어. 앉아.”
“아, 네!”
이슬아가 자리에 앉는 사이 하준은 올려진 계약서들을 마저 정리하곤 한편으로 옮겼다.
그러곤 이슬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일로 고맙단 인사를 꼭 하고 싶었는데. 그 뒤로 워낙 경황이 없는 바람에 따로 연락을 못했네. 사업은 잘 돼가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이슬아와는 일면식도 없었던 하준.
멤버들에게 그녀의 과거와 성격, 그리고 현재는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 뒤늦게나마 자세히 전해 듣게 되었었다.
거기에 황수철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잡기 위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을 자처했는지까지.
그때의 일만큼은 자신이 계획했던 것도, 또 계획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이슬아에겐 분명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밖엔 없었다.
그녀의 그런 대담한 도움이 아니었다면 결코 그런 결과물을 만들어내진 못했을 테니까.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들’과 긴 싸움을 펼치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하준의 질문에 이슬아가 어색한 웃음을 띠며 고갤 내저었다.
“아뇨. 하던 일은 다 정리했어요. 조금 전에 폐업 신고도 하고 왔구요.”
다소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답변에 하준이 눈동자를 살짝 키웠다.
“아, 듣기론 꽤 잘돼간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뇨, 아뇨. 그냥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져서요. 애초에 좋아서 시작했던 것도 아니고 연습생 그만두고 나니까 뭐라도 당장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할 것 같아서 손댄 거라. 할 만큼 했다 싶기도 했고…….”
“음.”
이슬아의 얘기에 하준은 말없이 고갤 주억거렸다.
연습생으로선 다소 많은 나이일지 몰라도 사회에서만큼은 분명 어린 나이임엔 틀림없었으니까.
하고 싶은 것, 그리고 도전해 보고 싶은 것들이 무궁무진할 시기일 터였다.
하준은 왼쪽 손목의 시계를 잠시 힐긋하곤 이슬아를 바라봤다.
“우선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라는 게 뭔지 먼저 들어볼 수 있을까? 곧 점심시간이니까 얼른 얘기 끝내고 식사나 한번 했으면 하는데. 지난번 일에 대한 답례도 할 겸.”
“아! 저는 괜……!”
이슬아가 손을 크게 내저으며 괜찮다는 얘길 하려던 때, 대표실의 문이 열리며 차를 준비해 오겠다던 김지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준도 김지혜에게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꼭 한번 사주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거절은 안 해도 돼. 안 그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지가 않아서.”
“아…….”
김지혜가 쟁반 위에서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리며 이슬아에게 물었다.
“아이스 괜찮으시죠?”
“아, 네 그럼요! 감사합니다.”
하준은 캐모마일이 담긴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고, 이슬아는 꽤나 꺼내기 힘든 얘기인 듯 내내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그러자 하준이 온화한 미소를 건네며 말했다.
“무슨 얘기인진 모르겠지만 편하게 해도 돼. 혹시나 뭔가를 부탁하려는 쪽이라면 더더욱 그래도 되고. 뭐든 다 들어줄 용의가 있으니까.”
뭐든 다 들어줄 용의가 있다는 하준의 말에 이슬아의 표정이 일순 바뀌었다.
그러고는 이전과는 달리 눈빛을 빛내며 하준에게 물어왔다.
“저, 정말요? 정말 뭐든 다 들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역시나 부탁하려는 쪽이었구나 싶어 하준은 웃음을 지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럼. 오히려 그편이 나도 마음은 훨씬 편할 것 같은데?”
설마 누군갈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진 않을 테니까 흔쾌히 뭐든 다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아직 20대 초반인 그녀의 나이를 고려하면 더더욱 어려운 부탁은 아닐 터였고.
재차 똑같은 대답을 해오는 하준의 말에 이슬아는 어딘가 모르게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키며 당찬 목소리로 말을 내뱉어왔다.
“저 좀 키워주세요, 대표님! 저 진짜, 진짜 열심히 할 자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