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꾸는 스타 메이커-110화 (111/165)

110화

“이거 설마…….”

12개로 분할된 그림 콘티를 확인하던 은호가 일순 고갤 들어 올리고는 최형수를 바라봤다.

분명 뭔가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다는 표정과 눈빛으로.

그런 은호의 반응에 최형수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어왔다.

“허허, 그래도 많이 수정된 건 아니지? 기존 콘티에서 아주 살짝만 바뀐 거야, 사알짝.”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존에 멤버들이 받았던 콘티와는 콘셉트도, 대사도, 상황도. 거의 달라진 바가 없었으니까.

딱 하나 바뀐 점이 있다면, 바로 은호의 촬영 의상뿐.

여전히 당황함이 묻어 있는 얼굴로 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혹시 왜 저만 이렇게 바뀐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얘네는 다 평범한 의상인 것 같은데…….”

“하하, 좀 당황스럽긴 하지? 근데, 뭐 그렇게 됐어. 컨펌 받는 과정에서 광고주가 딱 이 부분만 수정을 해줬으면 했거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광고주님의 요청인데, 감히 거역할 수가 있나! ‘예예’ 하고 따를 수밖에. 허허.”

“광고주님이요?”

광고주란 단어에 은호의 눈빛이 살짝 긴장으로 바뀌었다.

광고 촬영은 처음일지라도 ‘광고주’란 단어가 갖는 힘이 얼마나 큰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섭외에 대한 최종 결정 권한 또한 분명 ‘그분’에게 있었을 테고.

은호의 물음에 최형수가 팔짱을 끼곤 고갤 끄덕였다.

“그 광고주님이 너희 NTV 육아 프로그램 할 때부터 엄청 눈여겨봤다 하더라고. 딱 보자마자 될성 부른 나무인 것 같아서 프로그램도 꼬박꼬박 챙겨 보셨었고. 아마 그중에서도 은호 너를 제일 좋아하셨던 게 아닐까 싶은데? 크큭.”

최형수의 얘기에 그제야 다른 멤버들도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갤 주억거려 왔다.

“아! 그래서 은호 형만 의상이 이렇게 바뀐 거였구나?! 광고주님이 형 토끼 잠옷 입은 걸 엄청 귀엽게 보셔서!”

“것봐요 형! 내가 그 잠옷 버리지 말고 있으라고 했죠? 분명 그걸로 좋은 일이 또 생길 거라고! 헤헤.”

“푸흡. 근데…… 좀 웃기긴 하겠다. 크크큭.”

위로인지 놀리는 건지 당최 알 수 없는 멤버들의 한마디씩에 은호는 곧바로 하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이 콘티대로 가도 괜찮은 건지 하준의 의견을 묻고자 하는 눈치였다.

그런 은호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하준이 웃음을 띄어 보였다.

“음, 은호 너가 괜찮으면 그대로 가는 거고 정 아니다 싶으면 광고주님께 정중히 부탁드려 봐야 하지 않을까? 네가 도저히 못 입을 것 같다면 말야.”

하준이 최형수에게로 고갤 돌리며 물었다.

“오늘 촬영에 광고주님도 직접 오시는 거죠?”

“아, 예 그럼요! 바쁜 스케줄 다 제쳐두고라도 멤버들 촬영만큼은 꼭 보러 오시겠다고 하던데요? 하하. 본인 입으로 1호 팬이나 다름없다고 어찌나 강조하시던지!”

최형수의 얘기에 하준은 묘한 미소와 함께 은호를 쳐다봤고, 최형수 또한 은호의 답을 들으려는 듯 시선을 고정시켰다.

다른 사람도 아닌 광고주의 요청, 게다가 그 광고주가 자신들의 1호 팬이란 말까지 해왔다고 하니 은호에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엇보다, 오늘의 촬영 현장에 그가 직접 방문하겠다고 한 상황에선 더더욱.

애초에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의 입장에선 가타부타 토를 달 수도 없었던 일.

은호는 하는 수 없이 고갤 끄덕였다.

“당, 당연히 해야죠! 다른 분도 아니고 광고주님이 요청하신 일인데. 어떻게, 지금 바로 갈아입고 오면 될까요?!”

곧바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오자, 내내 킬킬거리고 있던 지호가 웃음을 겨우 참아내며 물었다.

“큭. 형 정말 괜찮겠어요? 형 그 옷 입은 거 평생의 흑역사라고 두 번 다신 입을 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펴어어엉생.”

이준도 곧바로 말을 보태왔다.

“그래. 너 토끼에 토 자도 듣기 싫댔잖아. 이거 찍고 나면 앞으론 TV 켤 때마다 나오게 될 텐데. 정말 괜찮겠어?”

워딩 자체만으로는 은호를 걱정하는 듯 보여도 실상은 다들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은호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 은호의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을지 모두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호는 최대한 괜찮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크게 고갤 끄덕였다.

“그럼! 당연히 괜찮지! 우리 같은 신인 그룹은 뭐든 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너희도 항상 나 같은 마인드를 가지며 일하라고. 알겠어?”

그때, 의상을 담당하는 스태프들이 뭔가 거대한 물체를 들곤 분장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은호의 앞에 그것을 떡하니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것을 감싸고 있던 검은 비닐을 벗기는 순간.

은호와 멤버들의 표정은 또 한 번 극명한 대조를 보여왔다.

“맙소사.”

“대박.”

“와…… 이건 그냥 토끼가 아닌데? 이건.”

멤버들의 연이은 감탄사들, 그리고 강준의 마지막 말을 은호가 황당한 표정으로 이어받았다.

“진짜 토끼잖아…….”

* * *

잠시 후, 은호를 제외한 네 명의 멤버들이 CG용 배경을 두고 카메라 앞에 섰다.

앞에 놓인 테이블 위론 P사의 신메뉴가 세팅되어 있었고, 곧이어 시작될 촬영을 앞두고 저마다 입들을 열심히 풀고 있었다.

카메라 뒤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하준에게 최형수가 다가와 말을 붙였다.

“대표님. 곧 있으면 광고주님 들어오실 거예요. 지금 막 도착하셨다고 하네요?”

“아, 네. 오시면 따로 인사드려야겠네요.”

“하하, 그럼요. 아까 대기실에서 제가 괜히 없는 소리 꺼낸 게 아니라니까요? 이 광고주님이 다른 그룹들은 다 필요 없다고, 무조건 로 해야 한다고 엄청 강조하셨거든요. 계약금은 얼마가 돼도 상관없으니 무조건 섭외해 오라고.”

뒤쪽을 계속 힐긋거리며 꺼내오는 최형수의 얘기에 하준도 살짝 눈동자를 키웠다.

그렇지 않아도 신인 그룹치고는 꽤나 높은 금액이 제안되었다 싶은 생각은 하고 있었던 터였다.

굳이 이쪽에서 어떠한 조율이나 흥정 따위를 할 필요도 없이 무척이나 만족할 만한 액수로.

하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최형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왔다.

“대표님이 알고 계시는진 모르겠지만, 이 P사 광고는 여타 다른 햄버거 회사들하곤 아예 결이 달라요. 배우, 아이돌 할 것 없이 다들 엄청 탐내는 광고 중에 하나거든요. 그만큼 아무나 막 섭외하지 않기도 하고요.”

“음. 그런가요?”

사실 그 부분까진 하준도 파악하고 있지 못한 부분이었다. 애초에 선택한 광고들 모두가 오로지 멤버들의 의견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어떤 제품이든, 어떤 회사든 간에 꼭 반대해야 할 만한 명확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그 의견을 다 수용할 생각이었고.

하준의 다소 뜨뜨미지근한 반응에 최형수는 아무래도 제대로 알려줘야겠다는 듯 자세까지 고쳐잡곤 말했다.

“대표님. 이 광고주가 왜 무조건 여야만 한다고 하신지 아세요? 그것도 그 수많은 인기 스타들을 다 제쳐두고 고작 이제 막 데뷔한 신인 그룹을?”

“…….”

순간 말이 과격했다는 걸 깨닫곤 최형수가 살짝 정정해 왔다.

“아, 고작이란 단어는 빼고요. 허허, 제가 흥분한 바람에 좀 실언을 했네요.”

하준이 괜찮다는 듯 옅게 웃어 보이자 최형수는 곧 다시 열변을 토해왔다.

“바로 대표님 때문이에요. 란 그룹 자체가 아니라 그들을 키워내고 또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게 만든 대표님을 보고 그분이 이런 결정을 했다 이거죠.”

하준의 입장에선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그의 얘기.

분명 아까 분장실에선 의 1호 팬이란 말까지 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얼굴 위로 약간의 물음표가 띄어져 있는 하준을 바라보며 최형수는 조금 전 자신의 말뜻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래 P사 자체가 이렇게 업계 1위를 차지할 만한 회사는 절대 아니었어요. 오히려 인지도나 평판 면에서는 언제 사라져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쪽에 더 가까웠죠. 근데, 수년 전 CEO가 바뀌고 나더니 순식간에 밑바닥부터 쭉 치고 올라오더라고요? 그것도 브랜드 이미지까지 아예 탈바꿈시키면서요.”

말을 내뱉는 최형수의 얼굴 위론 해당 CEO에 대한 존경과 감탄이 적잖이 묻어나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어이 업계 1위 자리까지 차지하더니 이후론 쭉 지금의 상태가 유지돼 오고 있는 거죠. 제가 이 얘길 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만큼 그 CEO, 그러니까 좀 있다 대표님이 만나뵙게 될 이 광고주가 엄청 깐깐하면서도 보는 안목이 보통이 아니다 이거예요.”

꽤나 열분을 토하며 얘길 꺼내오는 그였지만, 하준은 여전히 그가 하고 싶은 말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를 섭외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게 자신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건지.

정작 중요한 얘기는 아직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하준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듯 최형수가 곧바로 입을 열어왔다.

“그래서 제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뭐냐면요, 대표님. 대표님이 키운 애들이라면 절대 후회할 선택은 아닐거라 판단했다 이거예요.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의 계약 기간 동안에도 멤버들이 사고 칠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아주 확신을 했다 이 말인 거죠!”

마치 자신이 광고주로 빙의하기라도 한 듯 무척이나 열정적으로 내뱉는 그의 언성에 주변 스태프들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붙고 있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준을 지그시 바라봤다.

“요즘 배우건 가수건, 잘나간다는 스타들 섭외했다가 아주 뒷통수 제대로 맞는 경우 많이들 보셨을 거예요. 그렇게 인지도 하나만 보고 계약했다가 사건 터지고 나면 결국 찍었던 광고는 써보지도 못하고 다 내려야 되거든요. 게다가, 돈은 돈 대로 쓰고 브랜드 이미지는 또 이미지대로 나빠지고. 아주 최악도 그런 최악이 없는 거죠.”

“흐음.”

여전히 하준은 그에게 듣고자 하는 말을 듣지 못한 상태였고, 최형수가 그 말을 꺼내온 건 그것과 같은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바로 유 대표님이 키운 애들이라면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신 거죠. 저도 그 의견엔 백 퍼센트 공감하는 바이고요. 실패라곤 조금도 모르고 살아온 미지의 스타 메이커, ‘H’. 크으, 이런 보장된 스펙을 안 믿으면 뭘 믿겠습니까? 아, 안 그래요? 하하하.”

결국 이 얘길 꺼내기 위해 그 긴 열변을 토해왔던 모양.

그럼에도 하준은 쉬이 납득이 가질 않고 있었다.

그렇게나 깐깐하고 보는 안목이 높다는 그가, 실질적인 광고 출연자가 아닌 그들의 소속사 대표만을 보고 이런 결정을 해올 수가 있다니.

그것도 신인 그룹치고는 엄청 파격적인 조건까지 걸어가며.

얘길 들은 이상 하준 또한 그 광고주라는 인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있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가 오기 전 최형수에게 묻기 위해 입을 떼려는데.

그와 같은 타이밍에 누군가가 뒤쪽에서 최형수를 먼저 불러왔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준비는 잘 돼가고 계시죠?”

낯선 목소리에 하준의 시선이 뒤쪽으로 옮겨졌고, 최형수 또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곤 곧바로 반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하하하. 아, 예 그럼요. 이제 막 준비 다 끝내고 이촬영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러고는 그가 곧바로 하준에게 나지막이 속삭여왔다.

“이분이에요, 제가 말씀드렸던 그 광고주님.”

“아.”

광고주란 말에 하준 또한 일순 표정이 바뀔 수밖엔 없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가 아닌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런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치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느낌이기도 했고.

어쨌거나 자신과 멤버들을 좋게 봐준 인물이기에 하준은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런데, 하준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건네온 건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그녀가 내뱉은 말은 하준의 표정을 또 한 번 크게 달라지게 만들었다.

“오랜만이네요? 유하준 대표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