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오 마이 갓…….”
멤버들의 의상을 훑던 김예슬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미국이 무슨 집 앞 캠핑장도 아니고. 대체 어떻게 딸랑 한 벌씩만 챙겨올 수가 있지? 것도 무대 의상이랑 일상복을 겸용하는 걸로? 하, 미치겠다.”
이마를 짚으며 고갤 절레 내젓고 있는 김예슬에게 지호가 나지막이 말을 정정해 왔다.
“그…… 정확힌 두 벌씩이에요. 잠 잘 때 입는 건 따로 챙겨와서. 헤헤.”
“……참나.”
어이없다는 듯 지호를 잠시 쳐다보곤 김예슬이 멤버들에게 푸념하듯 말했다.
“휴. 그냥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무려 ‘안토니 스미스’ 콘서트에 3주씩이나 동행하는 건데. 멋이란 멋은 부릴 수 있는 대로 다 부리고 서야 할 거 아냐. 이게 어떤 기횐데!”
멤버들의 스타일링을 책임지는 김예슬의 입장에선 충분히 속상할 만도 한 상황.
은호가 씨익 웃음을 띠우며 김예슬의 팔을 흔들어댔다.
“에이, 그래서 누나가 이렇게 온 거잖아요~ 우리 최고로 멋지게 만들어 주려고!”
은호의 얘기에 하늘과 지호도 곧바로 거들었다.
“헤헤, 예슬 누나 오니까 엄청 든든하다, 그쵸?”
“당근이지! 지금 이 순간부턴 완전 딴 사람들이 되는 거라고 우린!”
강준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음을 내비쳤다.
“저희도 이런 상황인 건 전혀 모르고 왔어요. 대표님이 별다른 말씀을 안 해주셔서.”
“휴우…….”
짧게 한숨을 내뱉곤 김예슬이 수긍한다는 듯 고갤 천천히 끄덕여왔다.
“하긴. 나도 대표님 연락받고 오는 내내 심장이 두근두근하던데. 당사자인 너희는 오죽했겠니. 오히려 대표님이 미리 얘기 안 하신 게 더 나았을 수도 있겠더라니까.”
잠시 어투가 차분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한층 더 상기된 톤으로 김예슬이 말을 내뱉어왔다.
“하, 근데 진짜 말도 안 된다. 너희가 안토니 콘서트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놀랄 노 자인데. 거기에 로버트 펄론 쇼에까지? 이거 진짜 다 사실 맞지? 혹시 나만 혼자 속고 있고 막 그런 건 아니지?”
김예슬의 반응에 무척 공감한다는 듯 멤버들도 비슷한 반응들을 보여왔다.
“그쵸? 저희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당장 내일이 출연날인데도 아직까지 전혀 실감이 안 난다니까요?”
“심지어 어젯밤엔 저희 자는 방마다 다 뒤져보기까지 했어요. 혹시나 우리가 몰래카메라에 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왜, 그거 있잖아요. 그, 그 트…….”
“트루먼 쇼!”
“어, 맞아. 그거! 저희가 여기에 온 것부터 해서 지금까지 겪은 일들 죄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일들뿐이니까 그런 합리적 의심이 들더라니까요!”
멤버들이 하준을 따라 미국에 온 지 이제 겨우 일주일 차.
뉴욕 시티필드에서 자신들의 무대를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세계적인 스타들과의 만남, 그리고 그들로부터 듣게 된 하준에 대한 몰랐던 이야기들까지.
이곳에 온 뒤로 멤버들에겐 하루하루가 매번 놀라움의 연속일 수밖엔 없었다.
개중에서도 단연 최고를 꼽자면, 바로 이틀 전 밤 벌어졌던 그 엄청난 사건이었고.
마치 한 편의 할리우드 영화와도 같았던 긴박하고도 급박했던 순간들.
하준의 담대하고도 대담했던 심리전과 멤버들의 순간적인 기지가 발휘된 덕에 상황은 무사히 종료될 수 있었다.
하준과 멤버들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납치범들에게 끌려갈 뻔했던 ‘그’ 또한 어떠한 피해도 없이.
그리고, 해당 사건만큼이나 멤버들을 놀라게 했던 건. 바로 그가 내걸어온 제안이었다.
사건이 벌어지고 있을 당시만 해도 그의 정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멤버들.
당연스럽게도 자신의 쇼에 초대하겠다는 그의 말은 무척이나 뜬금없게 느껴질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쇼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 나자, 일순 멤버들의 반응은 경악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이곳에 온 뒤로 자신들이 겪어오던 일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 자체를 ‘사건’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정도로.
“대체 대표님은 여기서 어떤 사람이었을까?”
거대한 쇼핑센터 앞. 입구를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을 훑으며 이준이 낮게 읊조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야. 우리가 뭘 상상하고 뭘 느끼든, 그 이상으로.”
리더 이준의 사뭇 진지해진 얼굴에 둘러 모여 있던 멤버들도 공감의 고갯짓을 해왔다.
“그쵸. 여기 와서 직접 보고 듣고 느끼니까 그게 확 피부로 와 닿는 것 같아요.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을 접하면 접할수록 더.”
“안토니, 제프, 존, 그리고 레일리까지. 그 세계적인 스타들도 모두 다 입 모아 얘기했잖아요. 다들 그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건 다 대표님 덕분이라고.”
“게다가, 알려지지 않은 얘기들은 훨씬 더 많다고도 했었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복기시킬 때면 매번 같은 방향으로 치닿게 되는 결론.
역시나 오늘도 하준이었다.
이보다 더 놀란 일은 앞으로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도 매번 보란듯 그것들을 뒤집어 버리는 하준.
마치 그에겐 어떤 정답지가 주어져 있는 것처럼 거침없는 행보들의 연속이었다.
“그때 보니까 로버트 펄론이랑도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인 것처럼 보이더라고. 대표님이 오랜만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아, 정말요? 대표님이 그러셨어요?”
당시 통역을 전달받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멤버들은 은호의 말에 살짝 눈동자들을 키워왔다.
은호는 고갤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응. 근데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긴 했어. 레일리가 그러더라고. 두 사람이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된 게 참 별일이라고.”
전혀 모르고 있던 또 다른 얘기들을 전해 듣자 멤버들의 얼굴 위론 물음표가 떠올랐다.
“흐음. 문장 자체만 놓고 보면 뭔가 좋은 느낌은 아닌 것 같은데. 그쵸?”
“응, 그렇긴 하지. 그때 레일리 뉘앙스도 반가울 때의 그런 쪽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와…… 그럼 그런데도 대표님은 그렇게 하셨던 거예요? 자칫하면 본인이 죽을지도 모를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몇 초만 더 흘렀어도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는 그날 밤의 상황.
은호의 얘길 듣고 그때를 돌이켜보자 더욱 하준의 행동들이 놀랍게 느껴질 수밖엔 없었다.
그 사이로, 이준이 낮게 말을 꺼내왔다.
“그게 대표님이니까. 어떤 관계였든 간에 일단은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거지.”
이준이 멤버들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우리한테도 항상 그러시잖아. 당장의 이익이나 손실을 따지기보단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거. 그 어떤 조건 같은 것도 없이.”
이준의 얘기에 멤버들 개개인마다의 머릿속으로도 하준과의 기억들이 스쳐 갔다.
자신들의 활동과 전혀 관련된 게 아닌 일들에도 항상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던 하준.
그렇기에 조금 전 이준의 말은 격한 공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자, 다들 대표님이 각자한테 어떻게 해줬는지 잘 알고 있다면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겠다. 그치?”
이대로 두었다간 갑자기 장르가 다큐로 바뀔 것 같은 느낌에 김예슬이 톤을 높이며 말을 꺼내왔다.
그러고는 크로스백을 뒤적거리며 덧붙였다.
“앞으로 남은 미국 일정에서 이란 이름을 최대한 널리 알려보자구.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너희들이 얼마나 멋지고 잘생긴 애들인지 말야.”
마침내 찾고자 하는 물건을 집은 듯, 김예슬이 씨익 웃어 보이며 까만색 카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지금부터 우리의 미션은 딱 한 시간 동안 여기에 있는 옷들을 다 털어 버리는 거야! 그것도 가장 비싸고 고급진 것들로만! 이거, 대표님이 나한테 주신 특별 미션이다?”
“대표님이요?”
“응. 대표님 연락받고 내가 급하게 의상들이랑 다 챙겨오려고 했는데, 대표님이 그냥 몸만 오라고 하시더라고. 필요한 것들은 다 여기서 준비하자시면서. 그러니까 너희가 지금부터 쇼핑에 집중해 주지 않는다면 난 짤리고 말 거라구!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며 김예슬이 곧바로 멤버들의 등쌀을 떠밀었다.
“자자, 이러고 있을 시간 없으니까 얼른 들어들 가자고! 일단 명품관부터 싹 털고 시작하자!”
하준의 특별 미션을 받았다는 김예슬의 얘기. 멤버들도 김예슬의 발걸음에 맞추며 빠르게 대형 쇼핑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김예슬이 이끄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동안 하늘이 물어왔다.
“누나 근데 대표님은 어디 가신 거예요? 그냥 저희끼리만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해서.”
하늘의 물음에 김예슬이 아무런 걱정할 필요 없다며 씨익 웃어 보였다.
“걱정 마. 대표님은 바로 근처에 계신다고 했으니까. 우리 쇼핑 끝날쯤 되면 이쪽으로 오시겠다고 했어.”
* * *
강가를 따라 긴 산책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이어폰을 낀 채 조깅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간간이 보이고 있는 풍경.
그 사이로 하준은 홀로 벤치에 앉아 버스킹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Where I’m going. where I’m going to take me.”
기타 케이스를 자신의 앞 바닥에 내려두곤 몇 안 되는 관객 앞에서도 열심히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한 사내.
하준은 더 이상 김도 나지 않는 커피를 든 채 벌써 그의 다섯 번째 곡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어떠한 미래 예지를 본 탓에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닌,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7년 전 처음 미래 예지를 접한 이후로 쉴 틈 없이 달려왔던 하준.
자신에게 주어진 정답지를 여러 방면으로 활용하면서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게 됐었다.
그럼에도 매번 들 수밖에 없던 의문들.
대체 왜 이런 능력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고, 또 언제까지 자신의 앞에 나타날 것인가.
확신할 순 없었지만 분명 어떤 명확한 이유나 그것의 끝이 존재할 것만 같은 느낌이 항상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에 온 뒤로 악몽같던 그것들이 일순 하나씩 해소되기 시작.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인과성마저 깨닫고 나자 하준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리고, 박성환과의 일을 마무리 지음으로써 이젠 모든 게 다 끝이 났단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고.
“Where I’m going. where I’m going to take me.”
하지만, 왜일까.
이젠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줄만 알았던 미래 예지는 또 한 번 자신의 앞에 불현듯 튀어나왔고, 하준은 이번에도 역시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밖엔 없었다.
바로, 이틀 전 밤 그때.
“…….”
대체 왜, 그리고 언제까지. 또 무엇을 위해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눈앞의 공연을 바라보며 하준의 머릿속으론 문득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이 모든 걸 어디선가 그녀는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그리고, 언젠간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앞에 나타나 말해줄 것만 같은.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이젠 그만 쉬어도 된다고.
“I’m still walking. I still can’t answer.”
스트록으로 여섯 개의 기타 줄을 하강시키며 마무리된 버스킹.
하준은 식어 버린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빈 기타 케이스에 100달러짜리 한 장을 넣으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Thank you. It was the best performance of my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