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눈앞을 빠르게 스쳐 가는 파노라마의 장면들.
늘 그래왔듯,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자 뭉개졌던 시야가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돌아온 시야로 곧바로 창문을 바라본 하준은 일순 표정이 굳어질 수밖엔 없었다.
여전히 중년의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고.
각 블록마다 자리한 세 명의 강도들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폴리스. 당장 폴리스 불러줘!”
저마다 웃음꽃이 핀 채 술병들을 들고 있는 일행에게 소리치곤 주변을 훑기 시작하는 하준.
지금 당장 무슨 행동이라도 취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불상사가 생긴다는 걸 알기에 무척이나 급박할 수밖에 없었다.
“폴리스? 갑자기 왜 그래, 쭌?”
한창 여유로운 분위기 속, 갑작스러운 하준의 행동에 일행 모두 당황한 모습들을 보였고, 하준은 다시 한번 내뱉었다.
“일단 폴리스부터 불러줘. 얼른! 자칫하면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얼른 와달라고!”
지금껏 본 적 없는 하준의 다급한 모습에 안토니는 심각성을 깨닫곤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는 사이 하준은 빈 맥주병을 들고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골목가 바닥을 향해 있는 힘껏 그것을 집어 던졌다.
파악- 쨍!
파괴음을 귓바퀴로 흘리며 하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문밖으로 뛰쳐나갔고, 아직까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일행 또한 하준을 다급히 뒤따랐다.
하지만, 잠시 후.
하준이 모든 계단을 내려와 골목가에 발을 내디뎠을 땐, 이미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 이후였다.
“돈 무브!!! 풋처 핸 섭!!”
어떻게든 잠깐의 시간이라도 벌어보고자 던진 맥주병이 오히려 그들의 행동을 부추긴 꼴이 돼 버린 상황.
이미 그들은 중년의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상태였고, 남자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멈춰.”
자신을 뒤따라오는 일행에게 손을 뻗곤 작게 내뱉은 하준.
여유라곤 조금도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래야만 했다.
이미 파노라마로 스쳐갔던 미래를 본 이상, 까딱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릴지도 몰랐기에.
“If you move, I’m going to shoot(움직이면 바로 쏠 줄 알아)!”
총을 든 강도는 당장에라도 쏠 기세로 연신 겁박을 이어가고 있었고, 그사이 다른 두 명의 공범들은 중년의 남자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혹여 폴리스나 다른 방해 요소들이 생기기 전에 얼른 일을 해치우려는 듯.
하준은 그들의 목적이 납치라는 것뿐 아니라, 그 이후에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까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킬 수밖엔 없었다.
지금 이대로 그를 보내게 된다면, 그는 반드시 살해되고 말 것이기에.
“Please, Please save me…… I beg you……(부탁이야, 제발 살려줘).”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내뱉어짐과 동시에 하준의 일행은 일제히 눈과 입을 크게 벌려왔다.
모두가 이제야 그가 누군지를 알아차린 듯한 모습들이었다.
“오 마이 갓. 이건 너무 심각한 상황이잖아……?”
안토니뿐 아니라 제프와 존, 그리고 레일리까지.
일행 모두가 그의 얼굴을 결코 모를 수 없었기에 멤버들보다도 훨씬 더 경악한 얼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얼굴을 아는 걸 넘어, 이미 그들 모두 일면식이 있는 남자였기에 더더욱.
하준 일행의 존재를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가운데, 두 명의 강도는 중년의 남자에게 거의 다다르기 직전이었고, 하준의 마음은 한층 더 급박해졌다.
그를 향해 겨누고 있는 총 안엔 분명 실탄이 채워져 있을 것이고, 지금 이곳에서 발포되지 않더라도 머지않아 반드시 남자의 몸 안에 박히고 말 것이기 때문에.
이대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만은 없는 상황.
하준은 어떻게든 폴리스가 오기 전까진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가 납치되는 것만은 반드시 막아야만 했고.
“…….”
마음의 결정을 내린 하준은 차량 뒤에 가려져 있던 몸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강도의 앞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헤이! 쭌!”
하준의 돌발적인 행동에 일행 모두가 그를 다급히 불러왔음에도 하준은 다가오지 말라는 제스처만 짧게 취한 채, 총을 겨누고 있는 그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
목적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던 강도는 갑자기 튀어나온 하준의 등장에 일순 눈동자가 키워졌고, 들고 있던 총구의 방향을 곧바로 하준에게로 옮겼다.
“스탑! 돈 무브!”
공범들의 상황을 계속 눈으로 확인하며 하준을 향해 총을 계속 흔들어대는 강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움직일 시 즉각 발포하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자칫하면 큰일로 번지게 될지도 모를 위험천만한 상황.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하준은 양팔을 위로 들곤 침착한 어투로 내뱉었다.
“헤이, 네가 원하는 게 돈이 아니란 건 알고 있어. 그보단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크겠지, 저 남자에게.”
하준은 짧은 고갯짓으로 자신의 뒤쪽 방향을 가리키곤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잘 생각해야 할 거야. 지금 여기서 멈춘다면 어떻게든 다시 감옥으로 가는 것만은 막아줄 수 있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남은 평생을 다시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썩으며 살게 될 테니까.”
마치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내뱉는 하준의 얘기에 유일하게 보이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일렁였다.
자칫하면 그를 자극시킬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준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갔다.
“알잖아, 저 남자가 누군지. 그리고,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지금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미국 연방 법원은 결코 너에게 선처 따윈 베풀지 않을 거야. 물론 그의 팬들이 그렇게 만들기도 할 거고.”
하준의 계속되는 발언에 그가 잠시 흔들렸던 눈동자를 고쳐 잡곤 총을 하준의 얼굴 위로 들어 올렸다.
“닥쳐!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지껄여대는 거야?! 저 자식은 반드시 죗값을 받아야 하는 놈이라고! 나와 내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친 놈이니까!”
총구의 방향은 여전히 하준을 향한 채, 그가 탄창 장전하는 모션을 취하며 하준에게로 몇 발자국 다가왔다.
“너도 지금 이 자리에서 머리통이 날아가고 싶지 않다면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그럼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까.”
어느새 하준의 코앞까지 다가온 강도는 하준의 얼굴과 한 뼘도 채 되지 않은 위치까지 총을 겨누고 있었고,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총구의 구멍 사이가 훤히 보일 정도로 위험천만한 순간임에도 하준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입술을 뗐다.
“좋아, 네가 정 그렇게 해야겠다면 굳이 말리진 않을게.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분명히 기억해. 네가 원하는 걸 다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이게 아니라도 얼마든지 있다는 걸.”
하준은 들었던 양팔을 내리곤 몸을 돌려 먼발치의 중년의 남자를 가리켰다.
“그게 돈이든 저 남자로부터의 진심어린 사과든, 이런 선택이 아니더라도 네 복수심을 해소할 방법은 얼마든 있단 소리야.”
하준의 얘기에 강도는 어금니를 꽉 깨물곤 하준에게 더 가까이 붙어왔다.
그러고는 이번엔 총구를 하준의 이마에 딱 붙이며 작게 내뱉었다.
“내가 입 닥치라고 했지. 여기서 한번만 더 지껄이면 네 머리통은 곧바로 산산조각이 날 줄 알아. 알았어?”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며 하준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이마와 맞닿아 있는 총구를 감싸 쥐며 작게 웃어 보였다.
“잘 들어. 나를 쏘든, 저 남자를 쏘든. 아니면 둘 다 여기서 죽이든. 분명 너 하나의 인생만 끝나는 건 아닐 거야. 네가 감옥에 썩어 살던 그 몇 년 동안, 네 가족들은 지옥 같던 하루하루를 견디면서도 네가 다시 품으로 돌아올 날만 기다렸겠지. 그런데, 그날이 오자마자 다시 이런 짓을 저질러서 그 고통을 다시 안기겠다고? 그것도 평생? 나라면 절대 하지 못할 짓일 텐데 말야.”
“xxxx!”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도 모자랄 판에 하준은 그에 대한 자극을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듯 감싸고 있던 복면을 벗어 버리곤 자신의 얼굴을 하준에게 들이밀었다.
“좋아. 네 소원이 여기서 죽는 거라면 내가 당장에 이뤄주도록 하지. 똑똑히 기억해 둬. 지옥 불에 뛰어들기 전 네 소원을 들어준 내 얼굴을 말이야.”
입김을 가득 섞어 하준에게 내뱉곤 곧바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옮기는 그.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에 서서히 힘을 주기 시작했다.
만약 여기서 조금의 힘이라도 더 가해진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리고 마는 일촉즉발의 순간.
여전히 고요함 그 자체인 골목가 내론 그 어떤 구조의 사인조차 들려오질 않고 있었다.
그런데.
삐이이이잉-!!!!
삐이이이잉-!!!!
삐이이이잉-!!!!
그 어떠한 작은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고 있던 그곳으로 일순 엄청난 데시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당장에라도 방아쇠를 당기려던 강도는 곧장 움직임을 멈추고선 주변을 빠르게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중년의 남자를 붙잡고 있던 남은 공범들의 얼굴 또한 당황한 기색이 역력.
골목가를 집어삼킬 만한 엄청난 사이렌 소리에 그들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모르는 얼굴 표정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주변을 훑어대는 그들과는 달리, 하준은 곧바로 자신의 뒤편을 쳐다봤다.
분명 폴리스가 등장할 때의 그 소리임엔 분명했지만, 골목가 끝이 아닌 바로 자신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표님!!”
고개를 돌린 그곳엔 엄청난 데시벨의 사이렌 소리를 내고 있는 다섯 개의 휴대폰 액정 화면이 불빛을 내고 있었고, 하준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진짜 폴리스의 등장이 아닌, 멤버들의 기지가 발휘된 순간이라는 것을.
그와 동시에 멤버들은 곧바로 하준에게로 뛰쳐나왔고, 하준도 다시 강도에게로 시선을 옮기곤 양팔을 뻗어 그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아악!!”
그러곤 엄청난 악력으로 그의 팔목을 꺾어 강도의 무릎을 바닥에 닿게 한 하준.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와 함께 쥐고 있던 총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고, 그와 함께 누군가의 발이 그것을 저 먼 곳으로 걷어차 버렸다.
“대표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준.
위험천만한 상황을 뚫고선 하준에게로 다가온 멤버들은 곧바로 하준을 도와 그를 힘으로 제압했고, 그는 고통스러운 비명 외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고.
“헤이!!”
자신들의 두목이 제압당하는 걸 보곤 두 명의 강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고, 하준의 친구들은 곧바로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레일리만이 남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중년의 남자를 일으켰고, 다행히 별다른 부상은 없는 듯 보였다.
그렇게 대략 십 초도 흐르지 않았을 시점.
골목 저 끝 쪽에서 아까와 같은 사이렌 소리가 또 한 번 들려오기 시작했고, 이번엔 ‘스마트폰의 앱’에서 나온 소리가 아닌.
진짜 경광등까지 켜며 다가오는 폴리스 차량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후.”
그들의 등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는 하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천만한 순간이었기에 여전히 심장만큼은 거센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때, 하준의 시야 앞으로 레일리와 함께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제야 그의 얼굴을 온전히 마주한 하준은 그를 바라보며 안도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로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