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서울 강남 경찰서.
사고 발생 주변 지구대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은 뒤, 하준과 그의 일행들은 이곳으로 와 늦은 새벽까지의 조사를 마쳤다.
차량 도난 및 음주 운전, 그리고 교통사고 상해 등에 대한 것들은 물론이고.
그가 룸 안에서 가했던 폭행 및 감금에 대한 내용들까지도 모두 진술을 끝낸 상황.
자연스레 조사 과정 중 그의 직업 및 지난 이력들까지도 모두 낱낱이 꺼내어질 수밖엔 없게 되었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시멘트 바닥을 이리저리 쓸고 다니던 와중, 하준과 그의 일행들이 경찰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선 오늘 건에 대한 조사부터 다 마치고 나면 말씀 주신 사건도 곧바로 조사 시작해 보도록 할게요. 흐음, 요즘도 그런 짓을 하는 놈이 있었다니, 좀 놀랍긴 하네요.”
진술 과정에서 나온 황수철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의 혐의들을 입증할 만한 여러 개의 녹취 파일과 영상 파일.
거기에 지난 몇 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쌓인 피해자가 있을 거란 말에 담당 형사 또한 조사를 진행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라 판단했다.
조금 전 하준이 건넸던 명함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우선 진행 상황들 보고 중간중간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나 추가적인 진술이 더 필요할 만한 상황이 되면 참고인으로 모실 수도 있고요. 물론, 그쪽 분도.”
담당 형사가 이슬아를 바라보며 말하자, 이슬아가 흔쾌히 고갤 끄덕였다.
“네, 언제든 괜찮으니 편하게 연락 주세요. 바로 나올게요!”
하준도 담당 형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개인적으로 추가 피해자들을 알아보고 있는 상황이라 수사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신경 좀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부탁은요 뭘.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그나저나 대표님께선 무슨 연유로 이렇게까지 하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혹시 소속 연예인 분들 중에 피해자라도……?”
이번 일에 대한 일련의 모든 과정들이 하준은 전혀 모른 채 진행됐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물론 단순 호기심 정도의 물음이긴 했지만, 그래도 과정만 놓고 본다면 꽤나 치밀하면서도 스펙터클한 전개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물음에 옆에 있던 구세희와 이슬아의 시선도 하준에게로 옮겨졌고, 하준은 잠시 짧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아뇨. 그냥 제 개인적인 일과도 연관이 있어서.”
짧게 말을 마치고는 하준이 화제를 돌렸다.
“그럼 모쪼록 수사 잘 부탁드리고,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 예.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형사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준의 일행이 주차되어진 차량에 몸을 실을 때까지 담당 형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고는 차량이 서서히 경찰서 초소를 빠져나갈 쯤이 돼서야 다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나갔다.
그때.
“김 형사님!”
그의 등 뒤쪽에서 자신을 불러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역시나 아는 얼굴이 자신을 향해 다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오, 박 기자. 이 시간까지 여기서 뭐하고 있어? 설마 밤새운 거야?”
“후우. 사회부 기자 생활이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 지긋지긋한 짓거리도 얼른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바로 조금 전까지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지 그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담배 연기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게 보이고 있었다.
꽤나 초췌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김 형사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다 때려치우면? 뭐 먹고살 길은 있고? 그래봤자 어차피 이 바운드리 안에서 계속 일하고 있을 거 아냐. 배운 게 그것뿐인데.”
“아 그래도 분야 정도는 바꿔봐야죠! 진짜 사회부 기자 이거, 정말 사람 할 짓이 못 된다고요. 허구한 날 밤새서 취재하면 뭐 합니까? 욕은 욕대로 다 처먹는데.”
불만 가득 섞인 그의 얼굴 표정에 김 형사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박 기자 정도 짬이면 이제 이런 곳에서 밤새우는 건 그만해도 되는 거 아냐? 다른 곳들 보니까 다들 수습들한테 떠넘기고 편하게들 있는 것 같던데.”
“후우, 말했잖아요. 어떻게든 이 짓거리 그만하려고 한다고. 어떻게든 큰 건 하나 잡아서 당당히 부서 발령 내달라고 하려면 어쩔 수 없죠. 얼른 연예부 쪽을 가야 이것보단 훨씬 수월하게 일할 테니까.”
“연예부? 박 기자 연예부로 가려고? 그게 가능한가?”
“불가능할 건 또 뭐 있겠어요? ‘사회부 출신 연예부 기자’, 타이틀 하난 기똥차잖아요? 한 건 제대로 터뜨려가지고는 당당히 새 출발해야죠!”
초췌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꽤나 강한 의지를 빛내오는 그의 눈빛에 김 형사도 턱을 만지며 천천히 고갤 주억거렸다.
그러다 박 기자가 논점은 이게 아니라는 듯 곧바로 화제를 돌려왔다.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까 그 사람 팔도 엔터테인먼트 대표 아니에요? 그 사람이 왜 경찰서에 와 있어요?”
박 기자의 말에 김 형사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응? 박 기자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얼굴만 보고 바로 알 정도로 그렇게나 유명한 사람이야?”
김 형사의 물음에 이번엔 박 기자가 눈동자를 더 키우며 당연한 걸 뭘 묻냐는 듯 말했다.
“당연하죠! 그쪽 바닥에선 엄청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까지! 얼마나 유명한 스타 메이컨데.”
“스타 메이커?”
전혀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는 김 형사의 얼굴 표정에 박 기자는 고개를 짧게 내젓고는 화제를 돌렸다.
“아, 암튼 그런 게 있어요. 저 사람이 여기 왜 온 건데요? 설마, 사고라도 친 거예요?”
“사고라…… 음, 뭐. 굉장히 큰 사고긴 했지?”
김 형사가 옆에 있던 커피 자판기 쪽으로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강남 한복판에서 때 아닌 추격전이 펼쳐졌으니까.”
“추, 추격전이요?”
자신이 알고 있던 팔도 대표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박 기자가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그러자 김 형사가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넣으며 씨익 웃어 보였다.
“어디 맨 입으로 취재거리를 쏙 빼가려고 해?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박 기자가 이내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김 형사의 한쪽 팔을 흔들었다.
“북대문 희귀 떡볶이 어때요? 김 형사님 거기 꺼 엄청 좋아하시잖아요! 맨날 먹어도 안 질린다고 막 그러셨던 것 같은데에?”
역시나 그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듯 김 형사가 눈동자를 살짝 빛내왔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바꾸고는 물었다.
“뭐, 고작 그걸로 퉁 치려고? 이게 얼마나 큰 사건인데 고작 떡볶이 하나로 입 싹 씻으려고 그래? 아아 됐어, 됐어. 다른 언론사에 주고 말지. 정 기자 번호가 뭐였더라?”
휴대폰을 꺼내 드는 김 형사의 모습에 박 기자가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으며 황급히 말했다.
“일주일! 일주일치 제가 쏘겠습니다! 김 형사님 야근하실 때마다 제가 즉각 즉각 배달로 쏴 드릴 테니까 저한테 넘기시죠, 형사님? 하하.”
“한 달! 한 달이면 내 한번 심사숙고해 보지.”
자신의 비루한 월급을 생각하면 분명 피눈물이 날 만한 제안이었지만 박 기자는 하는 수 없었다.
팔도의 대표와 추격전. 그 두 개의 조합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케이, 콜! 콜입니다!”
“크큭. 좋아. 요 앞 북대문 희귀 떡볶이 분점 알지? 거기 가서 한 달치 선금 걸어놔. 내가 먹고 싶을 때마다 아무 때나 시켜먹을 수 있도록. 오케이?”
“후우…… 예예, 알겠습니다. 이따 나가는 길에 다 걸어놓고 인증까지 해드릴게요. 그럼 됐죠?”
박 기자가 짧게 한숨을 내뱉고는 다시 김 형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뭔데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무척이나 궁금해 죽겠다는 듯 채근해오는 박 기자의 모습에 김 형사가 조금 전 막 나온 자판기 커피를 입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한 모금을 입으로 넘기곤 곧 입을 열었다.
“그게 말야?”
* * *
“……헐. 그, 그게 다 진짜예요?”
김 형사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난 박 기자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김 형사가 마지막 남은 커피 잔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답했다.
“그럼 다 진짜지. 내가 언제 없는 소리 지어내는 거 봤어? 그동안 나 때문에 덕 많이 봐놓곤?”
“……그거야 그렇지만.”
분명 그가 거짓 정보를 알려줄 사람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은 좀처럼 지워지지가 않고 있었다.
조금 전 들은 얘기들이 꽤나 충격적인 것은 둘째 치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들과 사건들이 꽤나 복잡하게만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팔도 대표는 황수철이란 남자를 잡기 위해 덫을 파놓은 거고, 그 인간은 거기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이건가?’
자신이 사회부 기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강남대로변에서 펼쳐진 추격전 및 일련의 사건들엔 조금도 관심이 가져지질 않고 있었다.
지금 그의 구미를 강하게 당겨오는 건, 그 일이 일어난 배경과 내막에 대한 것들 뿐.
게다가.
‘그리고, 그 남자의 녹취록에서 박성환의 이름이 여러 번이나 언급됐다는 거고?’
연예부로 옮기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이후, 줄곧 연예계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박성환의 이름을 모를 순 없었다.
게다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또한 같은 회사의 동료 기자들에게서 숱하게 들어왔었고.
팔도의 대표와 의문의 캐스팅 디렉터. 그리고 박성환까지.
전혀 매칭이 되지 않는 이 세 사람의 조합은 물론, 김 형사에게서 전해 들은 내용들로 인해 박 기자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회전을 가하고 있었다.
“뭐지, 그 눈빛? 박 기자 그런 표정 짓고 있는 거 엄청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완전히 딴 세상에 가 있는 듯한 그의 얼굴 표정에 김 형사가 짐짓 놀라며 덧붙였다.
“언제였더라…… 작년이었나? 그 지역구 국회의원 하나 파면시켜 버리겠다고 난리칠 때 그 눈빛이랑 지금 똑같은 것 같은데?”
한번 특종을 물었다 싶으면 어떠한 방해가 있어도 끝끝내 놓지 않고 물고 늘어지는 그의 성미.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있는 김 형사였기에 이번에도 역시나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눈빛으로 김 형사에게 말했다.
“김 형사님. 이번 일 제가 확실히 보답해 드릴게요! 북대문 희귀 떡볶이, 두 달 치. 아니, 드시고 싶을 때 언제든 드시게 해드릴게요!”
* * *
이틀 뒤, 이른 아침.
부스스한 눈을 겨우 떠가며 모니터 앞에 앉은 최희원은 늘 그렇듯 곧장 인터넷 창을 띄워두곤 밤새 하던 작업을 이어갔다.
오창석에게서 받은 자료들을 정리하고 자신이 그간 조사해 온 것들과 매칭 시키는 일.
며칠 내내 밤새워 가며 해왔던 작업인 만큼 이젠 거의 끝마무리를 향해가는 단계였다.
“박성환 이 개자식아. 네 이름 이렇게 부를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이거야. 후훗.”
이젠 습관이 돼 버린 그녀의 말버릇.
하지만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최희원이었다.
그런데, 그때.
“……어? 이게 뭐지?”
포털사이트에 뭔가를 검색하기 위해 인터넷 창을 연 최희원.
검색창 옆으로 띄워져 있는 여러 기사의 헤드라인들 중 유독 눈에 띄는 한 문장이 있었고, 그녀는 곧장 그것을 클릭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무척이나 팽창된 동공과 함께 그녀가 손을 더듬거리며 책상 위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입을 반쯤 벌리며 곧장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의 상대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된 톤으로 말을 내뱉었다.
“대, 대표님, 저예요! 지금 바로 기사 좀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