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컥. 슬, 슬아 누나. 이거 옷이 좀…….”
황수철이 주선한 미팅시간까지는 약 3시간 정도가 남은 시간.
이슬아의 사무실에 모인 멤버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슬아의 복장을 보곤 일순 당황한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옷이 좀? 뭐? 이상해?”
“어어어, 하지 마요!”
멤버들과는 달리 무척이나 과감한 자세로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 이슬아.
차마 쳐다보기 민망한 장면들에 멤버들은 고갤 돌리며 격하게 손을 내저었다.
“풉. 이게 뭐 어떻다고 다들 난리래? 이것도 엄청 고르고 골라서 그나마 덜 오픈된 걸로 입은 건데. 너무 호들갑들이시네!”
“이, 이게 그나마 덜 오픈된 거라고요……?”
‘그럼 아예 벗고 갈 생각이었나’라는 뒷말을 지호가 차마 뱉진 못했고, 이슬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강남 나가려면 이 정돈 원래 패션 축에도 못 끼는 거라구. 다들 얼마나 작정하고 꾸미고 오는데!”
“…….”
“게다가. 아예 대놓고 오픈된 복장으로 와줬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나도 거기에 맞춰주는 게 또 예의 아니겠어? 무슨 의도인지가 훤히 보이는데.”
훤히 보인다면서도 전혀 두려운 기색 하나 없는 이슬아의 모습에 은호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저, 슬아야. 혹시라도 너무 위험할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고 해도 돼. 너한테 피해 주면서까지 할 만한 일은 아니니까. 너도 당연히 걱정될 수밖엔 없을 거고.”
“걱정? 나 전혀 걱정 안 하는데?”
이슬아가 한껏 여유 있는 얼굴로 은호를 바라봤다.
“실은, 아까 너희 오기 전에 NTV 사장님한테 전화 왔었어. 이준이한테 연락처 받아서 연락하는 거라며. 절대 위험한 일 안 생기도록 미리 다 조치 취해놓을 거니까 전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하시던데? 오히려 이런 일 부탁하게 돼서 미안하다고.”
“사장님이? 너한테?”
“응. 그 안에서 뭘 하는지, 무슨 얘길 나누는지 다 지켜보고 있을 거니까 안심하고 미팅 가져도 된다 하시더라고.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사장님이 바로 도와주실 거라고.”
“흐음…….”
이슬아의 말에 멤버들이 저마다 눈빛들을 주고받았다.
어제 카페에서의 그녀의 모습은 분명 어떠한 계획이 있는 듯 보이긴 했지만, 자신들에겐 전혀 알려주지 않은 터라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순 없었다.
“그나저나 무슨 관계이길래 NTV 사장님까지 그렇게 발 벗고 나서서 너흴 도와주는 거야? NTV 사장님이라길래 처음에 얼마나 놀랬다고.”
“우리랑 어떤 관계라기보단 우리 대표님이랑 가까운 사이셔. 물론 대표님은 이번 일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계시지만.”
“가까운 사이? 어머, 그럼 혹시…… 애인?”
이슬아의 이번 물음엔 그 누구도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맞다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자신들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잠깐 흐르던 침묵을 깨고선 하늘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흰 그럼 그동안 뭘 하고 있으면 좋을까요? 그냥 가만히만 있기엔 불안한데…….”
하늘의 얘기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얕은 한숨들을 뱉어왔다.
자신들이 계획한 일에 자신들만 쏙 빠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꽤나 불편할 수밖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준이 입을 열어왔다.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우리도 근처에 있도록 하자. 만약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바로 도와줄 수 있어야 하니까.”
“근처? 근처면 어디?”
곧바로 꺼내오는 은호의 물음에 이준이 이슬아가 앉아 있는 자리 앞쪽을 바라봤다.
그곳엔 차키 하나가 놓여 있었다.
“슬아야, 네 차 우리가 잠깐만 빌려도 될까?”
“내, 내 차? 내 차는 뭐 하려고?”
“혹시나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도울 수 있을만한 위치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려면 아무래도 노출 되지 않는 장소가 좋을 것 같아서.”
“……아.”
이준의 말뜻을 이해하곤 이슬아가 천천히 고갤 주억거렸다.
이제 막 데뷔한 신인 그룹이라곤 해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볼 법한 인지도였기에 오픈된 장소는 멤버들에겐 곤란할 수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자신의 앞에 놓인 차 키를 잠시 바라보던 이슬아가 곧 조심스럽게 이준에게 물어왔다.
“운전은 누가 할 건데……? 이준이 네가 하는 거야?”
이슬아의 물음에 이준이 은호 쪽으로 고갤 돌렸다.
“은호가 할 거야. 우리 중에선 얘가 제일 잘하니까.”
“……뭐? 그, 그게 무슨 소린데?!”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다 봉변이라도 당한 표정으로 은호가 질겁해 왔고, 이준이 차분한 어투로 답했다.
“너 발레파킹 같은 거 많이 해봐서 외제차 운전하는 것쯤은 익숙할 거 아냐. 면허 있는 사람이라곤 나하고 너 둘뿐인데, 네가 하는 게 맞지.”
“야, 서, 서이준. 그래도 내가 어떻게 저걸……!”
이슬아가 어떤 모델을 소유하고 있는진 몰라도 차 키에 박힌 로고만으로도 은호는 차량의 가격대를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엄두가 안 날 수밖엔 없었고.
“휴우. 그래. 이왕 도와주기로 한 거 제대로 도와주지 뭐. 이은호. 너 이거 차값 얼만지 알지? 너 이거 타다 사고라도 나면 그땐 정말 감당 안 된다, 나? 그러니까 잠시라도 한눈팔지 말고 조심조심 운전해야 한다고. 알지?”
겁박인 듯 당부인 듯한 말을 남기고는 은호에게 독특한 디자인의 차 키를 건네는 이슬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차 키를 바라보며 은호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건 도와주는 게 아닌데 슬아야…….”
왠지 안쓰럽게 느껴지는 은호의 반응에 멤버들은 살짝 웃음을 지어 보였고,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잠깐 확인하곤 이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이제 슬슬 출발할 준비하자. 될 수 있으면 오늘 미팅 한번으로 다 끝내버릴 수 있으면 좋은 거잖아? 그러려면 우리도 만발의 준비를 해둬야지!”
사건을 계획한 자신들보다도 더 적극적인 이슬아의 모습에 지호가 감탄하듯 말했다.
“누나는 진짜 하나도 안 무서워요? 누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일 거 아니에요.”
“무섭긴. 그래 봤자 사람 상대하는 건데. 사업 몇 년 하다 보니까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데? 게다가, 난 진짜 배우 지망생도 아니니까 괜히 쫄 필요도 없고.”
말을 마치고는 이슬아가 팔짱을 끼곤 멤버들 얼굴 하나하나를 훑었다.
“오히려 니네가 나보다 더 쫀 것 같은데? 이거 내 일 아니고 너네 일이거든? 대표님 꼭 도와드리고 싶으면 어떻게 해서든 오늘 잘 끝내야지. 그러려면 정신들 바짝 차려야 할 거고. 무슨 말인지 알지?”
이슬아의 얘기에 멤버들도 머릿속으로 하준을 떠올리며 금세 표정을 고쳐 잡았다.
이슬아가 사무실 소등 및 퇴근 준비를 하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멤버들은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나갔다.
그러다 이슬아의 모습을 지켜보던 강준이 이준에게 물어왔다.
“사장님이 한 얘긴 뭘까요? 조치 다 취해뒀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한 거요. 형한테도 따로 얘기 안 해주셨어요?”
강준의 물음에 이준이 고갤 작게 내저었다.
“응. 다른 말은 없으셨어. 슬아도 슬아지만 우리도 절대 일 생기지 않게 무조건 조심하라는 말씀 외엔.”
“음…….”
이준은 어림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자신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건 혹여나 이 일에 깊이 개입해 자신들이 위험에 처할 만한 상황이 벌어질까 싶어 그런 게 아닐까 하며.
사무실 불을 모두 소등하며 이슬아가 입구 쪽으로 걸어오는 동안, 이준이 멤버들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일단 우린 우리가 해야 될 일에만 집중하도록 하자. 중요한 건 슬아한테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해야 하는 거고, 정확한 증거를 반드시 남겨야 하는 거니까.”
* * *
“오, 걸그룹 준비를 했었다고? 이야, 어쩐지! 이미지가 이 바닥이랑 크게 이질감이 안 느껴진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만?”
자정을 바라보는 시각.
강남 모처에 위치한 어느 한 룸 안에선 황수철과 이슬아, 그리고 영화감독 김봉식이 오디션을 대신해 미팅을 가지고 있었다.
오묘한 눈빛으로 이슬아의 외모를 훑어나가던 김봉식이 황수철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이야, 이거 우리 황 사장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대길래 대체 어느 정도길래 그러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요? 이미지만 보면 우리 영화에 딱 어울리는 페이슨데?”
“하하, 그렇지요? 제가 뭐 아무나 들이밀려고 바쁘신 감독님을 이 시간에 모셨겠습니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지!”
“흐음. 여기서 연기만 어느 정도 받쳐준다면 어디 한번 제대로 키워볼만 하겠는데요?”
“아, 그런가요?! 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김 감독님 안목이 그렇다면 무조건 믿고 가봐야죠!”
황수철과 김봉식,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이슬아는 자신의 파우치를 등 뒤쪽에서 살짝 옆으로 빼냈다.
현재 멤버들은 파우치 안에 든 휴대폰을 통해 모든 대화를 듣고, 또 녹음하고 있을 터.
가장 중요한 증거자료가 될 수 있기에 이슬아 또한 그곳으로 신경이 쏠릴 수밖엔 없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룸의 문이 열리며 웨이터 복장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와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접시들을 테이블 위로 하나씩 세팅하기 시작했다.
“흐음,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신참인가?”
웨이터의 얼굴을 가볍게 살피며 김봉식이 묻자, 남자가 꽤나 친근한 웃음과 함께 답해왔다.
“예, 사장님! 출근한지 며칠 안 됐습니다! 신참 티 내지 않도록 물심양면으로 쭉쭉 서비스 밀어드릴 테니 예쁘게 좀 봐주십시오!”
“아이고? 하하하. 신삥치고는 일 좀 할 줄 아는 놈이구만? 그래, 어디 오늘 한번 네 말에 얼마나 책임지는지 내 한번 지켜보도록 하지. 실망스러우면 다시는 내 방에 얼씬도 못 할 줄 알아. 알겠어?”
말을 내뱉고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 김봉식.
그러고는 5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웨이터에게 건넸다.
“오늘 중요한 자리니까 집중 깨지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쓰도록 해. 이건 잘하라고 주는 팁이야.”
“아이고! 감사합니다, 사장님! 하시는 일 방해받지 않도록 성심성의껏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어른들 한창 중요한 대화 중이었으니까 얼른 세팅하고 나가봐 인마.”
“옙!”
씩씩하게 답하고는 다시 세팅을 이어가는 웨이터.
기본 안주 및 주류 세팅을 끝마치고는 얼음이 든 큰 통 하나를 중앙에 올려두었다.
“얼음은 제가 중간중간 들어와서 채워드릴 테니 그대로 놔두시면 됩니다 사장님! 부르시기 전에 항상 먼저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아주 물건 하나 제대로 들어왔구만. 그래, 다 됐으면 이제 나가봐.”
“예!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90도로 몸을 숙여 인사하고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겨 나가는 웨이터.
그사이 김봉식과 황수철은 잠시 끊겼던 대화를 다시 이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이렇다 할 연기 경험이 있는 건 아니라 감독님이 좀 잘 봐주셨으면 하고요…….”
그런데, 문손잡이로 손을 뻗고는 그것을 천천히 열어나가던 웨이터가 대뜸 이슬아에게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이슬아도 시선을 느끼고는 그를 잠시 바라봤고, 그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눈빛으로 테이블 위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눈빛이 가리키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옮긴 이슬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얼음 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