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이슬아 씨만 잘 따라와준다면야, B&D는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최고 손가락 안에 드는 톱 여배우로 만들어줄 수 있죠. 이미 제 손을 거쳐간 배우만 해도 한둘이 아닌걸요?
-어머, 정말요? 제가 정말 그런 배우가 될 수 있을까요?!
-하하, 그럼요! 그저 제가 하자는 대로만 잘 따라와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배우로서의 인생은 쭈욱 탄탄대로만 달리게 될 거니까요!
-어머, 감사해요. 정말! 저한테도 이런 행운이 생기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스피커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를 주워 담으며, 구세희는 조금 전 지호에게서 들은 얘기들을 곱씹었다.
박성환이 그녀의 매니저였단 사실은 물론, 그들이 나눈 대화의 농도가 꽤나 짙게 느껴진 탓에 좀처럼 심각한 표정이 지워지질 않고 있었다.
지호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구세희는 이 바닥 세계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님께 말씀드렸더니 표정이 많이 안 좋아지시더라고요…… 그리고, 그 뒤로 계속 출근을 안 하고 계시고…….”
지호가 하준에게 전했다던 날짜와 자신이 평창동에서 하준의 차량을 마주한 날짜가 일치했다.
그렇다는 건, 자신의 부친 구명호를 만나러 왔을 당시 이미 하준은 모든 걸 알고서 찾아왔단 뜻이다.
‘그럼…….’
하준이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건 아마 박성환은 알지 못하고 있을 터.
하준이 직접 그에게 밝히지 않는 이상 결코 알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 말은 곧, 박성환은 그것과는 전혀 무관한 일로 하준을 공격해 왔던 거고, 하준은 박성환과는 완벽히 다른 마음으로 그를 상대하고 있단 뜻이기도 했다.
‘유서…….’
자신의 부친이 하준에게 건넸다는 그녀의 유서.
가사도우미에게서 전해 들은 하준의 반응을 미루어 보아, 그 유서 안엔 분명 뭔가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B&D 박성환 대표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 것일 수도 있었고.
그저 모친에 대한 충격으로 출근하지 않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구세희의 생각은, 지호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들로 인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 그럼 서로 마음도 잘 맞고, 슬아 씨도 의지가 꽤 있어 보이는 것 같으니 더 시간 끌 건 없을 것 같은데. 그렇죠?
-아, 네! 저야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 저를 끌어주시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죠. 어릴 적부터 항상 꿈꿔오던 일이기도 했으니까요!
-하하, 좋습니다. 일단 제가 메시지로도 말씀드렸듯이 조만간 크랭크인 들어갈 영화에 아주 괜찮은 배역 하나가 남아 있는 상태예요. 그쪽 감독이 원하는 이미지가 있는데 기성 배우보단 어디에도 내비치지 않은 신인을 원하고 있거든요. 슬아 씨 정도면 생 신인인 데다 나름 일반인 쪽에선 인지도도 있으니 이보다 더 금상첨화일 수가 없죠. 어때요, 한번 해보겠어요?
-어머…… 이렇게나 빨리요? 저야 너무 좋지만, 지금 제 실력으론 오디션에 절대 합격할 수 없지 않을까요……?
-하하하. 아, 내가 그런 것도 생각 안 하고 얘기 꺼냈을까 봐요? 중요한 건 이미지지 연기가 아니에요. 연기야 카메라 앞에서 감독이 잘만 다듬어주면 누구나 대충 흉내는 낼 수 있는 거니까.
-아, 그럼.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슬아 씨는 그냥 미팅만 한번 하면 됩니다. 그걸로 오디션은 대체될 거니까.
-어머, 정말요?!
‘미팅’이란 단어에 구세희와 멤버들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고, 황수철은 자신감을 표하는 듯 호탕한 웃음소릴 내왔다.
-하하, 정말이죠. 그럼. 내가 어디 배우 지망생들 상대로 사기나 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인 줄 알아요? 전 금전이나 어떤 물질적인 것도 일절 요구하지 않아요. 오로지 슬아 씨의 가능성 하나만 보고 가는 거지.
-어머…… 감사해요!
-허허, 감사는. 흐음, 보자. 아무래도 미팅은 가급적 빨리 갖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혹시 내일 시간 괜찮아요? 저녁쯤에?
-저녁요? 저녁이면 몇시쯤……?
-뭐, 딱딱한 분위기보단 가볍게 술 한잔하면서 하는 편이 좋을 테니 한 열한시나 열두시쯤?
-그, 그렇게나 늦은 시간에요? 그런 시간에도 미팅을 갖나요?
-아이고, 미팅에 정해진 시간이란 게 있겠습니까? 감독님 마음이 가장 너그러워질 시간으로 일부러 잡는 거지. 또 술이 좀 들어가야 진솔한 얘기들도 나누면서 감독님 마음이 쓰윽 풀리고 하지 않겠어요? 힘들게 오디션 준비하는 것보다야 그 편이 훨씬 나은 거죠.
-아……! 그렇구나아.
무척이나 열심히 리액션을 선보이고 있는 이슬아의 반응에 황수철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흐음, 그럼 정확한 시간과 장소 정해지면 내가 바로 연락주도록 할게요. 미팅 때 나눌 얘기들에 대해선 그때 자세히 더 얘기하는 걸로 하고.
-아, 넵! 그럼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쯤하고 일어나 볼까요?
약 30분에 걸친 대화가 끝이나고, 스피커폰을 통해 의자 밀리는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한데 섞여 들려왔다.
줄곧 긴장한 상태로 대활 듣고 있던 멤버들도 그제야 얕은 한숨들을 내뱉어왔다.
-아참, 슬아 씨?
그런데, 그때. 다시 한번 황수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은 좀 해요? 내일 미팅 자리에서 어느 정도 감독님 페이스에 맞춰서 술을 좀 마셔주면 좋을 것 같은데?
-아…… 술요? 음, 못 마시는 편은 아닌데 감독님 주량이 얼마나 되실진…….
-오, 그럼 잘됐네요. 뭐, 분위기만 대충 맞춰주면 되는 거니까.
-아, 네. 그렇게 할게요!
-음, 그리고…….
운을 띠우고는 잠시 몇 초간 말이 없던 그가 어딘가 모르게 오묘한 어투로 다시 말을 꺼내왔다.
-혹시 그…… 미팅 때 좀 오픈된 복장으로 하고 올 수 있을까요? 갑갑해 보이는 것보단 아무래도 좀 시원시원한 느낌이 훨씬 좋지 않을까 싶은데.
-시원시원한 느낌이요? 예를 들면……?
-허허, 뭐 시원시원한 게 따로 있겠습니까? 옷 장사했던 분이니 굳이 말 안 해도 잘 알 것 같은데?
황수철의 말 이후 잠깐 침묵을 지키던 이슬아가 곧 말뜻을 이해한 듯 입을 열어왔다.
-……아! 그런 시원시원함이요? 으음, 미팅에 꼭 그런 복장이 필요한 거죠?
-뭐 아무래도 감독님도 남자다 보니 그편이 훨씬 낫지 않겠어요? 슬아 씨가 당장에 연기로 배역을 따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음음…… 그건 그렇죠……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시키신 대로 준비하고 있을 테니 미팅 잡히면 연락 주세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야. 슬아 씨 성격 한번 시원시원한 걸 보니 아무래도 좋은 배우가 되겠는데? 그래요. 그럼 연락 줄게요. 조심히 들어가고.
두 사람의 마무리 인사가 들려오고, 황수철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둘쯤의 시간이 흐르고 나자, 이슬아가 긴 한숨을 내뱉어왔다.
-후우. 혹시나 휴대폰 꺼낼 일이라도 생길까 봐 조마조마했네. 녹음은 다 했지?
이슬아의 말에 이준이 스피커폰을 해제하곤 잠시 그녀와 통화를 이어갔고, 멤버들의 시선은 구세희에게로 달라붙었다.
“이제 어떡할까요……? 내일 바로 미팅 날짜가 잡혀 버렸는데.”
“그러게. 이렇게 속전속결로 일이 진행돼 버릴 줄은 몰랐는데. 슬아가 그 자리 가서도 지금처럼 연길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몇 번의 미팅이 더 있을 거란 예상은 했지만, 황수철이 요구해온 것들을 듣고 나자 멤버들은 다소 위축된듯한 모습들이었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멤버들을 향해 구세희가 말했다.
“어떡하긴.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된 증거를 잡아야지. 다신 이 바닥에 얼씬도 못하게끔 빼도 박도 못할 만한 확실한 증거를.”
“위험하진 않을까요……? 아무래도 슬아누나 혼자 보내기엔…….”
멤버들이 가장 걱정하는 바가 어떤 건진 구세희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자신 또한 그 부분만큼은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기에 이미 염두해둔 상태였고.
그들의 대화를 듣는 내내 머릿속으론 온통 하준의 생각만 가득 차있던 구세희.
멤버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와는 180도 달라진 눈빛으로 입을 열어왔다.
“걱정 마. 나한테 다 계획이 있으니까.”
* * *
다음 날 오전.
줄곧 비어 있던 팔도의 대표실이 이른 시간부터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중앙에 위치한 테이블 위로 작은 USB 하나가 올려졌다.
“후우. 진짜 목숨 걸고 빼온 겁니다. 저 이거 빼왔다는 거 박 대표 그 인간이 알면 그날로 황천길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댁들이 그 인간 꼭 집어넣어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무슨 얘긴지 알죠?”
꽤나 절실하면서도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창석의 모습에 최희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며칠 사이에 대표님에서 ‘그 인간’으로 호칭이 바뀌었네요? 십 수년을 개처럼 충성해 와 놓고?”
“충성은 무슨. 온갖 더러운 짓거리 다 버티고 버티다 보니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그렇다고 이렇게 된 마당에 그 인간하고 같이 죽을 순 없는 거 아닙니까. 일단 나라도 살고 봐야지.”
오창석이 아직 듣지 못한 답을 듣고자 하준과 최희원을 채근해 왔다.
“아, 약속할 거예요, 말 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집어넣어준다 약속을 해야 나도 두 발 쭉 뻗고 잠을 잘 거 아닙니까. 그럴 자신 없으면 이거 도로 가져가고요.”
말을 내뱉고는 오창석이 USB로 손을 뻗으려 하자, 최희원이 그보다 한발 앞서 잽싸게 USB를 낚아챘다.
“그거야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를 봐야 결정할 수 있죠! 치명적이면서도 결정적이고, 또 빼도 박도 못할 만한 확실한 자료면 당연히 문제없지 않겠어요?”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어요. 그 안에 박성환 대표의 온갖 부도덕한 것들이 다 들어 있으니까. 물론 불법적인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오호, 자신감 넘치는데요? 그럼 한껏 기대감을 갖고 검토해보도록 하죠!”
최희원의 말에 오창석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튼, 이걸로 난 볼일 다 끝난 겁니다? 또 한 번 같은 걸로 협박해 오면 그땐 나도 이판사판이에요. 이 바닥 완전 뜰 각오하고 다 같이 죽자고 달려들 거니까 이제 다신 나 찾지 말라 이 말입니다. 알겠어요?”
“참나. 무슨 대사가 이렇게나 쓸데없이 비장하대? 알겠으니까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니지나 마요. 그럼 말짱 도루묵돼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내가 미쳤습니까? 이런 얘길 아무데나 떠벌리고 다니게. 암튼 꼭 집어넣어주세요. 새로운 소식 있으면 나한테도 꼭 알려주고. 그럼 갑니다.”
오창석이 대표실을 빠져나가자, 최희원이 어이없다는 듯 나간 문을 바라봤다.
“참나. 다시는 찾지 말래놓고 새로운 소식 알려달라는 건 뭐야? 무슨 부침개 뒤집듯 몇 초 만에 자기 말을 뒤집고 있네.”
최희원이 하준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기며 USB를 건넸다.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저 인간이 저렇게까지 큰소리칠 정도면 분명 확실한 뭐가 있긴 있는 것 같죠? 만약 그러기만 한다면 박성환 그 자식 집어넣는 건 이제 일도 아닐 텐데!”
그간 벼르고 벼뤄왔던 울분의 복수를 이제야 제대로 하게 됐다는 듯 최희원이 통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하준이 USB를 다시 테이블 위로 올려두며 말했다.
“이것만으론 결과를 장담할 수 없어요. 경찰과 검찰의 수사, 그리고 재판까지 가는 동안 대형 로펌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분명 손을 쓸 테니까요. 그게 돈이든, 인맥이든.”
하준의 말에 최희원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반문했다.
“이렇게 확실한 자료들이 있는데도요? 제아무리 돈이 많고 빽이 많다한들 빼도 박도 못할 증거 앞에서 지가 별수 있겠어요?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그건 우리나라가 썩을 대로 썩었다는 증건데?”
이번 최희원의 말에 하준은 말없이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지 않냐는 듯.
그러자 최희원도 자신의 말에 어폐가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곧 허탈한 탄식을 뱉어왔다.
“하. 하긴…… 기자인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인데.”
최희원이 표정을 다시 고치고는 하준에게 물어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렇다고 이 자료들을 안 쓸 순 없는 거잖아요.”
“물론 쓸 겁니다. 단, 보다 확실한 걸 얹어서.”
오창석이 건네온 자료와는 별개로 이미 또 다른 것들을 준비하고 있던 하준.
박성환이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이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반드시 그것들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최희원을 바라보며 하준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부터 시작할 거고요.”
* * *
하지만, 그날 자정이 넘어간 새벽.
사건은 하준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수확은 의외의 곳에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