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사, 사장님…….”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멤버들의 얼굴 위론 당황한 기색이 크게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이준은 곧바로 휴대폰 화면 위를 터치해 지금의 목소리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지금 한창 스케줄 때문에 정신없이 바쁠 때 아냐? 이 시간에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구세희의 입장에선 의아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광경.
이제 막 데뷔해 여기저기서 출연 문의가 마구 쏟아지고 있는 것은 물론,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이 와중에 한가로이 카페에 둘러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오늘은 MBS 음방 녹화가 있는 날이기도 했고.
“게다가, 오늘 MBS 음방날이잖아. 이 시간이면 샵에 있어야 할 시간 아닌가?”
쏟아지는 구세희의 연이은 질문에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멤버들은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게…….”
지금 멤버들이 당황하고 있는 건 구세희가 NTV의 사장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하준과 무척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혹여나 지금의 상황을 하준에게 모두 전할까 싶은 두려운 마음 때문이었다.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멤버들의 모습에, 구세희 의아함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흐음. 분위기를 보아하니 뭔가 수상한 짓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매니저도 없는 걸 보면 하준이는 이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고 말야.”
말을 내뱉고는 구세희가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다소 과장된 모양새로 홍채 인식하는 모습을 선보이며 말했다.
“뭐, 너희가 계속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는다면 나도 하는 수 없지. 하준이한테 너희 여기 있으니까 얼른 데려가라고 얘기하는 수밖엔.”
“아, 안 돼요. 사장님!”
당장에라도 전화를 걸 것만 같은 태세에 지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무척이나 간절한 얼굴 표정으로 구세희를 바라봤다.
“저희 대표님한테만은 얘기하지 말아주세요오…… 대표님 모르게 나온 거라…….”
역시나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과 함께 구세희가 다른 멤버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호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들이었고, 구세희는 휴대폰을 가방에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어디 한번 솔직히 얘기해봐. 대체 이 시간에, 왜 여기에 모여 있는 건지.”
말을 마치고는 멤버들이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구세희.
그러고는 자리에 앉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왜 니네 대표님한테 비밀로 해야 하는 건지.”
* * *
잠시 후, 멤버들에게서 얘길 전해 들은 구세희의 표정은 꽤나 심각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하준이가 며칠째 회사를 안 나오고 있고 너희는 대표님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이러고 있었다 이거야? 그 캐스팅 디렉터를 잡으려고?”
“……네.”
다소 황당하면서도 위험해 보이는 이 다섯 아이들의 계획.
그러나, 지금 구세희의 얼굴 표정이 심각해져 있는 건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바로 하준이 며칠째 회사를 나오고 있지 않다는 것 때문이었고, 그러한 연유에 대해 분명히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충격이 많이 컸겠지. 나도 아직 믿기지가 않는데.’
평창동 가사도우미로부터 전해 들은 하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들.
자신이 모르고 있던 사실뿐 아니라, 20년간 알고 지내왔던 사실이 완전히 뒤집어지자 구세희 또한 큰 충격에 휩싸일 수밖엔 없었다.
자신도 이러한대, 당사자인 하준은 어땠을까.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고는 해도 감히 그 마음을 함부로 헤아릴 순 없었기에, 어떠한 위로의 말도 전할 수 없었던 지난 며칠간이었다.
구세희의 심각한 표정 사이로 이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왔다.
“제가 하자고 그랬어요. 그렇지 않아도 저희 일 때문에 많이 정신없으신 것 같은데 뭐라도 도움이 돼드리고 싶어서. 다른 애들은 제가 리더니까 제 뜻대로 따라온 거고요.”
구세희가 안 이상, 하준의 귀에 들어갈 건 당연하다고 여겼는지 이준이 모든 책임을 떠안으려는 듯한 멘트를 뱉어왔고, 구세희가 곧바로 물었다.
“하준이가 왜 그 캐스팅 디렉터를 찾으려고 하는지는 모르고?”
“네…… 그건 저희도 잘. 근데 여기저기 사기 치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아무래도 좋은 쪽은 아닐 것 같아서요.”
“흐음.”
하준이 찾고 있다는 정체 모를 캐스팅 디렉터. 그가 누군지, 그리고 왜 찾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동시에 구세희의 머릿속엔 또 하나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박성환은 대체 왜 하준을 공격해오는 걸까.
그리고 지금, 하준이 출근하지 않는 이유와 그가 어떠한 관련이라도 있는 걸까.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던 하준에 대한 최근 여러 가지 일들에 구세희의 얼굴빛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가뜩이나 엄청 힘들어하고 있을 텐데. 이런 일까지 생겨 버렸으니.’
그 누구보다 하준을 가장 생각하고 걱정하는 그녀였기에 현재 하준의 상황과 심정을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올 수밖엔 없었다.
잠시간 흐르던 침묵을 깨고선, 머릿속으로 생각을 끝마친 구세희가 입을 열어왔다.
“너희 이거 엄청 간 큰 행동인 건 알고 있지? 그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오히려 너희 대표님한테 더 악영향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너희한테 문제가 생기면 그건 완전 다른 문제가 되는 거니까. 너희 대표님한텐.”
“……네, 죄송합니다.”
“휴우.”
길게 한숨을 한번 내뱉고는 구세희가 표정을 바꿔왔다.
“원래라면 무조건 하지 못하게 해야 정상이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특별히 눈감아주도록 할게. 어쨌든 나쁜 일을 하려는 건 아니니까.”
자신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구세희의 말에 멤버들이 일순 눈동자를 키워왔다.
“단. 나도 같이 동참해야겠어. 나쁜 일이 아니라곤 해도 분명 위험한 일인 건 맞으니까 혹시나 모를 상황도 생각해야지. 내가 너희 보호자로서 같이 움직일게.”
“보, 보호자요?”
“왜, 싫어? 그럼 하준이한테 얘기할까?”
다시 휴대폰을 꺼내 흔들어 보이는 구세희에게 멤버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하게 고갤 내저었다.
“아,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럼 오케이한 거다? 이번 일 끝날 때까지는 무조건 나와 같이 하는 걸로?”
재차 물어오는 구세희의 물음에 모두가 일제히 고갤 끄덕였고, 이내 구세희가 스피커폰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걸로 듣고 있었던 거지? 좋아, 그럼 바로 시작해 보자.”
* * *
-사업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행여 적자라도 날까 싶어 허구한 날 노심초사하며 살아야 하고. 게다가, 그렇게 흑자가 난다 한들 그게 뭐 얼마나 되겠습니까? 것보다야 여배우로 제대로 자리 잡아서 보란 듯 성공한 인생 한번 살아봐야죠! 인지도만 좀 쌓이면 억대 개런티 그거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어머, 정말요? 근데 제가 정말 그런 여배우가 될 수 있을까요? 워낙 예쁘고 연기 잘하는 분들이 많아서.
-하하,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 얘기네요. 이 바닥 어디 그런 것들로만 뜰 수 있는 줄 알아요? 아무리 예쁘고 연기 잘한다고 한들 인맥이 없으면 자리 잡기 힘들죠. 이것도 다 네트워킹이 돼야 좋은 배역도 쉽게 쉽게 따내고 한다 이 말입니다.
-어머, 그렇구나! 그건 또 전~혀 모르고 있었던 얘기네요? 와, 신기하다!
-하하, 그렇죠? 그러니 저를 만난 건 슬아 씨한텐 아주 행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도 될 겁니다. 제가 바로 말씀드린 그 네트워킹의 ‘그 자체’니까요. 하하.
-어머! 어머, 어머……!
스피커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이슬아와 황수철 간의 대화.
보통의 배우 지망생이라면 허파에 잔뜩 바람이 들 만한 이야기들만 계속 늘어놓는 황수철이었고, 이슬아는 이보다 더 좋은 리액션이 없을 만큼 열연을 펼치고 있었다.
-자, 일단 뭐 생태계는 그렇게 돌아간다고 알고 있음 될 것 같고. 이 바닥 일엔 관심 가져본 적 있어요? SNS 게시물에 태그 단 거 보니까 배우 지망생 어쩌고 하는 게 꽤 많던데.
-그럼요. 한때는 배우가 꿈이었어서 아카데미까지 다니면서 연기도 막 배우고 그랬는걸요? 물론 뭐, 어쩌다 보니 가수 쪽으로 잠깐 빠지긴 했지만.
-오, 그래요? 그럼 데뷔까지도 해봤고?
-아뇨, 아뇨. 연습생에서 그쳤죠 뭐. 소속사가 망해 버리는 바람에 더 이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뒤론 아예 연예계 쪽은 생각도 안 하게 됐고.
-흐음.
얕은 한숨 소리가 잠시 흘러나오는 듯싶더니, 이내 한층 더 높아진 톤의 목소리가 내뱉어졌다.
-뭐, 한번 경험해 봤다고 하니 잘 알고 있겠네요. 이 바닥에서 소속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 어떤 소속사를 만나야 실패하지 않고 쭉 승승장구할 수 있는지.
자세를 고쳐잡는지 잠깐의 부스럭 소리가 들려온 뒤에 다시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이렇게 미팅을 가진 뒤에 괜찮을 것 같다 싶은 지망생들을 어디에 연결시켜 주는지 압니까? B&D에요, B&D. B&D 알죠?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풀을 가지고 있는 자타공인 넘버원 기획사. 제가 그쪽 대표랑 아주 각별한 사이거든요. 하하.
-어머, B&D 대표님이랑요? 정말요?
-아, 그럼요. 제가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이렇게 바쁜 시간 쪼개서 나온 자리에 그런 거짓말이나 하고 있겠습니까? 이미 그쪽 배우들 중에 제가 발굴한 인재들도 꽤 됩니다. 물론 다들 잘나가고 있고요.
B&D, 그리고 박성환과 관련한 얘기가 흘러나오자 듣고 있던 구세희의 눈빛도 한층 더 진지해졌다.
-못 믿는 눈치인 것 같으니 제가 사족을 좀 깔자면, B&D 박성환 대표하고는 벌써 20년도 더 된 사이입니다. 그 친구 첫 매니저 생활 시작할 때부터 제가 여러모로 많이 도와줬거든요. 지금이야 대한민국 최고 엔터 회사의 대표지만, 그땐 연예인들 뒤치닥거리나 하는 그냥 말단 로드에 불과했거든요. 하하, 그때 참 많이 힘들어했었죠.
-어머, 정말요? 와, 그 대표님 기사로 몇 번 본 적 있었는데. 그분한테도 그런 시절이 있으셨구나!
-크큭, 그럼요. 그 당시 녀석이 처음 맡았던 배우가 이수연이라는 배우였는데, 그 배우 맡을 때까지만 해도 아주 이 바닥 세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초짜 중에 초짜에 불과했어요. 그래서 제가 아주 많은 걸 알려주기도 했고요. 하하.
그 순간, 황수철의 입에서 내뱉어진 그 이름에 구세희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그녀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것은 물론. 그녀가 바로 박성환의 첫 담당 배우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게다가.
‘혹시 그럼 지금 박 대표하고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지금 하준이 출근하지 않고 있는 연유 또한 그 일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타이밍이 무척이나 절묘하기도 했고.
그때, 지호가 낮은 목소리로 내뱉어왔다.
“제가 얘기했죠? 그때 편의점 앞에서 그 B&D 대표님이랑 이런 얘기 막 했었다고. 이것 말고도 엄청 무서운 말들 많이 했었어요, 이분이!”
지호의 얘기에 구세희의 시선이 지호에게로 옮겨졌다.
“무서운 말들을 많이 했었다고? 이 사람이 박성환 대표랑?”
“아…… 네. 제가 얼마 전에 우연찮게 두 분 대화하는 걸 들었거든요. 편의점 앞에서.”
“아니, 그것 말고. 어떤 무서운 얘기들을 했는데?”
“아, 그게…….”
갑자기 심각해진 구세희의 표정에 지호가 살짝 겁먹은 듯한 얼굴로 멤버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구세희가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지호를 채근해왔다.
“자세히 얘기해 봐. 두 사람이 어떤 얘길 나눴는지, 그리고 어떤 말들이 무서웠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