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흐음.”
김지유가 돌아가고, 연습실에 둘러 앉아 있는 멤버들.
조금 전 지호가 들려준 얘기들에 저마다 입을 닫고선 자못 진지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잠시간 흐르고 있던 침묵을 깨고선 은호가 입을 열어왔다.
“그러니까, 지호 네가 대표님한테 그 얘길 전해 드렸더니 대표님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지셨다는 거야? 그분이 이수연 배우님 매니저였단 얘기에?”
은호의 물음에 지호가 조심스럽게 고갤 끄덕였다.
“네…… 물론 제 기분 탓이었을 수도 있긴 한데, 그 얘길 들으실 때 유독 더 어두워지시는 느낌이었어요. 저한테 재차 물어보기도 하셨고.”
“흠.”
지호에게서 듣게 된 뜻밖의 얘기들.
비록 내용의 모든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중 몇몇 소식은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VCR에서 보았던 그 여배우가 B&D 박성환 대표의 첫 담당 배우였단 것은 물론.
그녀가 이미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까지.
물론, 자신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었기에 신경 쓸 이유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멤버들의 자못 진지한 얼굴은 쉽게 풀리질 않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 얘기들로 인해 하준의 얼굴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는 사실 때문에.
“뭐 때문이었을까? 그 B&D 대표님 때문인지 아니면 그 여배우님 때문인지.”
이준이 꺼내온 의문에 강준이 또 다른 가능성을 얘기해 왔다.
“꼭 누구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그분이 이수연 배우님의 매니저였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일 수도 있죠.”
“그러니까 왜?”
이번엔 은호가 곧바로 의문을 내뱉어왔고, 강준뿐 아니라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지호에게 들은 얘기만으로는 그 어떠한 추측도 떠오르지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내 말이 없던 하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왔다.
“혹시 저희 대표님이랑 그 여배우님이 예전에 아는 사이셨던 건 아닐까요……?”
“뭐?”
새로운 가설에 멤버들이 눈동자를 살짝 키워왔고, 그와 동시에 각자의 머릿속으론 하준의 나이가 떠올랐다.
가장 먼저 계산을 끝마친 지호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말을 내뱉어왔다.
“에이, 20년 전이면 대표님 나이가 몇인데. 그건 말도 안 되지. 너무 연관성이 없잖아.”
지호의 얘기에 은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갤 주억거렸다.
“그래. 그건 아닐 것 같다. 두 분의 나이 차이도 그렇고 설사 아는 사이라고 해도 그 얘기에 그런 반응이 나올 이유는 없을 테니까.”
“……그런가? 역시 그런 쪽은 아니겠죠?”
두 형의 얘기에 하늘도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려는 듯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갤 끄덕였다.
그때, 은호의 맞은편에 있던 강준이 끼어들며 말했다.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한 얘긴 아니죠. 단지 어렸을 뿐이지 그때 대표님이 세상에 없던 건 아니니까.”
멤버들의 시선이 강준에게로 달라붙었고, 강준은 말을 이어갔다.
“물론 희박한 얘기긴 하지만 하늘이 말이 아예 가능성 없는 얘긴 아니란 거예요. 그만큼 각별한 사이였고 그래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돼서 그런 거라면 충분히 그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
“흐음. 만약 강준이 네 말이 맞다면 그냥 단순히 매니저였단 얘기만 듣고도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걸까? 그냥 딱 그 얘기만으로?”
“어떤 사이냐에 따라 다르겠죠. 거기에, 대표님이 B&D 대표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따라서도 다를 수 있는 거고.”
왠지 그럴듯하게 들리는 강준의 얘기들에 멤버들의 표정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세한 정황까지는 알지 못해도 분명 하준과 박성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쯤은 이번 출연 철회 사태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조금 전 강준의 얘기들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얘기처럼 느껴지고 있었고.
당시의 대화 내용을 다시 상기시키던 지호가 천천히 고갤 끄덕여왔다.
“만약 그런 쪽이라면 그때 대표님 반응도 이해가 되는 것 같긴 해요. 잘은 몰라도 그때 편의점 앞에서 들었던 대화들이 되게 무서운 얘기들처럼 들렸거든요. 그 여배우님 관련해서도 뭐가 있는 것처럼 얘기했고…….”
멤버들도 지호가 아까 전 들려준 이야기들을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그저 자신들의 추측에 불과했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저마다의 얼굴 위론 꽤나 심각함들이 묻어나 있었다.
그때, 줄곧 말을 아끼고 있던 이준이 지호를 바라보며 물어왔다.
“지호야. 그때 박성환 대표랑 같이 얘기하고 있었다는 남자 있잖아. 혹시 그 사람 얼굴에 흉터 자국 같은 건 없었어? 눈 밑으로 칼자국 같은.”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이준의 물음에 옆에 있던 은호가 이준을 쳐다봤다.
“흉터? 흉터는 갑자기 왜?”
“아니. 그때 너희들 얘기하고 있을 때 채경 누나가 지유한테 하는 얘길 얼핏 들었거든. 그 캐스팅 디렉터라는 사람 얼굴에 흉터 같은 거 없었냐고. 그래서 혹시나 해서.”
이준의 얘기에 미간까지 구겨가며 그날 밤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지호.
한동안 집중해서 그의 얼굴을 기억해내려 애쓰던 지호가 곧 눈썹을 치켜새우며 고갤 번쩍 들어왔다.
“그, 그랬던 것 같아요! 밤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눈 밑에 그런 흉터자국 같은 게 있었던 것 같긴 해요! 그래서 인상이 꽤 무섭다 생각했었거든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던 이준은 지호의 답을 듣고 나자 한층 더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호와 김지유에게 들었던 얘기들을 종합해봤을 때 이 일련의 상황들이 결코 가볍게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준이 찾고 있는 그가 여기저기 지망생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인물이라는 점, 그가 박성환과 각별한 사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난 하준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는 것까지.
모든 스케줄이 취소된 현재의 상황 또한 B&D 대표 박성환과 관련돼있다는 걸 알기에 더욱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엔 없는 것이었다.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이준이 멤버들에게 말을 뱉어왔다.
“아무래도 대표님이 출근 안 하고 계신 게 한 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우리 일뿐 아니라 다른 일이 더 있으신 것 같은데.”
“……으음.”
이준 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일제히 고갤 주억거렸다.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알지 못 해도, 하준이 며칠째 보이지 않고 있다는 건 분명 또 다른 심각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연습실 바닥에 둘러 모여 있는 멤버들 사이로 한동안 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말은 하지 않아도 모두가 비슷한 고민들을 이어가고 있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그러다 지호가 진지해졌던 표정을 풀곤 멤버들에게 물어왔다.
“근데요 형들. 어쨌거나 대표님이 그분을 찾고 계신다는 건 좋은 쪽은 아닐 거잖아요, 그쵸? 그런 사기꾼이랑 우리 대표님이 엮일 일은 없을 거니까.”
“음…… 아마도 그렇겠지.”
은호가 동의를 표해오자 지호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가 대표님을 좀 도와 드리면 안 돼요? 그럼 대표님도 다른 일 해결하는 데 더 집중하실 수 있을 거고, 그래야 더 빨리 회사에 나오실 수도 있을 거잖아요.”
지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지호에게로 고정됐다.
“우리가? 우리가 뭘 어떻게?”
“그 사기꾼을 대신 찾아드리는 거죠. 우리 다섯이 힘을 합쳐서!”
눈동자를 키워오는 멤버들의 반응과 달리 지호는 눈에 힘까지 주며 말을 이어갔다.
“지유 누나 얘길 들어보면 분명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은데, 그럼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대표님은 지금 우리 일만으로도 정신없으실 테니까 우리가 하나라도 덜어드리면 훨씬 수월하실 거고!”
“……흠.”
지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건진 이해했지만, 다들 쉽사리 입을 떼진 못 하고 있었다.
혹여나 일이 잘못된다면 하준에게 오히려 더 큰 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은호가 이준 쪽으로 고갤 돌리며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떤데?”
친구가 아닌 리더로서의 의견을 묻는 은호의 얘기에 멤버들의 시선 또한 이준에게로 향했고, 이준은 미간 사이에 주름을 넣곤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하준을 만난 이후로 처음 찾아온 위기.
반지하방에 갇혀 빛조차 보지 못했던 자신들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하준 덕분이었다.
하준이 아니었다면 언젠간 그 생활을 버티지 못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을 테니까.
하준을 만난 이후로 모든 게 너무나도 빠르게 변했고, 지금의 상황들만으로도 자신들이 이루고자 했던 꿈은 이미 훨씬 뛰어넘은 상태였다.
그땐 그저, 데뷔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일 것 같았으니까.
“만약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만약 하준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
오로지 자신들만을 위해 마련된 이 공간에 이렇게 모여, 이런 얘길 나눌 수조차 있었을까.
“……절대 아니죠.”
굳이 묻지 않아도 이미 모두가 답을 알고 있었다.
이준이 내렸던 시선을 올리며 멤버들을 바라봤다.
“어차피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우린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언제 다시 내려가더라도 아쉬워할 필요도 없는 거고. 애초에 대표님이 다 이뤄준 것들이니까.”
고갤 천천히 끄덕이는 멤버들에게 이준이 결정을 내린 듯 말했다.
“해보자. 지호 말대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대표님 짐을 덜어드릴 수 있다면 뭐든 해봐야지. 그동안 항상 받기만 해왔으니까.”
리더이자 맏형인 이준의 결정에 멤버들의 표정도 일순 바뀌었다.
“그래! 해보자. 어차피 우리 스케줄도 다 취소돼서 당분간 딱히 할 일도 없잖아? 연습도 설 수 있는 무대가 있어야 하는 거지.”
또 다른 맏형인 은호도 이준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고, 강준도 사뭇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맞아. 이준 형 말대로 우리 항상 받기만 해왔잖아. 우리 같은 애들한테 말도 안 되는 계약 조건까지 걸어 주시고. 대표님과 회사를 위한 일이라면 못 할 것도 없지.”
강준의 얘기에 두 형들뿐 아니라 막내 라인인 지호와 하늘도 크게 고갤 끄덕였다.
그동안 하준에게 받아온 숱한 배려들은 물론. 강준의 얘기처럼 자신들이 체결한 계약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조건인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무조건 찬성이요!”
“저도요! 연습 할 때보다 수백 배는 열심히 임할게요!”
막내라인까지 만장일치를 보여오자 이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대표님한테 절대 피해가 가지 않게 하는 거야. 그리고 대표님은 절대 모르게 해야 하는 일이고. 우리가 대표님을 위해 그랬다는 걸 아시면 분명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럼요! 평생 무덤까지 비밀로!”
마치 첩보작전이라도 펼치는 듯 꽤나 비장한 표정들을 지어 보이는 멤버들.
그렇게 몇 초간 같은 표정이 유지되는 듯싶더니, 이내 하늘이 고갤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근데…… 저희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냥 그분이 어딨는지 찾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하늘의 물음에 이준이 고갤 내저었다.
“아니.”
그러고는 이미 아까 전부터 모든 계획은 세워져 있었다는 듯, 의미심장한 얼굴로 덧붙였다.
“단순히 찾기만 해선 의미가 없지.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무슨 사기를 어떻게, 또 누구한테 쳤는지 알아내는 게 중요한 거니까.”
* * *
그로부터 며칠 뒤.
팔로워 40만에 육박하는 어느 한 인플루언서에게 다이렉트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명 기획사에서 캐스팅 디렉터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조만간 크랭크인 들어가는 영화에 주요 배역 자리가 하나 남게 되어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메시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가지고 계신 이미지가 해당 배역과 싱크로율이 딱 맞아떨어져서요! 혹시 배우나 엔터 쪽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미팅을 진행해보고 싶은데, 어떠실까요? 답장 주시면 바로 연락처 전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소속도, 이름도, 연락처도 없었지만 배우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혹할 만한 내용.
팔로워 40만에 육박하는 계정의 주인은 메시지가 도착함과 동시에 그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