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대표실의 문이 열리며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하준.
그곳엔, 처음 실물을 마주하는 그가 뜻 모를 미소와 함께 하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찾아올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가 가느다란 입꼬리와 함께 입을 열어왔다.
“이게 누구십니까. 불철주야 공사가 다망하실 분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직접 와주시고. 흐음, 이거 영광인데요?”
말을 내뱉고는 하준에게 소파 빈자리를 가리키는 박성환.
하준이 걸음을 옮기자, 그도 상석으로 가 앉고는 하준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는데. 조금만 더 늦게 오셨으면 괜히 헛걸음 하실 뻔했습니다? 얼굴을 보니 꽤나 급하게 오신 것 같은데.”
눈동자를 한껏 여유롭게 굴려가며 하준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 나가는 박성환.
이 늦은 시각에 그가 어떤 용무로 자신을 찾아왔을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바였다.
이미 지상파 3사에 으름장을 놓을 당시부터 이런 그림을 예상했던 그였으니까.
‘콧대 높은 놈일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빨리 숙이고 들어오는구만. 하긴 뭐. 그럴 수밖에.’
팔도 엔터테인먼트의 유일한 아이돌 그룹, .
잘된 아이돌 그룹 하나가 회사에 얼마나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지를 생각하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윤채경이 있다고는 해도 수익적인 면에서는 전혀 비교가 안 될 바.
게다가, 이미 데뷔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결코 적지 않은 투자가 들어갔을 테니, 이 늦은 시각에 다급히 자신을 찾아온 것 또한 전혀 이해못할 바는 아니었다.
이제 막 데뷔한 신인 그룹에게 지상파 3사의 출연을 모두 막아 버린다는 건, 곧 그 회사의 모든 생계수단이 끊겨 버린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박성환이 이제 막 내온 커피잔을 입으로 옮기려던 때, 하준이 첫 입을 열어왔다.
“모든 방송국에 저희 애들 출연을 막으셨다고요. 만약 출연 시 미르엔 엔터의 모든 소속 가수들은 전원 보이콧을 선언하겠다고.”
하준의 얘기를 굳이 부정하지 않겠다는 듯 그가 커피를 목으로 넘기며 고갤 끄덕였다.
“뭐 약간 정정을 해드리자면 모든 방송국은 아닙니다. 지상파 3사 외에 다른 방송국은 여전히 출연이 가능하니까요.”
범죄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닌 그룹이 지상파 외에 종편채널만 출연이 가능하다는 건 애초에 말이 되질 않는 얘기였다.
더군다나 현재 의 상승세를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했고.
입가에 연신 미소를 머금고 있는 박성환과 달리 하준은 줄곧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대표님이 하신 행동이 엄연히 갑질에 속한다는 건 알고 계실 텐데요. 더군다나 현재 의 인지도를 고려하면 분명 사람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거고요. 그럼 결과적으로 대표님과 회사 이미지만 나빠지게 되는 건데. 그래도 괜찮으신 건지요.”
“하하하.”
하준의 얘기가 끝마침과 동시에 큰 웃음소리를 내오는 박성환.
조금 전 하준의 얘기들이 가소롭게 느껴진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수긍한다는 듯 천천히 고갤 끄덕여왔다.
“뭐, 그럴 수도 있겠죠. 대형 신인그룹의 탄생이라며 여기저기서 그 난리를 쳤는데. 바로 그 다음 주부터 모습이 없으면 그런 소리도 충분히 나올 수 있겠죠.”
박성환이 들었던 커피잔을 테이블 위로 놔두며 하준을 바라봤다.
“그런데요 대표님. 그 짐을 저 혼자만 짊어질 거라 생각하십니까? 제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라고는 해도 사람들은 방송국이 그런 결정을 내렸을 거라고 생각할 텐데요? 그렇다고 그 큰 방송사들이 저 한 사람한테 휘둘려 그랬다고는 변명하지도 못할 거고요. 그렇지 않나요?”
의문형으로 자신의 말을 끝마치며 눈썹을 으쓱해 보이는 그.
하준의 겁박 같은 건 자신에게 조금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표하는 듯한 얼굴 모양새였다.
별 다른 표정의 변화가 보이지 않고 있는 하준을 바라보며 박성환이 다시 입을 열어왔다.
“유 대표님. 유 대표님이 지금껏 쌓아온 명성도 있고, 여기저기 매스컴에서 추켜세우는 것도 있으니 자존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는 바입니다. 뭐,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
“하지만, 그것과 객기는 엄연히 다른 문제 아니겠습니까? 어쭙잖은 자존심만 내세우려다 지금껏 쌓아온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거니까요. 뭐, 저야 그런 케이스를 워낙 숱하게 봐온 사람이라.”
이해한다는 말과 함께 은은한 경고 또한 내포돼 있는 그의 말.
박성환은 줄곧 머금고 있던 미소를 천천히 거두며 하준에게 말했다.
“이번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만약 유 대표님께서 계속 같은 태도를 취하겠다고 하면 저 또한 이보다 더 큰 제재들을 가할 수밖엔 없을 거고요. 저도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더 큰 제재라면.”
“뭐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죠. 아시다시피 저한텐 미르엔 엔터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의 말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지는 하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의 겁박이 먹히지 않는 순간이 온다면, 그땐 B&D까지 가담시키겠다는 의도.
미르엔이 주는 영향은 다소 약할지 몰라도, B&D의 그것은 확실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무엇보다, 국내 최고의 배우 풀을 가지고 있는 B&D와 척지고자 하는 방송사는 그 어느 곳도 없을 거고.
담담한 얼굴로 듣고 있는 하준을 바라보며 박성환이 다시 옅은 미소를 지어왔다.
“지난번 저희 본부장이 드렸던 제안에 대해선 아직 기억하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그 자리에 맞는 책임자를 찾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만약 유 대표님이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꾼다면 저 또한 지난 일은 다 잊고 새로운 관계를 한번 맺어보고자 하는데.”
한쪽 입꼬리를 올림과 동시에 눈썹을 으쓱해보이는 박성환.
아무리 콧대 높은 그라고는 해도 이번 제안만큼은 쉽사리 거절할 수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랬다간 그땐 정말로 감당하지 못할 상황이 오고야 말 테니까.
대답을 기다리며 박성환이 커피잔으로 다시 손을 뻗던 그때.
하준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고, 하준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착신거부를 눌렀다.
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넣으려는데.
액정 화면 위로 윤채경이 보내온 메시지가 떠올랐다.
[대표님. 혹시 지유 씨한테 얘기 들었어요? 그 캐스팅 디렉터라는 사람, 황수철. 그 인간 박 대표랑 20년째 호형호제하는 사이에요. 저 B&D 있을 때 직접 마주친 적도 있었고요. 메시지 보시면 바로 전화주세요. 자세히 얘기해 드릴게요!]
윤채경의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미세하게나마 하준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러나, 큰 동요는 없이 시선을 돌리고는 휴대폰을 안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애초에 방송사 문제를 담판 짓고자 그를 찾아온 게 아니었다.
그가 어떤 성향의 인간인지 직접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다대는 박성환의 모습에 하준의 머릿속으론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어쩌면 모든 게 다 우연이 아니었을 수도.’
이상하리만큼 자꾸만 그와 엮여왔던 순간들.
첫 고리가 윤채경으로 엮인 탓에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모든 내막을 알게 된 지금.
그간의 모든 게 어쩌면 우연이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박성환에게 하준은 답이 아닌 질문을 건넸다.
“혹시 이수연이라는 배우를 아십니까.”
하준의 대답, 그중에서도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있었을 박성환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그 이름에 손이 허공에서 멈추어졌다.
“누구…… 요?”
혹시나 자신이 잘못들었나 싶어 굳은 표정으로 되묻는 박성환.
“이수연을 아냐고 물었습니다.”
재차 내뱉어지는 그녀의 이름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심각한 눈빛으로 하준을 바라봤다.
지금의 상황에서 갑자기 그 이름이 내뱉어진 것은 물론.
그가 이수연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좀처럼 납득이 되질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20년 전 제대로 된 빛조차 보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그녀였기에 더더욱.
그의 나이를 고려해 봤을 때, 결코 알 수 없는 그녀의 이름일 텐데.
하준의 물음에 박성환은 대답 대신 질문으로 그것을 상쇄했다.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 건지요.”
“아직까지 기억하고 계신가 해서요. 혹시나 20년 전 일이라고 잊으셨다면 다시 상기시켜 드려야 할 테니까.”
“……?”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하준의 분위기. 게다가, 조금 전 내뱉은 그의 말엔 무언가 분명한 의미가 내포돼 있는 듯 보였다.
하준은 박성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말을 내뱉었다.
“20년 전, 이수연 씨의 매니저로 일하셨으니 아마 모른다고 하시진 않겠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 대표님만큼은 그 이름을 절대 잊을 수 없을 테니까요.”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준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절대 잊어서도 안 되는 이름이고요.”
분명 표정없는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내뱉어지는 어투만큼은 싸늘하고도 냉담함이 느껴지는 그것.
박성환 또한 이전과는 달라진 어투로 말을 되받아왔다.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겁니까? 20년도 다 지난 사람 이름은 뭐하러 꺼내는 거고, 또 그게 지금 상황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죠? 아무래도 지금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나 본데…….”
“죗값 받게 해드리겠습니다.”
점점 격앙되어지던 박성환의 목소리는 끼어드는 하준의 말로 인해 일순간 멎어 버렸다.
굳어 버린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하준이 말을 더해갔다.
“아마 당신은 이수연 씨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생각하고 있겠죠. 지난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렇게만 알고 지내왔을 테니까. 하지만, 이수연 씨는 당신이 죽인 겁니다. 오로지 당신만을 의지하고, 믿고, 또. 당신만을 신뢰해 왔던 그녀의 믿음을 송두리째 배신해 버린 걸로요.”
“…….”
“그러니, 그 죗값 지금이라도 제가 반드시 받게 해드리겠습니다. 제 모든 걸 다 걸어서라도.”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위압감이 느껴지고 있는 그의 눈빛.
박성환은 그가 내뱉은 말들을 이해하는 것은 둘째 치고, 왜 그가 이런 말을 꺼내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죗값’이라는 단어는 결코 그가 꺼낼 말이 아니었기에.
말을 마친 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앉아 있는 박성환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
“아까 제게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한다고 하셨죠. 저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당신을 대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충분히 기대하셔도 좋을 만큼.”
강한 위압감이 담긴 말을 남기고는 입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나가는 하준.
그런 하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박성환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그에게 물어왔다.
“왜죠? 당신이 이수연이랑 대체 무슨 관계길래 지금에 와 그런 얘기들을 꺼내는 건지…….”
그 순간, 몸을 돌려오는 하준의 눈빛을 마주한 박성환은 머릿속으로 무언가 강한 충격을 느꼈다.
왠지 그의 입에서 내뱉어질 다음 말을 알 것도 같은 느낌이 든 것이었다.
그의 질문에 하준이 답을 해온 건 그것과 거의 같은 타이밍이었다.
“그런 얘길 꺼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