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평창동 구명호의 집.
거실 중앙에 위치한 소파 위로 하준과 구명호가 마주 앉아 있었고, 내온 지 10분이 지난 커피는 더 이상 김을 내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무거운 공기 속으로 하준이 입을 열어왔다.
“그 긴 시간 동안 대체 왜 저에게 숨겨오신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아요. 제가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하며 살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을 분이.”
적지 않은 원망감이 묻어나 있는 하준의 어투에 구명호의 얼굴도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져 있었다.
지난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떻게 해서든 알리지 않으려 했던 그 사실을 하준이 알게 된 것뿐 아니라.
지금의 상황에서 어떤 얘기까지 해주는 게 맞을지 좀처럼 판단이 서질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준의 얘기에 침묵을 지키던 구명호가 천천히 입술을 열어왔다.
“굳이 네가 알아서 좋을 게 없을 거라 생각했다. 어렸을 땐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크고 났을 땐 더 이상 그 사실 자체가 의미가 없을 것 같았거든.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하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구명호가 말을 이어갔다.
“정화에게 아이가 있다는 건 당시에 누구도 알지 못했던 일이었어. 나이도 어렸을 뿐더러 신인 여배우에게 자식이 있을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다 정화가 세상을 떠나게 됐고, 너의 존재를 숨기는 게 오히려 네가 앞으로를 살아가는 데 훨씬 나은 선택이라 판단했던 게지. 그러기 위해선 하준이 너에게도 함구해야만 했던 거고.”
분명 그랬을 것이다.
구명호의 말처럼 신인 여배우에게 아이가 있다는 건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을 거고, 스스로 밝혀서는 더더욱 안 될 문제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구명호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선택을 했을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쉬이 납득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그동안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는 다른 그 누구보다 구명호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 제가 먼저 알지 못했다면 언제까지고 제게 숨기실 생각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끝끝내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게 아저씨가 원하는 저의 삶이였던 거고요?”
지금껏 그의 밑에서 자라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높여본 일이 없었던 하준.
지금만큼은 격앙된 감정을 좀처럼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하준의 원망 가득한 눈빛에 구명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떴다.
“……정화도 그걸 원했을 게다. 하준이 네가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기를.”
“…….”
자신 또한 언제까지나 비밀로 할 수 없는 일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가능한 길게, 가급적 오랜 기간 숨기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게 ‘영원’이 될 순 없는 일이었기에.
더군다나 자신의 모친과 마찬가지로 하준 또한 그쪽 세계에 발을 디딘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럼에도, 구명호가 그런 선택을 자처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녀 또한 분명 그러길 바랐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녀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 당시의 상황과 정황에 대해 자신만이 유일하게 아는 이였으니까.
구명호가 하준을 바라보며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
“하준아. 네가 날 원망해도 어쩔 수 없지만 내겐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단다. 네가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어. 오히려 너만 더 힘든 삶을 살아갔을 테지.”
구명호의 말이 내뱉어질수록 하준이 느끼는 답답함의 농도는 더욱더 짙어져만 가고 있었다.
자신의 모친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대체 왜 힘들어질 만한 일인지.
그리고, 왜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던 건지.
도무지 납득되질 않는 그의 얘기들에 하준은 한숨을 섞어 반박했다.
“이미 충분히 힘든 삶을 살아왔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엄마에 대해 추억할 게 아무것도 없어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는지도요. 진작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적어도 지금보단 훨씬 나은 삶을 살았을 거예요.”
하준의 얘기에 시선을 옮겨 정면을 바라보는 구명호.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확신이 담긴 어투로 낮게 말했다.
“그렇지 않을 거다. 그렇지 않았을 거야.”
할 수 있다면 언제까지고 숨기려 했던 그 얘기.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된다 해도 하준만큼은 끝끝내 모르길 바랐던 그것.
그럼에도 구명호는 언젠간 이런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온다면 하준에게 어떤 얘기까지 해주는 게 맞을지 항상 고민해 왔었고.
만약 ‘그날’의 일을 하준이 모두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깊은 고민을 이어가던 구명호.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하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준아, 네가 모든 진실을 알았더라면 결코 지금과 같은 삶을 살아오진 못 했을 거야. 하루하루가 괴롭고, 힘들고, 또. 매일매일을 누군갈 원망하는 마음으로 살아갔겠지. 나는 네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게 곧 네 엄마의 뜻이었을 테니까.”
말을 마치고는 무언가 깊은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하준과 눈을 마주하는 구명호.
또 한 번의 짧은 침묵이 지나가고, 느리고도 긴 호흡과 함께 다시 입을 열어왔다.
“그래도 네가 정 알고자 한다면 이젠 얘기해 주도록 하마. 그게 정말로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어딘가 모를 의미심장함이 느껴지고 있는 구명호의 얘기에 하준 또한 순간 긴장으로 바뀌었다.
분명 자신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 뉘앙스처럼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얼굴 위로 드러나 있는 강한 위압감은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끼게 만들었고.
구명호를 바라보던 하준이 잠시 후 짧게 고갤 끄덕였다.
“얘기해 주세요.”
* * *
구명호의 얘길 모두 듣고난 하준의 얼굴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분명 무슨 말이라도 내뱉어야 했음에도 하준의 입은 좀처럼 움직이지가 않았다.
그저 강한 신음이 간간이 새어 나오는 것 외에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들에 하준이 겨우 목소리를 내며 구명호에게 물었다.
“그,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니라…….”
조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아니 생각할 수도 없었던 그 얘기에 하준은 자신의 말을 차마 이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모친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고 있었다.
거칠게 흔들리는 하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구명호가 대신 말을 이어갔다.
“내가 정화를 발견했을 땐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였단다. 아무것도 손 쓸 수가 없는 상태였어.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였다면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 했었을 텐데…….”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구명호의 얼굴 위론 적지 않은 괴로움이 느껴지고 있었고, 하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곧바로 물어왔다.
“제 기억 속 엄마는 늘 밝은 모습뿐이셨어요. 절대 그런 선택을 하실 만한 분이 아니었다고요. 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씀 좀 해주세요.”
절망감, 그리고 황망함이 뒤섞인 하준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구명호.
뭔가를 깊이 고민하다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자신의 서재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나갔다.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가 앉았던 자리로 돌아오며 쥐고 있던 낡은 종이 하나를 하준에게 건네왔다.
“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란다. 그 안엔 하준이 너에게 남기는 말도 적혀 있지. 비록 너무 늦게 전달하게 돼버리긴 했지만.”
구명호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드는 하준의 손은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이 안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지에 대한 생각들과 함께, 이것의 존재 자체가 구명호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종이를 펼치지 못 하고 있던 하준은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쳐 나갔다.
그리고, 그것의 첫 문장을 읽어 나가려던 때.
구명호가 하준을 불러오며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하준아.”
하준이 고갤 올려 바라보자, 구명호가 낮은 음성으로 한마디를 내뱉어왔다.
“부디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구명호의 얘기에 다시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보는 하준.
대체 이 안엔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 걸까.
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길래 구명호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건네오는 걸까.
왠지 단순한 유서일 것만 같진 않단 생각과 함께 하준은 그것의 첫 문장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 *
수 분이 지나고, 유서의 마지막 문장까지 모두 다 읽어 내린 하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나오는 분노는 물론, 이제야 구명호가 자신에게 왜 그런 말을 해온 건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모친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간접적인 얘기들이 적혀 있던 유서의 내용.
하준은 그 문장들만으로도 당시 어떠한 정황이 있었을지 충분히 예측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단 한 명의 인물밖엔 머릿속에 떠오르지가 않았다.
분노의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하준이 구명호에게 물었다.
“엄마가 그렇게 됐다는 거, 이 사람들은 알고 있나요?”
하준이 물음에 유서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구명호가 짧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사고로 떠난 걸로 알고 있을 게야. 네가 여태 그렇게 알고 지냈듯 그들도 그렇게 알길 바랐으니까.”
“……그럼 아저씨가 일부러.”
하준의 머릿속으로 20년 전의 기억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엄마의 죽음 이후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빨리 정리되는 듯했던 느낌들.
또한, 엄마를 추억할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까지.
무언의 긍정을 말하는 듯한 구명호의 표정에 하준은 이제야 그 모든 것들의 이해되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향해 시선을 보내오는 하준에 구명호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정화의 삶만큼이나 하준이 네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도 내겐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그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말을 마친 구명호가 이번엔 한층 달라진 톤으로 다시 말을 이어왔다.
“그러니 너도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면 돼.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어디까지나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란 건 하준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도, 그 죽음에 대한 분노를 있는 힘껏 눌러야만 했었을 구명호.
오로지 이 넓은 세상에 홀로 남게 된 어린 자신만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이 유서의 내용을 모두 확인한 이상 이미 하준은 그와 같은 길을 갈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걸 알고도 모른 척 살아간다는 건 자신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생이었으니까.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구명호와 시선을 마주하는 하준.
곧이어 어떠한 감정도 섞이지 않는 냉담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아뇨. 전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러기엔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