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모두가 숙소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그 시각.
하준은 최윤섭을 만나기 위해 어느 한 술집에 들어섰다.
그가 알려준 룸으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 있던 최윤섭이 하준을 반겨왔다.
“아이고, 유 대표님 오셨습니까. 하하, 이거 꽤 오랜만에 뵙는 느낌이죠?”
자신이 오기 전 이미 꽤 마신 듯, 그의 앞에 놓인 양주병이 3분의 1가량을 비우고 있었다.
테이블에서 시선을 거둔 하준이 맞은편에 앉으며 최윤섭의 얼굴을 훑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야위어지신 것 같은데. 혹시 그간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을까요?”
“아, 일은 무슨요. 그냥 매일 취재에 야근에 온갖 인터뷰의 연속인걸요. 하하, 너무 똑같은 일상이라 아주 지겨울 지경입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도, 하준은 그 모습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지난 며칠간 전혀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던 그였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윤섭이 하준의 잔을 채우며 말을 꺼내왔다.
“요 며칠 하도 정신이 없는 바람에 대표님께 연락도 못 드렸네요. 부재중 온 거 보고 이따 드려야지, 드려야지 하면서도 또 금세 까먹어 버리고. 허허, 아직 40대도 안 됐는데 벌써 건망증이 심해져서 큰일입니다?”
“바쁘면 그러실 수도 있는 거죠. 괜찮으니 게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허허, 이해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자, 그럼 한잔하실까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잔을 들어 올리는 최윤섭에 하준도 고갤 끄덕이고는 자신의 잔을 비웠다.
비워진 하준의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최윤섭이 물어왔다.
“그나저나 어떤 일 때문에 연락을 주셨던 걸까요? 대표님이 이렇게 먼저 연락 주시는 경우는 잘 없었던 것 같은데.”
“아.”
애초에 하준이 최윤섭을 만나고자 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번 김민정 기사와 관련된 일련의 정황들을 살피고, 추가보도만큼은 없게끔 그에게 부탁하는 것.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지난 며칠간 계속해서 연락을 취했던 거였고.
하지만, 녹화 때 흘러나온 VCR 영상을 본 이후, 하준에겐 한 가지 목적이 더 추가됐다.
최윤섭이라면, 어쩌면 그녀에 대한 아주 사소한 정보라도 알 수도 있었기에.
들었던 잔을 테이블로 내려놓으며 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 전 여배우 스폰 의혹 관련해서 기자님께서 기사 하나를 쓰셨던데. 우선 그것과 관련해서 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하준의 얘기에 자신의 잔을 채우고 있던 최윤섭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지난 며칠간 어떻게든 떨치고 떨치려 했던 그것을 하준이 다시 상기시켜왔기 때문이었다.
잠시 멈추었던 움직임을 다시 이어가며 최윤섭이 물었다.
“아, 그거요. 흠, 대표님이 거기에 대해 어떤 게 궁금하신 걸까요.”
하준과 눈을 마주하는 최윤섭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다.
죄책감과 자괴감, 그리고 온갖 괴로운 감정들로 인해 그간 하준의 연락을 일부러 피해왔던 최윤섭.
다른 사람도 아닌 하준이 그 얘길 꺼내오자 왠지 모를 긴장감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취재원에 대한 보호가 이루어져야 할 테니 직접 출처를 밝히실 순 없겠지만, 정확한 사실 여부가 확인된 기사인지 여쭙고 싶어서요. 제가 알고 있는 내용과 약간은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다른 부분이라면.”
최윤섭의 자못 심각해진 표정에 하준이 잠시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아, 오해는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자님께서 일부러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그런 기사를 내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다만.”
잠시 말을 멈춘 하준이 머릿속으로 김민정을 떠올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 기사의 여배우가 저와는 꽤 가까운 사이라, 기사의 내용이 실제와 다른 부분이 많단 얘길 하더라고요.”
하준의 얘기에 어두웠던 최윤섭의 얼굴이 일순간 눈에 띄게 굳어졌다.
“대표님과 가까운 사이라고요……? 어떻게 가까운 사이이신지.”
“아, 저희 팔도의 새 소속 배우입니다. 물론 기자님께선 직접 기사를 쓰셨으니 그게 누군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아실 거고요.”
“……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에 최윤섭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자신이 기자의 윤리 강령까지 어겨가며 악의적으로 써 내린 기사의 주인공이 하준의 소속 배우였다니.
분명, 분명 어떠한 피해도 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에 대한 충분한 사전 조사까지 끝마친 상태로 기사를 써 내려갔던 건데.
대체 언제부터.
“물론 기사가 나왔을 당시엔 계약서를 쓰기 전이었지만, 그래도 이젠 저희 소속 배우가 된 이상 그냥 넘길 수만은 없는 일인 것 같아서 이렇게 직접 기자님을 만나 얘길 나눠보는 게 좋겠다 싶더라고요. 평소 기자님이 어떤 분인지는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
‘잘 알고 있다’는 하준의 말에 최윤섭의 마음은 더욱더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한 일이 결코 떳떳하지 못한 일이었다는 건 누구보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있는 최윤섭을 바라보며 하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우선 기사의 내용처럼 그분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뻔했던 건 사실이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제안을 받은 뒤엔 단칼에 거절하고 그 뒤로 연락을 끊었으니까요. 이미 몇 년 전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요.”
물론 최윤섭 또한 어느 정도는 추측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제보를 받은 기사의 주인공이 김민정이라는 걸 안 이상, 그런 일이 벌어졌을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추론할 수 있었으니까.
만약 그 제보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민정은 이미 수년 전에 주연 자리를 꿰차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최 기자님께서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그런 기사를 쓰셨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게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다른 이유들이 있으셨겠죠. 그렇기에 저도 정정 기사를 내보내주시길 바라는 건 아니고요.”
하준은 침착한 음성을 유지하며 계속 이어나갔다.
“다만 그것과 관련한 추가보 도는 없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제 말이 믿기 힘드시다면 당사자에게 직접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진실을 아시고 나면 기자님께서도 그렇게 하진 않으실 테니까요.”
애초에 추가 보도까지는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던 최윤섭이었다.
그저 화제를 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일이기도 했고, 같은 피해자에게 두 번의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행여나 ‘그들’이 또 한 번 같은 걸 요구해 온다고 해도 말이다.
굳어 있던 표정을 간신히 풀고는 최윤섭이 입을 열어왔다.
“아, 이거 아무래도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네요. 대표님 소속 배우인 줄도 모르고 그저 제보받은 내용만 믿고선 그런 기사를 써내다니.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대표님.”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저와는 계약하기 전 일이라 제가 기자님을 원망할 이유는 없죠. 다만, 추가 보도만 없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표님이 없는 얘길 하실 분은 아니니 당연히 그래야죠. 후우, 일전에 박 대표 일을 겪고도 제가 또 그런 실수를 하다니. 참, 아직도 한참 멀었나봅니다.”
표정을 애써 유지하며 겨우 말을 지어내고 있는 최윤섭.
지난 며칠간 자신을 괴롭혀왔던 감정들이 하준의 조금 전 얘기들로 인해 더욱더 크게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닙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한 잔 드시죠.”
하준이 들어 올리는 잔에 최윤섭도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하준이 다시 입을 열어왔다.
“그리고 기자님. 이것과 별개로 혹시 뭐 하나만 더 여쭐 수 있을까 하는데.”
“예, 그럼요. 편하게 물어보세요, 대표님.”
하준은 VCR 영상 속의 이수연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혹시, 이수연이라는 배우를 아십니까?”
“이수연이요?”
하준의 물음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기억을 헤집는 최윤섭.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꺾으며 답해왔다.
“흠, 글쎄요. 저도 연예부 기자 생활만 12년짼데 그 이름은 바로 떠올려지지가 않네요. 혹시 신인 배우일까요?”
“아뇨. 저도 정확한 데뷔 년도까지는 모르지만 최소 20년 전에 활동했던 배우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그녀의 이름을 입력해 보았던 하준.
하지만, 마치 누가 일부러 없애기라도 한 듯 그 어떠한 사소한 흔적조차 남아 있지가 않았었다.
분명 한 영화의 주연까지 맡았을 정도면 아주 작은 정보라도 남아 있기 마련일 텐데.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그것들에 하준의 머릿속은 더더욱 복잡함이 짙어질 수밖엔 없었다.
“흠, 20년 전이라. 그럼 제가 중고등학생일 땐데, 그때면 저도 한창 연예계에 관심이 많던 시기라 분명 떠올려질 법도 할 텐데요.”
쉽게 떠올려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계속해서 기억을 헤집어가는 최윤섭.
하준은 최윤섭이 아주 작은 거라도 떠올려주길 바라며 그의 입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최윤섭을 바라보던 하준의 시야 앞으로 일순간 노이즈가 끼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지금껏 겪어오던 미래 예지와는 달리 주변이 어두워지지도, 시야가 뒤집어지지도 않는 현상에 하준은 마른침이 삼켜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갑자기 나타난 노이즈는 최윤섭의 얼굴을 덮으며 점점 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이수연이라…… 이수연…….”
역시나 귓바퀴로 흘러들어오는 소리 또한 전혀 뭉개짐이 없는 게 미래 예지와는 확연히 다른 그것.
그때, 최윤섭의 얼굴 위로 떠 있던 노이즈 속으로 홀로그램처럼 어떠한 장면 하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매번 하준의 꿈속으로 악몽처럼 찾아오던 그들이었고, 이전 장면들과도 전혀 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 듯싶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 순간, 그것도 최윤섭의 얼굴 위로 갑작스레 나타난 건지 하준이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때.
갑자기 답답했던 눈앞의 장면 하나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지금껏 붉은색 입술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있었던 그녀의 얼굴이었고.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나는 그 순간, 하준의 입에선 소리 없는 강한 탄식이 내뱉어졌다.
“이수연이라…… 어딘가 분명 낯이 익은 이름인 것 같기는 한데…….”
최윤섭의 중얼거림 속으로 완벽히 얼굴을 드러내는 붉은색 립스틱의 그녀.
그녀는 바로, 이수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