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윤채경의 머릿속으로 몇 년 전의 기억이 스쳐 갔다.
수 년 전, 박성환과 함께 편의점 앞에서 캔맥주를 마시고 있던 남자.
박성환의 성격상 결코 그런 가벼운 자리에서 술자리를 가지는 법이 없었던 터라 의아할 수밖엔 없었고, 윤채경은 이후 박성환에게 물었었다.
무슨 사이이길래 가라오케도, 와인바도 아닌 편의점 앞에서 그렇게 편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냐고.
‘나랑은 벌써 20년째지. 내가 이 바닥 생활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알고 지내던 형님이니까.’
돌아온 박성환의 대답을 듣고는 대표님한테도 그런 사이가 있냐며, 별일이 다 있다고 코웃음 치고는 말았던 윤채경.
문득 지금 이 순간, 그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윤채경이 김지유에게 물었다.
“혹시 그 캐스팅 디렉터라는 사람, 생김새라든지 그 밖에 다른 거 더 들은 건 없었어요?”
하준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물어오는 윤채경의 모습에 김지유가 살짝 입술을 달싹였다.
“아, 그게…….”
그러고는 몇 초간의 틈을 두더니 다시 천천히 입술을 떼왔다.
“사실 낮에 대표님이 물으셨을 때 얘기 못 드린 게 하나 있긴 했어요. 워낙 갑자기 물어보시기도 했고 저도 사소한 거라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어서…….”
“그게 뭐였는데요?”
“그게…… 얼굴에 흉터자 국이 있다고 했었어요. 눈 밑으로 칼자국처럼 살짝 줄이 좀 그어져 있는데 처음 봤을 땐 좀 무서웠다면서. 저도 손님 머리 말려드리면서 친구분이랑 대화하는 걸 엿들은 거라 아까는 바로 생각이 안 나더라구요. 딱히 중요한 것 같지도 않아서 대표님께 다시 말씀드리진 않았구요…….”
김지유의 말이 끝마쳐진 그 순간, 윤채경의 표정은 또 한 번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눈 밑 흉터.
수 년 전 자신이 봤던 그의 생김새와 정확히 일치하는 그것이었고.
그건 결코 아무에게서나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상처는 아니었기에.
‘황수철.’
처음 김민정에게서 그의 이름을 들었을 당시엔 전혀 떠올리지 못했던 그의 존재.
애초에 이번 일과 박성환을 연관 짓는 것 자체가 무리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설마 그럼 박 대표가…….’
하지만, 그와 박성환이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이번 일에 박성환이 연관돼 있다고 단정 짓긴 어려웠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는 박성환은 이런 조잡한 짓까지 벌일 인물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럼 그 편의점 앞에서 봤던 남자가 민정일…….’
황수철.
이제와 그를 찾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어쩌면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 * *
그 시각, 지호는 즉석밥과 음료수를 사기 위해 편의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혹시나 누가 알아볼까 싶어 급하게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온 지호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육즙 가득한 한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걸음걸이가 빨랐다.
“후후, 얼른 사서 갈 때는 뛰어야지.”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내뱉고는 편의점 문을 잡아당기는 지호.
그런데, 웬일인지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질 않고 있었고, 혹시 폐문을 잡은 건가 싶어 그 옆의 문도 잡아당겨봤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뭐야……?”
분명 불이 켜져 있음에도 문이 열리지 않자, 지호는 안쪽을 두리번거리며 아르바이트생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훑어도 보이지 않는 알바생.
그때, 지호의 눈앞으로 어떤 글귀가 적힌 팻말 하나가 들어왔다.
[잠시 화장실을 위해 자리를 비웠습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아오, 이런.”
가뜩이나 마음이 조급한 상황에서 언제 올지 모를 알바생을 마냥 기다리고 있어야 할 처지가 되자, 지호는 초조함이 한층 더 높아졌다.
하지만, 여기서 다른 편의점으로 옮겨가기엔 애매한 상황.
거리도 멀 뿐더러, 왠지 자릴 뜨자마자 알바생이 올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흠, 하는 수 없지 뭐.”
그냥 기다리는 쪽이 낫겠다 싶어 휴대폰을 꺼내 포털 사이트의 검색창을 여는 지호.
기다리는 동안 녹화 때 VCR에서 보았던 영화의 정보나 찾아보기로 했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짙은 잔상이 길게 남아 있던 이유였다.
무엇보다, VCR로 보았던 짧은 영상 속 여주인공의 모습은 그 찰나의 순간에도 무척이나 설레게 하기도 했고.
“제목이 <눈 위에 핀 꽃>이었지?”
제목을 입력하고 결괏값이 나오자, 지호는 곧바로 출연자 정보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어, 뭐야. 영화 속 이름이랑 같으셨네?”
이수연 역의 이수연이라고 적힌 글귀를 보자 지호는 신기하다는 듯 살짝 눈동자를 키워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확인하기 위해 곧바로 그녀의 이름 위를 터치했다.
그런데.
“어……?”
웬일인지 당연히 있어야 할 그녀의 프로필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녀와 관련된 어떠한 게시글조차 보이질 않고 있었다.
“뭐지. 은퇴하신 건가?”
물론 20년도 더 지난 영화였기에 충분히 그럴 수는 있는 일.
하지만, 그 어떠한 게시글조차 없다는 건 다소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한 작품의 주연을 맡았던 배우라면 사소한 거라도 있게 마련일 텐데.
“흠.”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꽤나 궁금했던 터라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엔 없는 지호.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스크롤을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호의 귓바퀴로 낯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크흡. 수연이 걔가 참 아깝긴 아까운 애였지. 지금까지 배우 활동하고 있었으면 분명 뭘 해도 했을 앤데 말야. 안 그래?”
“지나간 애 얘긴 뭐 하러 합니까.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 지났으니까 하는 얘기지. 그래도 너 이 자리까지 오는 데에 걔가 큰 몫을 한 건 사실이잖아? 네가 매니저 생활 시작하면서 처음 맡은 애가 걔니까.”
그와 동시에, 지호의 시선이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중년 남성에게로 옮겨졌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나오는 이름과 단어들이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20년이라는 숫자와 그 이름이 동시에 내뱉어진 것부터가 가장 그러했고.
“크큭. 네가 그때 수연이 걜 안 맡고 대충 어쭙잖은 애나 맡았으면 그렇게 빨리 올라갈 수 있었겠어? 걔가 그래도 여기저기서 관심을 많이 받으니까 너도 이쪽 세계에 대해 더 빨리 눈을 뜰 수 있었던 거지. 안 그랬음 너 다른 애들처럼 뺑이만 죽어라 치다 결국 이 바닥 뜨고 말았을 텐데.”
“흐음.”
“큭. 역시 내 말이 맞으니까 너도 부정은 못 하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는 내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야, 인마. 내가 바로 산 증인이라고.”
그들의 대화를 먼발치서 주워 담고 있던 지호는 어딘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맞은편 남자의 얘길 듣고 있는 그의 얼굴이 왠지 낯익게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더라. 분명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그러는 동안에도 그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꺼내봐야 피차 서로 좋을 거 하나 없는 얘긴 뭣하러 하고 그럽니까. 이미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애를.”
“아,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해본 얘기지. 아무리 20년이 지났다고 한들 너한텐 절대 잊지 못할 이름일 거 아냐. 안 그래?”
“……거,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그만합시다. 지금 그거 선 넘는 얘기인 거 알고 하는 거죠?”
“허허, 자식 발끈하기는. 그냥 해본 소리야 인마, 그냥.”
어딘가 모를 야비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그가 담뱃불을 붙이며 말했다.
“후우. 암튼 너나 나나 같은 족쇄에 묶여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니까 평생 함께 가자 이 말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러고 싶으면 행동이나 똑바로 해요. 계속 그렇게 지망생 애들이나 상대하다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수가 있으니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입니다.”
“크큭. 네가 있는데 뭔 걱정이야? 그리고 막말로, 내가 애들 꼬여다가 어디 엄한데 써? 너 필요할 때마다 따박따박 모셔다 주잖아. 네가 그중에서 계약한 애들이 몇인데.”
“어쨌거나 조심 좀 해요. 얼마 전에도 원정 성매매 어쩌고 하면서 기사 하나 크게 떴던데. 혹시 그것도 형님이 제보한 거 아니에요?”
“흠, 글쎄? 난 최근에 따로 뭐 제보한 건 없는데? 몇 년 전에야 말 안 듣는 애 하나 있어서 언론사에 찔러 넣긴 했지만서도.”
“그러다 검찰이든 경찰이든 수사라도 들어오게 되면 결국 형님만 난리 나는 겁니다. 제발 선 좀 지키면서 해요, 선 좀.”
“하, 그놈의 잔소리는. 어째 너는 나일 먹어도 변하는 게 없냐? 빈틈이 없어요, 빈틈이.”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으로 지호는 잠시 주변을 살폈다.
그들의 대화가 정확히 어떤 걸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꽤나 적나라하고 위험해 보인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대화를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서슴없이 해댈 수 있는 사람들이라니.
물론, 다소 한산한 시간이라 편의점 주변으로 인적이 거의 보이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릉.
그때, 편의점 문 앞에 서 있던 지호 뒤편으로 종소리가 얕게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지호를 불러왔다.
“저,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뒤를 돌아보자, 걸어두었던 팻말을 거두며 알바생이 지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네.”
어린 지호의 입장에선 꽤나 충격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대화.
지호는 그들을 일별하곤 편의점으로 들어가 사려던 물건들을 하나씩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지호가 계산을 모두 끝내고 편의점 앞으로 다시 나왔을 땐, 그들은 더 이상 그곳에 앉아 있지 않았다.
“…….”
배우, 매니저, 지망생 등. 단어들로만 미루어봤을 땐 분명 연예계 쪽의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의 내용들은 좀처럼 지호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누구더라…… 분명 어디서 봤던 얼굴이었는데.”
편의점을 빠져나와 골목길로 접어든 지호.
둘 중 한 명의 얼굴이 여전히 낯익게만 느껴지고 있어, 계속해서 기억을 헤집으며 발걸음을 옮겨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골목길을 벗어나 아파트 단지 쪽으로 접어들던 지호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어 온 건 그때였다.
내내 떠올려지지 않고 있던 그의 정체가 드디어 떠오른 듯 지호가 입을 벌리며 혼잣말을 내뱉어왔다.
“맞아. 그 사람이었어. B&D 대표.”